자(字)는
사고(士高)요
광릉(廣陵) 사람이니,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전농시(典農寺)의 주부(主簿)로 제수되고, 여러 차례 옮겨서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 세자필선(世子弼善)·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로 승진되고, 얼마 안 가서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제수되었으며,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형조 참판이 되었다. 에 으로 책훈(策勳)되어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고, 에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승진하여, 이조·호조·병조 3조(曹)의 판서와,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영안도(永安道) 5도(道)의 관찰사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 의 사화(史禍) 때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가 졸하니, 나이가 69세였다.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니 생각함이 심원한 것[思慮深遠]이 익(翼)이요, 일을 하는 데 법도가 있음[執務有制]이 평(平)이다.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고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하여,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서 한때의 추앙한 바가 되었지만, 도량이 협소하고 성격이 또한 너무 까다로워 털끝만한 일도 파고들었다. 일찍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수찬(修撰)하면서
김일손(金馹孫)이 자기의 악행(惡行)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에 결부해서
유자광(柳子光)을 사주(使嗾)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戊午士禍)
에는
이극돈(李克墩)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