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후손들

이목에게 증시하다. 숙종 1717년

김세곤 2015. 3. 12. 10:16

숙종 60권, 43년(1717 정유 / 청 강희(康熙) 56년) 8월 28일(기유) 1번째기사
제조 민진후의 건의로 이목에게 증시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어제(魚際)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내정(內庭) 좌우혈(左右穴), 웅곡(熊谷)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고(故) 평사(評事) 이목(李穆)은 젊어서 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할 때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마침 병환(病患)이 있었으므로 대비(大妃)께서 여무(女巫)를 시켜 반궁(泮宮)18305) 벽송정(碧松亭)에다 음사(淫祀)를 설행(設行)하게 했었는데, 이목이 그 여무를 몽둥이로 때려서 내쫓았습니다. 대비(大妃)께서 매우 노하시어 성종(成宗)의 병환에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알리니, 성종께서 성낸 체하고는 그 당시 유생(儒生)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들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유생들을 다투어 도망하여 숨었는데, 이목(李穆)만은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종께서 곧이어 대사성(大司成)을 불러서 ‘사습(士習)이 올바른 데로 귀착된 것을 권장하여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시고는 특별히 술을 내렸습니다.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이 되어 용사(用事)할 적에 마침 가뭄이 극심하자 이목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윤필상(尹弼商)을 팽형(烹刑)에 처하여야 하늘이 비를 내려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필상이 은밀히 임금에게 부처를 숭봉하도록 권하자 이목이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소장(疏章)을 올려 윤필상을 간귀(奸鬼)라고 지척하고 주참(誅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드디어 공주(公州)로 귀양갔습니다만, 그 뒤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평사(評事)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 28세였습니다. 무오 사화(戊午士禍)18306) 를 당하여 윤필상이 없는 죄를 씌워 살해하였는데, 갑자 사화(甲子士禍)18307) 때 화(禍)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쳤습니다. 같은 시대에 화를 입은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현인(賢人)들은 모두 이미 역명(易名)18308) 의 은전(恩典)이 내렸는데도 이목(李穆)의 경우는 그의 후손(後孫)인 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여 증직(贈職)을 얻는 데 그쳤을 뿐 아직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증시(贈諡)할 것을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8책 60권 31장 A면
【영인본】 40책 673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