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와 호남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인영 2, 나인영 매국대신 처단에 나서다

김세곤 2015. 2. 16. 08:53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인영 2>

 

나인영, 매국대신 처단에 앞장서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06년 1월에 나인영 ․ 오기호 ․ 이기 등은 일본에서 돌아왔다. 당시 덕수궁 앞은 을사늑약을 파기할 것을 주청하는 관리들과 민중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다. 일제는 3월에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민중을 더욱 탄압하였다.

 

 

나인영은 평화적 방법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오기호가 한 번 더 일본에 가서 호소하여 보자고 제안하였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1906년 5월과 9월 두 번에 걸쳐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 요로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허사였다. 나인영은 또 한 번 배신감을 안고 귀국 길에 올랐다.

 

 

1907년 2월에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자신회 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자신회는 정신을 개조하여 새로운 사상과 사업을 새롭게 하겠다는 계몽단체였다. 그런데 사실은 을사오적과 매국 대신들을 처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나인영이 비밀리에 동지와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을 때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민영환의 수하인 김동필, 이홍래 등이 찾아왔다. 양측을 연대시킨 주역은 나인영의 친구이자 민영환의 수하였던 남원 출신 김인식이었다.

나인영 측은 나인영· 오기호 · 이기 · 최동식 · 윤주찬 등 전라도 출신의 전직 관료들이었고, 민영환 측은 김동필· 박대하 · 이홍래· 이용채 등 서울 출신의 전직 관료들과 항일 의병장들이었다.

 

 

이들은 행동노선에 이견이 있었다. 나인영 측은 매국대신 암살이었고, 민영환측은 의병항쟁이었다. 결국 나인영측 노선이 채택되었다. 양측은 역할을 분담해 나인영 측은 이념, 선전, 문건 작성을 맡고 민영환 측은 자금 확보, 결사대 모집, 거사 실행 등을 맡았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가산을 털어 마련한 1천냥을 박대하에게 주어 전라 경상 양도로 가서 장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박대하의 주선으로 응모자 150인이 서울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문제는 수 만냥의 자금이었다.

 

 

그러자 김인식이 담양 출신 성균관 박사 이광수 李光秀를 통하여 전 내부대신 이용태에게 거사를 알리자 이용태는 1만 7천냥을 내놓았다.

1)

 

 

나인영은 이용태가 내놓은 거사 자금을 김동필에게 주어 인천항에서 양총 8자루를 구입하게 하였다. 동시에 박대하를 삼남지방으로 보내 결사대원을 모집하게 했다.

 

 

나인영은 대신들이 입궐하는 설날(양력 2월13일)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모집한 장사들이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아 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월28일에 나인영은 폭탄을 넣은 상자를 외국인이 보낸 것처럼 위장해 박제순과 이지용에게 보냈으나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3월21일에는 태자전하(太子殿下)의 생신날 을사오적이 대궐에 들어가는 길에서 모두 처단하기로 하였으나, 오적들이 대궐에 들어가는 시간이 일치하지 않아 단행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나인영은 장정 강상원 등 18명을 감사의용단 敢死義勇團으로 모집하여 장정 3명이 매국대신 1명을 대적하게 하도록 6개조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참정대신 박제순은 오기호가, 내부대신 이지용은 김동필이, 군부대신 권중현은 이홍래가, 학부대신 이완용은 박대하가, 법부대신 이재극은 서태운이, 전 前 군부대신 이근택은 이용채가 맡았다.

나인영은 3월25일에 거사하였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광화문 앞에서

결사대를 이끌고 박제순을 기다렸다. 결사대는 일본군 7-8명의 호위를 받고 사인교를 타고 가는 박제순을 목격하였으나 우물쭈물 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학부대신 이완용을 담당한 결사대는 서대문 안을 거사장소로 정하고 새벽부터 기다렸으나 잠시 주막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이완용이 지나가 버렸다.

 

 

다만 사동(寺洞) 길에서 군부대신 권중현을 기다리던 결사대만이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일본군 6-7인의 경호를 받으며 인력거를 탄 권중현이 다가오자, 이홍래가 그 앞을 가로막으며 “역적 놈아 네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면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이 때 일본군이 달려들어 이홍래를 잡아 제치자, 옆에 강상원이 권중현을 쏘았다. 그러나 빗나가 부상에 그치고 말았다.

 

 

나인영은 거사가 완전히 실패로 끝나자 재차 거사할 것을 계획하고 박대하등을 시켜 장사를 다시 모집하게 했다. 그러나 서창보가 체포되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기 시작했고 무고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었다.

 

 

4월1일에 나인영은 무고한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오기호, 김인식과 함께 평리원에 자수하였다.

자신회 自新會 회원은 200명 정도였는데 31명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907년 7월 6일에 평리원은 나인영에게 유배 10년형, 오기호와 김인식은 유배 5년형, 이기는 유배 7년형을 선고하였다. 매국대신 암살에 가담한 나머지 사람들도 처형 또는 유배형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나인영과 오기호는 신안군 지도 智島에 유배되었는데 12월27일 유배 5개월 만에 순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2)

1) 전 학부협판 민형식도 1만 4천 냥을 내놓아 자금문제는 해결되었다.

2) 여러 자료에는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고 되어 있는데,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1907년 7월에 퇴위하였다. 1907년 12월은 순종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