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여러 가지이다. 그 중 하나가 “역사 기록을 완전히 믿지 말라”이다. 조선왕조실록도 역사적 사실(Fact)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 사례가 비운의 왕 단종의 죽음이다.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노산군이 되어 영월로 귀양 가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1457년(세조 3년) 10월21일자 세조실록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1571년에 편찬된 세조실록은 편찬 책임자가 신숙주 ․ 한명회 등 정난공신들이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기사 내용도 제약이 많고 편찬자의 의도가 많이 개입되었다. 따라서 단종 관련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세조실록을 정면으로 반박한 이는 사관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었다. 김일손은 죽음을 무릅쓰고 춘추직필하였다. 이는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3일 기록에 나온다.
사초에 기록된 노산대군의 일에 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김일손은 공초하기를,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붙였습니다.”하였다.
여기에서 조의제문은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지은 조문이다.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자는데, 꿈에 신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초나라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라,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훨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글을 지어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였다.
그런데 희대의 간신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낱낱이 분석하고 평가하였다. 그는 항우는 세조를 비유한 것이고, 의제(義帝)는 노산(魯山)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여 세조의 정변과 찬탈을 풍자했음을 밝혔다.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유자광의 말을 그대로 믿고, 김일손을 능지처참하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였다. 또한 관련자와 김종직의 제자들을 처형 내지 귀양 보냈다. 이 사건이 바로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이다.
원래 사화 士禍는 선비들이 입은 화라고 하여 선비 사 士를 쓰는데, 무오사화는 사초때문에 일어났다 하여 역사 사 史를 써서 사화 史禍라고도 한다.
한편 1516년(중종 11년) 11월23일에 중종은 노산군과 연산군의 후손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호조참의 이맥은,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하였다.
또한 이자(李耔 1480-1533)도 음애일기(陰崖日記)에서 사기(史記)에, “노산이 물러나 영월에 있다가 금성군이 패했단 말을 듣고 자진(自盡)했다.”하였으니 이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어서 한 말이었다. 대개 후일에 실록을 편찬하는 자들은 모두 당시에 아첨하던 자들이었다.” 기술하여 세조실록에서 단종이 자살한 사실을 전면 부정하였다. 단종에 대한 역사 바로 잡기를 한 것이다.
이후에도 1669년(현종 10년)에 송시열, 송준길 등은 중종 이래의 사화, 강빈, 엄흥도의 일 등을 아뢰면서 단종이 죽임을 당한 것을 분명히 하였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현종실록 1669년 1월5일)
요컨대 역사적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5.18 광주민주화 항쟁도 그렇다. 전두환 정권이 ‘폭도’라고 한 광주 시민들은 ‘민주투사’였다.
역사왜곡은 한 순간이지만 역사적 진실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