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와 호남
을미년을 다시 본다. 무등일보 기고 2015.1.5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15. 1. 9. 05:43
기고- 을미년을 다시 본다 |
입력시간 : 2015. 01.05.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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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기념관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한 번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나니
1894년 갑오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수탈에 대한 항거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갑오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을미년(1895년)까지 미적거리면 병신년(1896년)에는 병신(病身)되리라는 절박감에서, 참요를 부르며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 (輔國安民) 척왜양(斥倭洋)’을 기치(旗幟)로 하였다.
4월27일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과 민비일파는 당혹하였다. 동학군이 흥선대원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민비는 임오군란의 망령을 떠올리며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막강하다고 소문난 청나라 해군 북양함대는 일본에 힘없이 패하였다.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북경의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예산을 전용하였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발 밖에 없었다 한다.
일본이 청나라를 이겼다는 소식을 듣자 전봉준은 다시 척왜(斥倭) 창의하였다. 2차 동학농민 봉기에는 동학교주 최시형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 4만 명은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10월23-25일과 11월8-9일 두 차례에 걸쳐 50여 차례 혈전을 벌였으나 참패하였다. 겨우 500명만 살아남았다. 연발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화승총의 농민군이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김홍집 내각이 주도한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다.
1895년에 민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열세에 몰린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0월8일 새벽에 일본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 경찰과 낭인배들은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 (나중에 명성황후로 추존됨)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조선의 국모(國母)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자 백성들은 분노하였다.
그런데 김홍집 내각은 1896년 1월1일부터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유림을 비롯한 백성들은 폭발하였다. ‘목숨은 내놓을 수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고 하면서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병신년) 2월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은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붕괴되었고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미 나라는 병신되어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자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에 대한제국은 망하였다.
한편 1598년 11월19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 영의정 유성룡(1542-1607)은 파직을 당하였다. 토사구팽이었다. 유성룡은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서 임진왜란 7년사를 썼다. 이 책이 바로 징비록 (懲毖錄)이다. ‘징비’란 『시경』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그런데 조선은 징비를 하지 못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후 312년 만에 망했다.
2014년 갑오년은 정말 힘들었다. 세월호 참사, 정부의 무능, 관피아·정피아. ‘땅콩회항’같은 갑질에 을이 좌절하였고, ‘미생’의 장그래들은 눈물 흘렸다.
올해는 을미사변 2주갑, 을사늑약 110년, 광복 70년이다. 치욕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2015년 을미년에는 병신되지 않도록 미적거려서도 안 된다. 사회가 소통하고 화합하여야 한다. 을의 기(氣)가 살고, ‘미생’이 ‘완생’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무등일보 zmd@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