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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상징이자 5·18 광주민주항쟁 현장인 금남로의 유래를 아시나요? 금남(錦南)이란 무슨 의미인지요? 11월 중순에 서울시 대방동 남도학숙에서 광주·전남 지역 대학생 600명을 상대로 ‘임진왜란 7년 전쟁과 호남사람들’ 강의를 하였습니다. 먼저 호남역사인물 퀴즈부터 냈습니다. 충장로가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을 기리는 도로인데 금남로는 누구를 기리는 도로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호남역사인물을 이렇게 모르다니…. 금남로는 1624년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금남군(錦南君) 군호를 받은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기리는 도로입니다. 정충신은 고려 말에 왜구를 물리친 정지 장군의 9대손으로 광주시 향교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광주향청의 좌수이고 어머니는 여종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17세의 나이로 광주목사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였습니다. 1592년 7월 8일에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금산군 이치에서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저지시켰습니다. 정충신은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2천리 길을 걸어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전라도가 무사함을 알렸습니다. 이때 권율의 사위 병조판서 이항복이 그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그는 곧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정충신은 1608년에 조산보 만호로 근무했고 1617년에는 회답사겸쇄환사 오윤겸의 수행군관으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 321명을 데려 왔습니다. 이때 양산보의 손자 양천경의 가족 4명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는 종사관 이경직의 ‘부상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인조는 공주로 피신하였고 이괄은 한양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정충신은 이괄을 진압하는데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에 봉해졌습니다. 한마디로 정충신은 천출(賤出)인데도 입지적인 인물이며, 영조 시절 호남양전사 원경하가 영조에게 호남의 인물을 등용하여 달라는 상소문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 기대승·김인후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고경명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박상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의 공적, 김덕령의 용기, 임형수·임제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영조실록 1747년 10월 2일)
광주공원의 ‘도원수 권율장군 창의비’에는 정충신의 이름이 적혀있고, 사직공원에도 충장공 김덕령의 춘산곡 시비와 함께 금남군 정충신의 시비가 있습니다.
공산 空山이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아 촉국 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지금히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한편,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는 정충신을 모신 진충사(振忠祠) 와 묘소가 있는데, 서산시는 정충신을 서산의 인물로 추앙하고 현창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광주광역시나 동구청은 금남로에 대한 설명이나 정충신 현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이는 광주의 다른 도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봉로가 고경명, 고봉로는 기대승, 눌재로와 사암로는 박상과 박순, 하서로와 면앙로는 김인후와 송순, 필문대로는 이선재, 회재로는 박광옥, 경열로와 구성로는 정지와 전상의 장군, 죽봉로와 서암로가 한말 의병장 김태원과 양진여 등 호남의 역사인물을 기리는 도로인데도, 광주시나 구청 홈페이지에서 이에 대한 설명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의향 광주가 이렇다니…. < 호남역사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