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후손들

남효온 사적 뒤에 쓰다. 성호전집 제55권

김세곤 2014. 11. 27. 21:44

성호전집 제55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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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題跋)
남추강 사적 뒤에 쓰다〔書南秋江事蹟後〕


성인(聖人)이 중도(中道)를 행하는 선비를 얻어 함께하지 못하게 되자 또한 광자(狂者)를 취한 것은 그 진취적인 면 때문이었으니, 장차 인도하여 진보하게 하면 광자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털끝만치라도 그 중도를 잃으면 폐단이 무궁하거늘 성인은 광자에게 무엇을 취하였던가.
추강공(秋江公)은 우뚝하고 준열한 인물이지만 또한 너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세도가 무너지고 쇠퇴한 세상 가운데 두면 사기를 격앙시키고 떨치는 효과가 매우 크지만 중용의 도로 헤아려 보면 놀라울 뿐이다. 예전에 이천(伊川)이 18세에 상서(上書)하여 스스로를 제갈량(諸葛亮)에 비유하였는데, 제갈량이 자신을 사사로이 하지 않은 면은 있었지만 남양(南陽)에서 은둔해 있을 적에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는 실로 이천이 어릴 때의 일이지만, 그 논한 바는 모두 세도를 위한 장구한 계책이 아님이 없었다.
당시 소릉(召陵)이 아직 복위되지 못한 것은 한 가지 잘못에 불과하거늘 한낱 유생과 무슨 상관이길래 몸을 내던져 가며 할 말을 다하였던가. 더구나 이는 선조(先朝)의 일에 관계되어 진실로 감히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었음에랴. 추강이 상소하였던 나이는 정자(程子)와 같았지만 일은 판연히 다르다. 《춘추(春秋)》의 의리는 존자(尊者)를 위하여 허물을 숨겨 주는 것이므로 공자께서 소공(昭公)의 비례(非禮)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육신(死六臣)의 일 같은 것은 대신이 마땅히 칭찬하고 높이어 후세를 권면해야 할 일이니, 그렇지 않으면 신하의 충절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추강이 다시 갑자기 추켜올려서 표창하지 못할까 걱정하듯 한 것으로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다. 자신이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육신을 나열해 전(傳)을 지어 세상에 크게 떠들어 놓고 가문이 섬멸될 것을 생각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점필재(佔畢齋)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것은 결단코 아무 생각 없이 지은 것이 아니라 김일손(金馹孫)이 말한 대로 충분(忠憤)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또 그 문집을 편차하면서 이 글을 첫머리에 두었으니, 어찌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는가.
공자가 원양(原壤)이나 상호(桑扈)와 교분을 끊지 않은 것은 고인(故人)이기 때문에 그 친구 된 도의를 잃지 않은 것이다. 김한훤(金寒暄)이 설사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응당 머리를 깎고 벌거벗고 다닌 악행이 있지 않았는데 어찌 죽음을 앞에 두고도 벽을 향해 돌아누워 상대하지 않기까지 하였던가. 이는 모두 지나치게 고상해서 중도를 잃은 것이니 후세의 교훈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대의 청한자(淸寒子) 또한 중도가 아니었으니, 이미 스스로 벼슬을 않기로 작정하였다면 어찌 적절한 방도가 없었겠는가. 행동이 모두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곧 화를 면한 것만도 요행이라 하겠다. 오직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만은 기미를 보고 벼슬을 떠나서 장님, 귀머거리 병에 핑계 대었고, 직학사(直學士)인 원호(元昊)는 토실(土室) 속에서 복(服)을 입었으니, 거의 환란에 잘 대처하여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주C-001]남추강(南秋江) :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ㆍ행우(杏雨)ㆍ벽사(碧沙) 등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정여창, 김굉필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이 재앙 때문에 구언하자 25세 때 유학(幼學)으로서 소릉(召陵)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당시 공신들의 미움을 사서 배척당하였다. 이후 단종을 위해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전(傳)을 지어 또 기휘를 범하였다. 사후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소릉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중종 때 소릉이 복위된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조려(趙旅),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리었다. 문집으로 《추강집》이 전한다.
[주D-001]성인(聖人)이 …… 때문이었으니 :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할 바에는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절조를 지키면서 하지 않는 바가 있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라고 하였는데, 광자란 곧 뜻이 매우 커서 행실이 뜻에 못 미치는 자를 말한다.
[주D-002]이천(伊川)이 18세에 상서(上書)하여 : 〈상인종황제서(上仁宗皇帝書)〉를 말한다. 정이(程頤)가 인종 27년(1049)에 올린 글로 《이정전서(二程全書)》 권6에 실려 있다. 명문장으로 《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나 《고금연감(古今淵鑑)》에도 실려 많이 읽힌 글이다.
[주D-003]소릉(召陵) : 문종(文宗)의 비(妃)이자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옛 능호(陵號)이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어 시해한 뒤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의 영혼이 나타나 “죄 없는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라고 하였는데, 꿈을 깨자마자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격분한 세조는 소릉을 파헤쳐 버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어떤 승려가 현덕왕후의 관을 발견하고 숲 속에 묻어 두었는데, 1513년(중종8)에 소릉을 복위하자는 소세양(蘇世讓)의 주청으로 인하여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 곁으로 이장하고는 함께 현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燃藜室記述 文宗朝故事本末 昭陵廢復》
[주D-004]추강이 …… 같았지만 : 정이(程頤)가 상서한 나이는 18세이고, 추강 남효온이 상소를 올린 나이는 본래 25세인데 당시에 18세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성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도 남효온이 18세에 상소하였다고 되어 있다.
[주D-005]공자께서 …… 것이다 : 《논어》 〈술이(述而)〉에서, 진(陳)나라 사패(司敗)가 공자에게 노 소공(魯昭公)이 예를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대답하니, 나와서 공자 제자에게 소공이 동성(同姓)인 오(吳)나라 여자와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자 했던 일을 거론하면서 군자도 편당(偏黨)을 하느냐고 공자를 비난하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자신이 잘못 말했다고 시인했는데, 당시 공자가 소공의 잘못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소공이 고국의 선군(先君)이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을 말할 수 없어 자신이 허물을 감수한 것이니, 이는 후세 신하들의 법이 될 만하다고 평가되었다. 여기서는 세조와 단종의 일도 선군의 불미스러운 일이었으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의미로 인용한 듯하다.
[주D-006]점필재(佔畢齋)가 …… 것이다 : 점필재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6)이다. 생전에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왕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이를 사초에 실었고, 유자광(柳子光) 등이 이 글에 세조를 비난하는 뜻이 있다고 고변하여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제자인 김일손 등을 비롯해 많은 사림들이 죽음을 당했다.
[주D-007]원양(原壤)이나 상호(桑扈) : 모두 공자와 친분이 있었던 당시 은자(隱者)들이다. 원양은 모친상을 당했을 때 노래를 불렀다고 하고, 상호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의관을 갖추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하여 노자(老子)의 부류라고 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원양의 다리를 지팡이로 두드리면서 늙어서 죽지 않으니 풍속을 해치는 적(賊)이라고 한 일화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보면 공자가 늙도록 이들과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접여상호(接輿桑扈)〉에서는, 요컨대 이들이 다 어질기는 하되 세상 피하기를 중도(中道)에 지나치게 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주D-008]김한훤(金寒暄) :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강학에 전념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 되었는데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주D-009]머리를 …… 악행 : 《초사(楚辭)》 〈구변(九辨)〉에 이르기를, “접여(接輿)는 머리를 깎았고, 상호(桑扈)는 벌거벗고 다녔다.” 하였다. 즉 법도에 맞지 않은 행실을 한 것을 말한다.
[주D-010]어찌 …… 하였던가 : 남효온(南孝溫)이 김굉필(金宏弼)과 절교한 배경이 《연려실기술》 〈무오당적(戊午黨籍)〉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김굉필이 말하기를 “백공(伯恭) 남효온 등은 모두 진(晉)나라 선비들과 같은 풍습이 있다. 진 나라 때 선비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자네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 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당시 선비들의 지나친 기절을 경계하였다. 또 “후에 남효온의 병이 위독하여 김굉필이 가서 문병하였으나 거절하고 보지 않으므로 김굉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효온은 벽을 향해 누워서 말 한마디 없이 영원히 결별하였으니, 이는 김굉필과 절교하는 것이었다. 남효온이 김굉필을 끊으려고 한 것은 세상일이 어지럽고 위태한 관계로 철인(哲人)이 아니면 능히 화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남효온은 자신의 행위로 인한 화가 김굉필에게 미칠까 봐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 절교한 것이고,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다 하여 절교하고자 한 것은 남효온이 아니라 김굉필 쪽이라는 것이다.
[주D-011]청한자(淸寒子) :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신동으로 소문나 세종의 장려를 받았다. 단종이 폐위되자 독서를 파하고 출가하여 설잠(雪岑)이라 칭하고 전국을 방랑하며 기행을 일삼았다. 경주 금오산실(金鰲山室)에 은거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저술하였다.
[주D-012]이맹전(李孟專) : 1392~1480.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세조가 집권하여 단종을 폐위하자 선산(善山)에 은거하여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와만 교분을 유지하였다. 후에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켰다는 사실이 알려져 생육신에 추대되었다.
[주D-013]원호(元昊) :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ㆍ관란(觀瀾)이다. 단종 초에 관직을 사양하고 은거하였으며, 단종 사후에 영월(寧越)에서 남몰래 삼년상을 치르고 복을 입었다. 후에 생육신에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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