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장 고광순 1907년 연곡사에서 순절 - 매천 황현의 만시...
시(詩)○정미고(丁未稿)
연곡의 전장에서 의병장 고광순을 조문하다 고가 패하여 죽은 뒤 산중 사람들이 그를 가련하게 여겨 멍석에 싸서 채소밭 가운데에 장사 지냈다.〔燕谷戰場吊高義將光洵 高敗死後 山中人憐之 藁葬菜圃中〕
천 봉우리 연곡은 푸른빛이 가득한데 / 千峯燕谷鬱蒼蒼
작은 전투 충사도 국상인 것이라네 / 小刦虫沙也國殤
전마는 흩어져 논둑 따라 누웠고 / 戰馬散從禾隴臥
까마귀 떼 내려와 나무 그늘에서 나네 / 神烏齊下樹陰翔
우리네 시문이야 무슨 보탬이 되랴 / 我曹文字終安用
명문가의 명망에는 댈 수가 없네 / 名祖家聲不可當
홀로 서풍 향해서 뜨거운 눈물 뿌리나니 / 獨向西風彈熱淚
새 무덤이 국화 곁에 우뚝하게 솟았네 / 新墳突兀菊花傍
[주B-001]정미고(丁未稿) : 1907년(융희1), 매천이 53세 되던 해에 지은 시들이다.
[주C-001]고광순(高光洵) : 1848~1907. 한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서백(瑞伯)이고, 호는 녹천(鹿川)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895년(고종32)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후로도 계속 항일의병활동을 지속하다가, 1907년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소속되어 지리산 연곡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주D-001]충사(虫沙) :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말하는 것으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후집(後集) 권37에, “주나라 목왕이 남쪽으로 정벌할 때 일군이 모두 죽으니, 군자는 원숭이나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나 모래가 되었다.〔周穆王南征 一軍盡化 君子爲猿爲鶴 小人爲蟲爲沙〕”라고 하였다.
[주D-002]국상(國殤) :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구가(九歌)〉 중의 한 수로,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장수와 병사들의 영웅적인 기개와 장렬한 정신을 칭송하는 일종의 제가(祭歌)이다. 후대에는 국가를 위하여 전사한 장수와 병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楚辭 九歌》
[주D-003]명문가 : 고광순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峯) 고인후(高因厚)의 12대 사손(祀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