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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5일 Facebook 이야기
김세곤
2014. 8. 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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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그리고 그 후
명량, 그리고 그 후
오늘자 남도일보에 게재된 기고 글입니다.
김세곤 배상 (호남역사연구원장)
개봉일에 ‘명량’을 보고 나서, 다음날 다시 영화를 보았습니다. 명량해전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어떻게 12척의 배로 300척의 왜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칠천량 해전에게 조선 수군이 전멸한 판에.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장수들은 “이 싸움은 불가하옵니다.”하였습니다.
“만일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말이다.” “두려움에 가득 찬 저들을 어떻게 용기로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죽어야겠지. 내가.”
이순신은 죽고자 하였습니다. 대장선 홀로 싸우면서 자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조선 수군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고 왜군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실로 군신 軍神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충(忠)을 쫓고, 그 충은 백성을 따르는 진정한 리더였습니다.
싸움이 끝나고 귀환 길 갑판에서 장정 수봉은 이순신에게 간식을 건넵니다. 이순신은 “토란이구나. 먹을 수 있어서 좋구나.”하면서 자기 옆에 그를 앉혔습니다.
들판을 걸으면서 아들 회는 이순신에게 울돌목 회오리에 대하여 묻습니다. “천행이었다.” “천행이라니요. 그렇다면 아주 낭패를 볼 수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 순간에 백성들이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냐.” “백성을 두고 천행이라 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민초가 있었습니다. 전라도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정도전의 ‘민본’, 영화 <변호인>에서 말한 헌법 제1조 가 생각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명량’은 개봉 2일 만에 관객 140만 명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합니다. 영화가 대박이 나면 날수록 이순신 신드롬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순신 열풍이 올 여름을 더욱 뜨겁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행보는 어떠할까요. 하루 후에 이순신 함대는 신안군 어외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300여척의 피난선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나주진사 임선, 임환, 임업 등이 승첩을 축하하고 식량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법성포를 지나 서해로 북상하여 21일에 고군산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12일간 머물렀고 조정에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한편 해전에 패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을 찾아다녔습니다. 무안반도를 온통 뒤지면서 살육과 납치 그리고 방화를 자행하였습니다. 영광과 장성 백성들 코 10,040개를 베어서 일본에 보냈고, 강항과 정희득 일가가 영광 앞바다에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10월11일부터 신안 안편도에 머문 이순신은 14일에 충남 아산 본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겉봉투에 ‘통곡 痛哭’’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왜군들이 아산으로 쳐들어가서 보복을 한 것입니다. 본가와 마을을 통째로 초토화하고 막내아들 면을 죽인 것입니다. 면의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목 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이 날의 <난중일기>입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이런 비통함 속에서도 이순신은 일상을 게을리 할 수 없어 10월 29일에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전선을 건조하였고 1597년 겨울을 지냈습니다.
안편도, 지금의 신안군 장산도는 이순신의 눈물이 서린 곳입니다. 자식잃은 아버지 이순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명량과 신안 장산도 그리고 목포 고하도를 잇는 이순신 유적 코스를 동영상으로 올렸으면 합니다. 그러면 올 여름에 이순신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올 것입니다. 이순신 마케팅. 간단한 SNS 홍보만으로도 대박날 수 있습니다. -
약무호남 시무순신
이순신 신드롬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역사에서 검색 1위입니다.
왜 이순신인가? 여러 전문가들이 한마디씩 하고 계십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있습니다. 영웅의 부활은 곤란합니다. 호남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없었습니다. 명량도 이순신 혼자 이긴 전쟁이 아닙니다. 민초와 정탐꾼과 격군 승병, 장수와 군사들이 어울려 졌습니다. 물론 이순신의 리더십이 돋보이지만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순신이 재임묭된 직책도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 통제사였습니다.
전라좌수영은 이순신 직할 ...
이순신은 1593년 7월에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편지 글을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1598년 11월에는 약무호남 시무순신이었습니다. 민초들이 여수에 충민사를 세웠고, 승려들이 석천사에 그의 영혼을 추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