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영화 그리고 그 후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행보는 어떠할까요. 9월17일에 이순신 함대는 신안군 어외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300여척의 피난선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나주진사 임선, 백호 임제의 동생 임환, 임업 등이 승첩을 축하하고 식량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법성포를 지나 서해로 북상하여 21일에 고군산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12일간 머물렀고 조정에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한편 해전에 패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을 찾아다녔습니다. 무안반도를 온통 뒤지면서 살육과 납치 그리고 방화를 자행하였습니다. 영광과 장성 백성들 코 10,040개를 베어서 일본에 보냈고, 강항과 정희득 일가가 영광 앞바다에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10월11일부터 신안 안편도에 머문 이순신은 14일에 충남 아산 본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겉봉투에 ‘통곡 痛哭’’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왜군들이 아산으로 쳐들어가서 보복을 한 것입니다. 본가와 마을을 통째로 초토화하고 막내아들 면을 죽인 것입니다. 면의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목 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이 날의 <난중일기>입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이런 비통함 속에서도 이순신은 일상을 게을리 할 수 없어 10월 29일에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전선을 건조하였고 1597년 겨울을 지냈습니다.
안편도, 지금의 신안군 장산도는 이순신의 눈물이 서린 곳입니다. 자식잃은 아버지 이순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명량 2편은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명량 - 고금도 - 순천왜성 싸움 - 노량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