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코 무덤 , 김세곤 글과 사진
제13회 일본 교토의 귀 무덤(코 무덤) (1)
일본 교토 답사를 하였다. 청수사를 보고 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풍국신사 앞에 있는 미미쯔카(이총)를 찾았다. 풍국신사 앞 야마토 대로변에는 이총공원이 있다. 귀 무덤은 이총공원 주변 주택가에 있었다.
먼저 안내판을 보았다. 안내판은 2003년에 교토시에서 만들었는데 일본어와 한글로 되어 있다.
사적 호코지 (方廣寺) 절 석축 및 석탑 (1969년 4월12일 지정)
귀 무덤 耳塚 (코 무덤 鼻塚)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가 대륙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 (文祿) · 게이초(慶長)의 역 役 (한국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1592-1598)’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에 조선 군민 軍民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행하여 졌다 한다. 이것이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귀무덤(코무덤)은 사적 오도이(御士居) 토성등과 함께 교토에 현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유적중의 하나이며 무덤위에 세워진 오륜석탑은 1643년에 그려진 그림 지도에도 이미 그 모습이 나타나 있어 무덤이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니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다.
교 토 시
평성 15년 (2003년) 3월
안내문을 읽어보니 지도에 미미쯔가(귀무덤)로 표시된 무덤 이름이 귀무덤(코무덤)으로 표기되어 있다. 왜 귀무덤에 코무덤이 괄호로 병기되어 있을까? 이렇게 무덤 이름을 안내판에 기재한 동기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니 원래 이 무덤은 코 무덤이었다. 1597년 9월28일에 공양의식을 주관한 상국사 주지 세이코 쇼타이(1548-1607)가 지었다는 비문에도 코무덤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도 ‘간양록’에서 코무덤에 관한 글을 기술하고 있고, 정유재란 의병장 임환의 한시에도 코 없는 사람의 슬픔이 적혀 있다. (주1)
또한 1607년 조선의 회답겸쇄환사 경섬의 <해사록>에도 코무덤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2)
이런 코 무덤이 귀 무덤으로 둔갑된 것은 에도 막부의 관학파 유학자 하야시 라잔 (林羅山 1583-1657)에 의해서이다. 라잔은 1642년에 출간한 <풍신수길보>에서 코무덤(비총)을 귀무덤(이총)으로 불렀다.
하야시는 코 무덤이라고 하면 잔혹성과 야만성을 드러낼 수 있어서 귀 무덤으로 미화한 것이다.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잔혹성과 야만성이 없어지지 않겠지만, 세월이 100년 이상 지나자 사람들은 코 무덤을 아예 귀 무덤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래서 이 안내판도 2003년 이전에는 귀 무덤으로 표시되었는데 2003년에 교토시에서 새로 안내판을 만들면서 귀무덤(코무덤)이라고 표시하고 한글 번역 글도 적어 놓았다.
그리고 보니 2003년에 일본 측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노력을 한 것이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의 장수들에게 조선 군민 軍民 남녀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오도록 하였고 공을 세운 장수를 격려하였다. (주4)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를 베어오라는 지시가 적혀 있다.
당초에 풍신수길이 금오를 보낼 때에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은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뿐이니 사람 한 명 죽인 것을 표시하는 의미로 코 하나를 베어 바치고,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생포하기를 허락한다. 운운”하였으므로, 왜군은 이번에 조선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번번이 코를 베었다. 그 뒤 수십 년간 조선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난중잡록 1597년 7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정유재란 때 왜군의 코베기 자행이 실려 있다.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 때에 히데요시가 모든 왜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서 수급(首級) 대신으로 바치게 하였으므로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수길에게 보내었다. 수길은 이를 점고하여 본 뒤에 그 나라 북망(北邙)인 대불사(大佛寺) 옆에 모두 매장하여 한 구릉을 만들고 자기 나라 사람에게 위엄을 보였다고 하니, 사람을 참혹하게 죽인 것은 이것으로도 가히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코 없이 살아있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고려진 각서>에도 “1597년에는 왜군 한 명당 조선인의 코가 3개씩 할당되어, 그 코가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졌고, 대불사 앞에 무덤을 쌓아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코베기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왜군 장수들은 코를 자루나 통발에 담아 일본에 보냈고, 자루나 통발 하나에는 1,000-3,000명분의 코가 들어 있었다. 히데요시 휘하의 검수관은 그 수를 세어 확인하고 영수증을 발행하였고, 논공행상의 자료로 삼았다.
1597년 9월2일 부터 10월10일 까지 검수관이 발급한 코 증명서는
기카와 히로이에가 9.18에 1,245개 9.21 진원현에서 870개,
9.27에 영광과 진원 10,040개 10월초 3,487개였고,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9.14에 1,551개, 9월 하순에 금구와 김제에서 3,369개였다.
구로다 나가마사에게는 9.6에 3,000개, 9.14-9.30에 2,447개였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9.6-9.9 250개, 9.12 61개의 영수증을 받았다.
이를 보면 왜군들이 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하고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한 시기에 코 베기가 상당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토의 코 무덤에는 전라도 백성들의 혼령들이 다수 묻혀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코 자루와 통발들을 마차에 싣고 오사카와 교토를 돌면서 일본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히데요시의 승리와 무위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각인시켰다.
한편 1597년 9월 27일에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보내 온 수만 개의 코를 이곳에 묻으면서 봉분위에 오륜탑을 세웠다. 봉분위에 무거운 돌을 얹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주 6)
9월28일에 히데요시는 세가키(施餓鬼) 법회 즉 공양의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 법회는 상국사 주지 세이코 쇼타이가 주관하고 400여명의 승려들이 모여 공양하도록 하였다. 이 법회는 겉으로는 비명횡사한 조선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자비심을 베푸는 의식이었지만, 실은 히데요시의 군공과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는 행사였다. 소위 병 病주고 약 藥주고였다.
일본 학자 기타지마 만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책에서,
“히데요시는 이 공양을 조선의 전쟁 사망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 코는 조선 남녀노소 백성의 코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시아귀는 히데요시의 자비를 보여주는 허구의 공양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교토의 코 무덤에는 어림잡아 5만개정도의 코가 묻혀 있는데 (주 7), 무덤 바로 앞에는 글씨도 잘 안 보이는 비가 하나 있다.
이 비의 비문은 상국사 주지 세이코 쇼타이가 지었다. 비문의 일부를 읽어보자.
주군(히데요시)은 장수들에게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그러자 명나라가 음흉하게도 무너지려는 자신의 제후국을 구하려 수천의 병사를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 우리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성채와 마을을 평정하였는데 ...... 거리가 멀어서 우리 군대의 승전을 주군이 확인할 수 있도록 코를 보내왔다.
주군이 이를 확인할 때에 더 이상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리하여 주군이 고잔(五山)의 선승들에게 명하여 죽은 자 들의 평안과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성한 제단을 세우고 코 무덤이라고 명명하였다.
비문은 히데요시의 잔혹성을 미화한 글임을 단숨에 알 수 있다. 이 무덤을 세운 것이 자비심의 발로라고 표현한 것은 역겹다.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하고, 위안부를 매춘부로 둔갑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언어를 교묘하게 희롱한다. 심지어 임진왜란도 영어로는 ‘코리아 캠페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쟁이 무슨 선거운동인가? 이렇게 일본인의 역사의식은 지나치게 이중적이고 이기적이다. 일본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 문맥에 칼이 숨어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