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제44회 이순신, 고하도에서 전선 40척을 만들다, 김세곤 글

김세곤 2014. 4. 27. 08:33

제44회 이순신, 고하도에서 전선 40척을 만들다.


1597년 10월29일에 이순신은 신안 안편도에서 보화도로 진영을 옮겼다. 보화도는 지금의 목포 고하도이다. 고하도는 높은 산 아래 (高下)있다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높은 산이란  목포 유달산 儒達山을 말한다.


10월2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맑다. 새벽 두시 첫 나팔을 불어 배를 띄워 목포로 향했다.

목포에 이르렀다가 보화도에 옮겨 배를 정박하였더니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아주 좋기에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보화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월동준비를 하였다. 또한 군량 확보와 전선 건조에 박차를 가하였다. 


11월 6일에 새 집 지붕을 이었고 군량창고도 같이 지었다. 7일에는 새 집의 마루를 놓았고, 8일에는 사방 벽에 흙을 발랐고 수루도 만들었다. 11일에는 새 집에 올라갔다.


이와 함께 이순신은 주변지역으로부터 군량을 조달했다. 해남에 왜군이 남긴 군량 300여석을 접수하고 나주와 영암에서 타작을 방해하는 자들을 잡아 주도자는 처형하고 나머지 4명은 배에 가두기도 하였다.



각 고을 수령이나 유력자들도 양곡을 가져 왔다. 11월5일에 영암군수 이종성이 와서 밥을 30말을 지어 일꾼들을 먹이고, 군량 200섬과 중조 中租 700섬을 마련했다. 11월7일에는 전 흥산현감 윤영현과 생원 최집 등이 와서 군량에 쓸 벼 40섬과 쌀 8섬을 바쳤고, 11월28일에도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가 군량에 쓸 벼 15섬을 바쳤다.


그러나 천 여 명이나 되는 군사에게 먹일 식량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하였다. 배가 운행 시는 반드시 통행첩을 소지하게 하고, 통행첩이 없으면 간첩으로 처벌하였다. 해로통행첩은 배의 크기에 따라 쌀을 바치게 하였는데 대형은 3석 중형 2석 소형 1석으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열흘 동안에 1만 여 섬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해로통행첩 제도를 이순신에게 건의한 이는 군량모집 참모 이의온이었다. 이의온은 회재 이언적의 손자로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한편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나섰다. 왜군 수군과 대적하는 데 전선 13척으로는 크게 부족하였다. 더구나 고하도에 정착한지 4일 만인 11월 2일에 전라우수사의 배가 바람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부서졌다. 이순신은 병선 군관 당언량을 잡아다가 곤장 80대를 쳤다. 배 한 척이 아쉬운 마당에 배가 부서지는 사고가 난 것을 문책한 것이다. 



11월 중순 이후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박차를 가하였다. 난중일기에는 그런 기록이 여러 군데 있다.


11월21일 송응기 등이 산에서 일할 일꾼을 데리고 해남 소나무 있는 곳으로 갔다.

12월5일 정응남이 점세를 데리고 진도로 갔는데 새로 만드는 배를    조사할 일로 함께 간 것이다.


12월10일 배 만드는 곳에 나가 앉아서 지켜보았다.

1598년 1월2일 새로 만든 배에 흙덩이가 떨어졌다.


예로부터 전라도 해안 지역은 소나무가 풍부한 곳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전선 건조지가 고하도와 진도만 언급되어 있지만, 나주 ․ 영암 ․ 강진 ․ 해남 등지에서도 전선이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증거가 1598년 2월 22일의 선조실록이다. 

 

선박의 수를 나누어 정하고 경리에게 보고하다


경리(經理)의 분부로 선박의 수를 나누어 정하였다. 평안도 철산(鐵山)에서 만들어야 할 배의 숫자는 20척인데 이미 완성된 배가 8척이니 더 만들어야 할 배가 12척이고, 황해도 장산곶(長山串)에서 만들어야 할 배의 숫자는 50척인데 이미 완성된 배가 40척이니 더 만들어야 할 배는 10척이며, 충청도 안민곶(安民串)에서 만들 배의 숫자는 10척인데 방금 일을 시작했다. 전라도 변산(邊山)에서 만들 배의 숫자는 20척인데 전일 속공선(屬公船) 13척을 그대로 더 수리했으므로 더 만들 것이 7척이다. 이상은 모두 조선(漕船)에 관계된 것이고,

병선(兵船)에 대해서는 양호(兩湖)의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다시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었다.

주사(舟師)가 이미 40척을 만들었는데 이 숫자를 합하여 경리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보면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이미 40척의 병선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병선(兵船)에 대해서는 충청도와 전라도 양호(兩湖)의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다시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 만큼 정유재란 시 충청도와 전라도의 피해가 엄청났다.


고하도에서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두 가지 좋은 소식을 받았다.

하나는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데 대한 포상이 내려왔다. 거제 현령 안위가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등 차례대로 포상을 받았다.


또한 명나라 장수들은 이순신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전하였다. 명나라 경리 양호는 이순신의 배에 붉은 비단 깃발을 걸어주고 싶지만 할 수 없이 깃발만 전달하였다.


이 시기에 이순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제 喪祭의 몸이라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12월5일에 선조는 이순신이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여 고기반찬을 내렸다.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 용감하려면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떨어지면 능히 할 수 없다. 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라. 

 

11월22일에 장흥에서 전투가 있어 왜군이 달아났다. 이순신은 장흥에서 전쟁에 이겼음을 보고하는 장계를 11월28일에 보냈다. 아쉽게도 전투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목포 고하도에는 지금도 이순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모충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이충무공 기념비가 있다. 이 비는 1722년에  이순신 5대손인 통제사 이봉상이 건립하고 남구만이 비문을 짓고 조태구가 글씨를 썼다.   


고하도 유적 안내판에는 “충무공은 명량 승첩 후 10월29일에 이곳에 진을 치고 이듬해 2월17일 고금도로 옮기기 까지 108일간을 주둔하여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 목포 사람들은 이충무공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이순신 탄신일인 4월28일에는 바로 이곳 고하도 모충사에서 제향을 모신다.”고 되어 있다.

 

이순신은 우리나라 달력에 탄신일이 적혀 있는 사람이다. 4월28일자 아래에 충무공 탄신일이라고 적혀있다. 


목포 유달산에도 이순신의 흔적이 있다. 유달산 입구에 있는 노적봉이 그것이다.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짚과 섶을 덮어 군량미처럼 보이도록 했다는 봉우리이다.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으면 군사가 얼마나 많았으랴. 왜군이 매우 놀랐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