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제43회 전라도 의병들 다시 일어나다 (2) - 조경남과 박광전, 소희익 등 김세곤 글
제43회 전라도 의병들 다시 일어나다 (2) - 조경남과 박광전, 소희익 등 |
입력시간 : 2014. 04.22.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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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고을수령 돌아와 의병장 모함 '참담'
전라감사는 조정에
군사이동의 부당성을 진언했다
왜군은 날마다 곡식을 수확하여
순천왜성에 오래 머물 계획인데
울산성 공격을 위해 전라도 병력을
영남으로 출전 명령한 것에 대한
우려였다
1597년 9월에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백성들은 산 속으로 숨고 배를 타고 피난가기에 바빴다. 어떤 이들은 왜군 앞잡이 노릇을 하여 백성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남원의 조경남, 보성의 박광전, 순천의 소희익 등이 그들이다.
조경남(1570~1641)은 '난중잡록'을 쓴 선비이다. 그는 13세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 쓴 일기는 나중에 선조수정실록 편찬 때 사료로써 활용되었다.
1597년 8월9일에 왜군이 남원을 쳐들어오자 관아 서기 書記였던 조경남은 가족들과 함께 지리산 파근사 波根寺로 피난을 갔다. 9월 중순경에 조경남은 다시 남원 가까운 산으로 돌아와 의병활동을 하였다. 9월22일에 조경남은 왜적 5명을 사살하였다. 이 날의 ‘난중잡록’을 읽어보자.
내가 왜적 5명을 불우치(佛隅峙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지 않았다. 나는 박언량과 하인 두 명과 함께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치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왜적 5명이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이지만 힘써 싸우자”라고 말하고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곧 거꾸러지고 세 놈은 칼을 던지고 살려주라고 애원했다. 나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죽이도록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병 수백 명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더니 달아나 버렸다.
일기가 마치 전쟁르포 같다. 소설가 김경진은 소설 '임진왜란 8권'에서 조경남의 의병활동을 날자 별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9월23일에 조경남은 궁장현(弓藏峴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싸움에서 왜적 36명을 목 베었다. 조경남은 김완과 정사진, 박언량, 박필남 등 20명과 함께 싸웠다. 이들은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임실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동도역 앞 소로를 향하고 있는 왜적 50여 명을 급습하였다.
이어서 조경남은 10월 9일 산동촌 싸움에서 왜적 5명을 베었다. 이 날 조경남 의병은 전 前 초계 군수 정이길을 대장으로 삼고, 조경남을 출전장(出戰將), 정사달을 종사, 유지춘을 참모로 삼았다.
이어서 조경남 의병은 11월4일에는 순천에서 왜군의 상황을 정찰함과 동시에 왜군 앞잡이 3명을 죽였다. 이 당시 조경남 의병은 조명연합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11월24일에는 경상도 함양 음리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17명을 사살하였고, 12월7일에도 경상도 산음에서 왜적 123명을 죽였다. 이어서 1598년 6월에 조경남은 박언량 등 70명과 함께 전라병사 이광악 부대 소속이 되었다.
한편 71세의 죽천 박광전(1526-1597)도 난리를 피하여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으로 피신하였다. 제자 안방준도 함께였다. 10월에 부인 문씨가 화순 모후산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비통하였다. 병세 또한 날로 깊어 갔다.
그때 생원 박사길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박광전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박광전은 “난리는 급박해지고 나의 병세도 날로 위중하니 나는 곧 죽을 것이요. 그러나 한 줄기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맹세코 이 왜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는 없소” 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박광전은 전 판관 송홍렬을 부장으로 삼고, 둘째 아들 박근제를 종사관으로, 박사길·박훈 등을 선봉으로 삼았다.
박광전 의병은 동복현(화순군 동복면)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는 고흥 출신 송홍렬이었다. 보성사람 박훈도 왜적 10여명을 참수하였고, 능주 출신 박사길 또한 공을 세웠다. 왜적들은 박광전 의병의 기세에 눌려 일시 순천 쪽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 이탈 죄도 큰 데 다시 돌아와서 박광전의 공로를 시기하여 전라감사 황신에게 모함하였다. 황신은 박광전을 전주감영으로 불러 조사하였다. 박광전은 참담하였다.
전주에서 조사를 받은 박광전은 화순으로 내려오는 길에 조상의 묘소가 있는 진원현(장성군 진원면)에 들렀다. 비참한 심정을 조상님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마지막 길을 예감하여서였을까.
11월18일에 박광전은 세상을 떴다.
임진왜란 7년간의 박광전의 일생은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였다.
1592년 7월에 전라좌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이 깊어서 참전을 하지 못하다가, 1593년 말에는 제자인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장이 되었지만 모함을 받고 한 많은 세상과 이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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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1월 28일에 전라감사 황신은 순천에 사는 훈련원 첨정 박이량의 전과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박이량은 처자가 왜적에게 피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군인을 모아 순천의 많은 적과 접전하여 공을 세웠다.
12월10일에 전라감사 황신은 전라도의 적정 敵情과 영남으로의 군사 이동의 부당성을 조정에 진언하였다.
“도내의 연해안이 온통 적의 소굴이 되어 있는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토벌하지는 않고 본도의 장수들마저 영남으로 옮겨간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의 허실을 엿보아 뒤를 추적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황신의 이 보고는 고니시의 왜군이 장흥과 보성, 순천과 흥양, 낙안에서 날마다 곡식을 수확하여 순천왜성에서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조정은 울산성 공격을 위하여 전라도 병력도 영남으로 출전 명령한 것에 대한 우려였다.
12월17일에는 의병장 소희익이 순천의 왜적 둔거지에서 남녀 286명을 구출하였고, 낙안에서도 남녀 127명을 구출하였다. 도원수 권율의 별장 김운성은 낙안 왜영을 쳐들어가 남녀 154명을 구출하였고, 전주 출신 김익웅은 순천 왜영에서 남녀 95명을 구출하였다.
9월7일 직산전투 이후 명군이 승기를 잡자 관군의 활약도 상당하였다. 9월말에 부임한 전라병사 이광악은 광양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적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었는데 12월18일에 광양성을 공격하였다. 이광악은 진주대첩을 이끈 장수였다. 그런데 광양성은 견고하였다. 조선군은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윽고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가 보낸 왜군이 도착하여 조선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조선군은 도리어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양군의 전투는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며칠 후 왜군은 광양성을 포기하고 왜교성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왜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에 성을 쌓고 장기 주둔태세에 들어갔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가토 기요사마의 울산성이 그것이다.
11월에 조명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왜군을 몰아내는 작전에 돌입하였다. 그 첫 대상이 가토 기요사마가 지키고 있던 울산성이었다. 12월22일부터 5만명의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포위하고 총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왜군의 완강한 저항과 명군 내부의 불협화음 때문에 울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1598년 1월4일에 철수하고 말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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