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제41회 전라도 백성의 수난사 - 강항과 정희득 일가, 김세곤 글 무등일보

김세곤 2014. 4. 1. 06:36
제41회 전라도 백성들의 수난사 (2) - 포로가 된 강항과 정희득 일가들
입력시간 : 2014. 04.01. 00:00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항 영정.

 

죽고 죽이고 끌려간 백성들 노예로 팔려가기도



도요토미가 명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

그나라 사람들을 다 죽여

빈땅을 만든 후에

서도(西道)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다

10년을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며

닥치는 대로 죽이도록 하였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목표는 명나라 정벌이 아니라 조선 점령이었다. 도요토미는 왜장들에게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다.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조선 백성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이런 도요토미의 지시에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이 전라도와 경상도였다.

또한 왜군들은 코를 베었다. 도요토미의 지시였다. 왜장들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통으로 보냈다.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도요토미에게 보냈는데 접수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어느 일본 문헌에 의하면 9월에 영광과 진원에서 1만40개의 코가 도요토미에게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뿐이 아니었다. 왜군들은 조선인을 남녀노소 막론하고 일본으로 끌고 갔다. 포로 중에는 인욕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선비도 있었다.

강항과 정희득이 그들이다. 강항은 '간양록'을, 정희득은 '월봉해상록'을 남겼다.

먼저 강항(1567-1618)을 살펴보자. 1597년 9월23일에 강항 일가는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일본수군에게 잡혔다. 형조좌랑 강항은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5월에 그는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에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함락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항은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다 흩어지고 말았다.

영광 논잠포에 있는 강항 유적



9월14일에 강항은 일가족과 함께 배를 탔다. 왜적은 이미 영광군을 불태우고 산을 수색하고 바다를 훑어 사람을 죽였다. 9월15일에 강항 일가를 태운 배 두 척이 괴머리(猫頭)에 머물렀는데 피난 배가 백여 척이었다. 일행은 16일에 괴머리에서 쉬었고, 17일에는 비로초에서 지냈다. 18일에 종형 협(浹)이 통제사 이순신의 선전관으로 있다가 우수영을 떠나 강항 일가에게 달려왔다.

이 날 이순신은 “영광 칠산도 바다를 건너 저녁에 영광 법성포에 이르렀더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과 창고를 불 질렀다”고 ‘난중일기’에 적고 있다.

20일에는 “왜선 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에 당도하였다. 통제사는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집안 어른들이 의논을 하였다. 다시 육지로 올라가자고 하고, 혹은 흑산도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강항은 종형 홍(洪)·협(浹)과 함께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장정을 모두 합치면 40여 명에 달하니 통제사에게 가서 싸우자”고 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런데 뱃사공이 그 말을 듣고서 21일 밤중에 자기 자녀들이 있는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22일에 부친이 탄 배가 영광군 염소(鹽所)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염소로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을 찾아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바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뱃사공이 왜선이 온다고 외쳤다. 강항 일가는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바닷물이 너무 얕아서 왜군의 갈고리에 구출되었다. 왜군은 강항 일행을 일제히 포박하여 뱃전에 세워 놓았다.

이 때 왜군들은 강항의 두 아이를 바다에 내던졌다. '간양록'을 읽어보자.

어린 놈 용(龍)이와 첩의 딸 애생(愛生)의 죽음이 너무나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하고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나이 30세에 비로소 얻은 아이다. 이 아이를 가졌을 때다. 어린 용이 물 위에 뜬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름을 용이라 지었는데, 이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강항 이야기는 1980년에 신봉승에 의해 드라마 '간양록'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조용필이 부른 노래 ‘간양록’은 지금도 애잔하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 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 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어허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어허 어야 어 허허허

다음은 '월봉해상록'을 쓴 함평 출신 정희득(1573-1640) 이야기이다.

강항을 모신 서원인 영광 내산서원



8월12일에 정경득·정희득 일가는 왜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평 집을 떠났다. 이들은 8월19일에 영광 둔전포에서 거룻배 하나를 구하여 수리하고 서해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9월15일에 정희득 일가는 구수포에서 배에 올랐다. 16일에는 육지의 왜군이 법성창에서 이리저리 분탕질을 하다가 배를 보고 총을 쏘았지만 총알이 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때 족형(族兄) 정절 등 여러 친척들이 합류하였다. 17일 새벽에 배를 띄워 서쪽으로 갔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법성포 앞바다에 돌려댔다. 18일에는 재원도로 옮겼으나 큰 바람이 불어 며칠간 움직이지 못하였다.

9월27일에 배가 영광 칠산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왜선을 만났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정희득의 어머니 이씨는 형수와 아내, 누이동생에게 “추잡한 왜적이 이렇게 닥쳤으니 장차 어떤 변을 당할 것인가. 슬프다, 우리 네 부녀의 처지는 죽음 밖에 없구나”하니, 정희득의 아내가 말하기를 “난을 당했을 때부터 함께 죽기를 약속했지요. 저의 결심은 이미 정해 있습니다”하고 늙은 어버이께 하직을 고했다. 또 정희득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몸을 아껴 형제분과 함께 아버님을 모시고 꼭 생환토록 하시오”하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어머니·형수·누이동생도 앞다퉈 바다로 뛰어 들었다.

정희득 형제는 왜군이 배 안에 묶어 두어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망극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또한 정절의 부인과 며느리 등도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1592년에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한 바 있는 정절은 왜적을 꾸짖으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짐승만도 못한 놈들 앞에 무릎을 꿇으랴” 하니 왜적이 칼을 뽑아 왼편 팔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천만번 살을 찢는다 해도 굴복할 수 없다”하였다. 왜적은 다시 오른편 팔을 치고 정절을 죽였다.

나중에 정희득·정절의 여인들은 열부 烈婦로 정려되었다. 함평군 월야면에는 팔열부 八烈婦 정각이 세워졌다.

임진왜란은 그야말로 노예전쟁이었다.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끌고 가 노예처럼 부리고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먹기도 하였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포로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1599년 7월에 조선으로 돌아온 정희득은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남자가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이라고 상소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조선으로 돌아온 포로는 소수이다. 일본에 강화사 講和使로 간 사명대사 유정은 1605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3천명의 포로 송환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 돌아온 자는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1607년에야 회답겸쇄환사 여우길은 포로 1천240명을 데리고 왔고, 1643년까지 돌아온 포로는 6천 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이 연재는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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