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후손들

[스크랩]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과 淸道地域 儒敎文化

김세곤 2014. 3. 24. 08:48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과 淸道地域 儒敎文化

 

1. 문과과정 제3강(답사)학습계획

- 일자 : 2013년 11월 16일(토)

- 강좌명 : 탁영 김일손과 청도지역 유교문화

2. 답사일정

 07 : 30 1차 집결지인 - 법원(1호차),성서 홈플러스(2호차)출발하여 경대 집결

 08 : 00 출발점검 및 반별 탑승(대학원동 서편 네거리)

 09 : 00 - 09 : 30 남강서원(박수춘 /박유흠 011-9511-7111/관리소 373-8211) 

09 : 30 - 10 : 30 자계서원(김일손 /김창진 선생, 김상만 감사)

(이후 김성태 문화해설사와 동행)

 10 : 30 - 11 : 20 용강서원(박익과 임난 14의사 /박광상 011-9565-4511)

 11 : 20 - 12 : 00 탁영종택(김일손 /김창진 선생, 김상만 감사)

 12 : 00 - 13 : 00 점심(청도한우마을 /박철규 372-9291)

 13 : 00 - 14 : 00 훈령서원(박희범 016-542-4970) 및 군자정

 14 : 00 - 15 : 00 삼족대(김대유)

 15 : 90 - 15 : 30 선암서원(김대유, 박하담 /박향숙 010-5345-8455)

 15 : 30 - 16 : 30 도일고택, 명중고택, 운강고택, 운암고택, 만화정

(박하담과 그의 후손들의 고택)

 16 : 30 - 17 : 00 임당리 김씨고택(궁중내시 김일준)

 17 : 00 - 18 : 30 저녁식사(경산 버섯애장수가/ 010-6320-5767. 811-6911)

 19 : 30 법원 하차

 20 : 00 경북대 하차

 20 : 30 성서 홈플러스 하차

3. 참배 및 알묘

- 알묘 : 자계서원

- 참배 : 남강서원, 용강서원, 훈령서원

- 강독(자계서원) : 지명 회원

4. 참고자료

- 청도군청 문화관광과 이성민 010-9963-1104

- 문화재담당 노미경 370-6063

- 문화해설사 김성태 010-5520-8893

 

 

1. 淸道地域 儒敎文化 槪況

국토지리에 관한 지식을 기르고 애향. 애국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사 경상도칠십일주가(慶尙道七十一州歌 - 작자와 시대는 미상이며 달성군 현풍면 못골에서 수집한 필사본)는 경상남북도 71개 고을에 대하여 지명을 들어가면서, 그 지역의 형승과 풍속 인심 등을 찬미하고 있다.

일부를 소개하면삼강오륜 소연하니 처처에 의흥이요. 사단칠정 수출하니 인인이 인동이라. 산무도적 선산이요 도불습유 청도로다. 금행태수 김해되고 옥출곤강 경산이라”하였다. 예로부터 하늘 맑고, 물 맑고, 인심<도불습유(道不拾遺) -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말로, 법이 잘 지켜져 태평하다는 뜻>이 좋아 3청의 고장인 청도지역 유교문화재로는 화양읍 청도향교(유형문화재), 이서면 서원리의 자계서원(紫溪書院, 유형문화재) 금천면 신지리의 선암서원(仙巖書院, 유형문화재), 금전리의 황강서원(皇岡書院)이 있다.

또한 학산리의 용강서당(龍岡書堂), 금촌리의 금호서원(琴湖書院), 각북면 남산리의 남강서원(南岡書院), 각남면 신당리의 화산서당(華山書堂), 풍각면 봉기리의 봉양서원(鳳陽書院), 차산리의 차산서원(車山書院)· 우졸재박한주여표비 및 비각(迂拙齋朴漢柱閭表碑·碑閣, 기념물) 등이 있다.

 

누정(樓亭)으로는 운문면 순지리에 원모재(문화재자료)· 운곡정사(민속자료 ), 청도읍 사촌리에 선월정(先月亭), 화양읍 유등리에 군자정(君子亭), 범곡리에 화산정(華山亭), 금전리에 학산정(鶴山亭) 등이 있다.

고건축물로는 금천면 신지리의 운강고택 및 만화정(淸道雲岡故宅·萬和亭, 중요민속자료)· 섬암고택(剡巖故宅, 문화재자료)이 있다.

또한 명중고택(明重故宅, 문화재자료)· 운남고택(雲南故宅, 문화재자료)· 도일고택(道一故宅, 문화재자료), 임당리의 김씨고택(1988년 9월 23일 민속자료 지정, 2005년 1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화양읍 서상리의 도주관(道州館, 유형문화재), 화양읍 동상리의 청도 동헌(淸道 東軒, 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이 밖에 금천면 신지리에 배자예부운략판본(排字禮部韻略板本, 보물)· 해동속소학판본(海東續小學板本, 유형문화재)· 14의사목판본(문화재자료), 이서면 금촌리에 식성군이운룡선무공신교서외 관계문서(보물)와 청도읍 원정리에 거영일기 및 계본등록(유형문화재)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청도읍 원정리에 이운룡장군 영정(유형문화재), 각남면 일곡리에 최치원의 고운영정(孤雲影幀, 유형문화재)이 있다. 그리고 화양읍 서상리의 척화비(문화재자료)를 비롯하여 매전면 금곡리에 삼족대(문화재자료)가 있다.

 

 

2. 文愍公 濯纓馹孫 先生

생애와 학문사상(1) 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사헌부집의 맹(孟)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의 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교리 및 사간원 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 부패 및‘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중종 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失勢)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등 26편이《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생애와 학문사상(2)

1498년(연산군 4)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史官)으로 있었던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사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 훈구파의 정치 공작으로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 마저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직필(直筆) 정신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도 그를 널리 기억하게 하였다.

 

영남사림파의 기수, 중앙으로 진출하다

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사는 기성의 정치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하는 사림파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성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기존에 정치적ㆍ사회적 특권을 향유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특히 이들은 언관이나 사관과 같이 비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의 비리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사림파의 맹장 중에 바로 김일손이 있었다.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며 소장 영남 사림파의 리더로 활약했던 김일손은 언관과 사관으로 있으면서 기성의 잘못된 정치 형태를 고발하려 했다. 이것은 그가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싣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록의 편집이 끝나면 세초(洗草-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사초를 없애는 일)를 하여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인 그의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정치적 참극이 일어났다.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의 서막을 연 사건이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이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김맹(金孟) 역시 가학을 계승하고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김일손 가문은 정통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셈이 된다.

어린 시절 김일손은 부친을 따라 용인에서 살았으며, 이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학]은 사림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영남사림파의 대표학자 김굉필(金宏弼)은‘소학동자’로 까지 지칭되었다.

 

15세에는 단양 우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이해 고향 청도를 거쳐 선산에 사는 정중호(鄭仲虎), 이맹전(李孟專)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예조의 복시(覆試)에는 실패했다.

17세 때 고향에 돌아온 김일손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있는 밀양으로 가서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부친 김맹의 [효문명(孝文銘)]에서 청도에서 올라온 김극일의 두 아들 김기손(金驥孫)과 김일손을 가르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은 지리산을 다녀온 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김일손 역시 1489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지리산을 사랑하고 기행문을 남긴 것 또한 스승과 제자가 하나였던 셈이다. 밀양에 살던 김종직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인연은 김종직의 사후 때까지 끈끈하게 이어진다.

김일손은 23세가 되던 1486년 청도군학(淸道郡學)으로 있으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다. 생원시는 장원, 진사시는 차석이었다.

이해 가을의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던 최부, 신종호, 표연수도 함께 급제하였다.

 

1487년 김일손은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진주목사와 진양수계(晉陽修稧)를 조직하였으며,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이후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490년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교정하고 증보(增補- 모자란 내용을 보탬)했다. 소릉(昭陵-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조처로서, 나아가서는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일손에 대해서는 무오사화의 대표적인 희생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관으로서의 그의 강직한 면모만이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망하고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개혁책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실록이나 그의 문집인 [탁영집(濯纓集)], 그의 조카인 김대유의 [삼족당집(三足堂集)]등의 기록에는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김대유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쓰면서 김일손의 호매하고 강직한 성품과 함께 경제지책(經濟之策)을 품고 있었음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실록에서 그가 제시한 여러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인사정책에 대해서는 효행과 염치가 뛰어난 자와 재질이 훌륭한 종실(宗室- 왕족)의 등용, 천거제의 충실한 활용 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조광조 일파가 주장한 천거제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또한 언관의 활동 보장과 지방관의 사관 발탁 등을 건의하여 언론권의 강화를 주장하였고, 법전을 지방 관아에서 충분히 활용할 것, 사원전과 서원 노비의 혁파 등을 건의하였다.

국방대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문관을 뽑아 변방의 장수에 제수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방비할 것을 제시하고 당시 충주나 웅천에서 있었던 왜인들의 소란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에도 왜구들의 소요가 계속 일어났고 1592년 임진왜란까지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선견지명을 보인 셈이다.

 

위험한 사초(史草),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사림파의 기수로 우뚝 선 김일손은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시무책을 제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의 선두에 섰다.

그가 제기한 소릉 복위 문제는 정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릉은 문종비 권씨의 위호로서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곧 죽었는데 세조 집권 후 추폐(追廢)되어 종묘에는 문종의 신위만이 배향되어 있었다.

 

김일손은 소릉과 묘주(廟主)를 복위하여 문종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세조의 그늘이 여전했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매우 개혁적인 주장이었다. 언관으로서 그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그에 대한 훈구파의 기피는 훨씬 커지게 되었다.

훈구파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한 기질과 직선적 성향은 훈구파 대신들에게 김일손을 정치적 공적(公敵)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무오사화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사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림파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정쟁이다. 또한 이후 4번에 걸친 사화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발단에 섰던 인물이 바로 김일손이었다. 무오사화의 시작은 성종 사망 후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전형적인 훈구파였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의 위험한(?) 사초를 입수한 이극돈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일손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이극돈은 검증된 정치 공작의 귀재 유자광(柳子光)을 찾았다. 유자광은 궁중에 자신과 연계하고 있던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김일손 등이 사초에 궁금비사(宮禁秘史)를 써서 조정을 비난했다는 내용을 올려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마침내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독재군주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學祖)가 술법으로 궁액(宮掖)을 움직이고, 세조의 총신이자 훈구파인 권람(權擥)이 노산군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노비와 전답을 취한 일 등 세조대의 불교 중흥책과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한 글과,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사절(死節-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림)로 기록하고 이개, 박팽년 등 절의파의 행적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세조의 왕의 찬탈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글이었다. 당시 김일손은 모친상으로 청도에 내려가 있었지만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김종직 마저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고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이것이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서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사림파 성장의 자양분이 되다

무오사화의 칼끝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김일손의 생을 마감하게 했다.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를 모신 사당도 자계사(紫溪祠)이다.

자계사는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구현된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1년(현종 2)‘자계’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김일손의 추숭작업에 가장 힘을 기울였던 인물은 조카 김대유(金大有, 1479~1551)이다. 김대유는 40세 때 청도의 사림들과 함께 자계사를 건립하였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거듭 사직하고 숙부의 뜻을 받들며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갔다.

김대유는 41세 때 김일손의 유고(遺稿)를 모아 자계사에서 판각(板刻)을 했으며, 70세 되던 해에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편집하였다.

그만큼 숙부를 존경하고 그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김대유는 경상우도 사림의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우두머리)이 되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로서,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지면서 영남사림파의 학맥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

 

조식은 김일손에 대해‘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서 훈구파의 전횡에 맞섰던 김일손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반영하였다.

훈구파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선봉에 서서 김일손은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였고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 맞섰다. 김일손처럼 행동하는 사림파의 모습은 훗날 조광조에게도 이어졌고, 결국에는 네 번의 사화라는 대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가 궁극적으로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사림파의 도도한 성장에 훌륭한 자양분을 마려해 주었고 붉은 시냇물처럼 타올랐던 김일손의 붉은 마음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 경북 청도군 서원길 62-2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을 배향 하기 위해 중종13년(1518년)창건하고 운계서원(雲溪書院)이라 하였고 선조11년 중건하여 현종2년(1661년) 자계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고종8년(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동.서재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참봉 김용희(金容禧)가 중건하였다.건물 배치 중심에 있는 보인당(輔仁堂)은 정면5칸, 측면2칸의 고상형(高床形)이다. 영귀루(1699년重建)는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자연석의 초석상에 원주를 세워 루주(樓柱)로 삼고 마루를 놓아 다시 루를 가구 하였다. 보인당(輔仁堂) 주축 선에는 영귀루(詠歸樓) 와 유직문(惟直門)이라는 三門이 있고 보인당 동쪽에는 존덕사(尊德祠)와 전사청, 신도문이 따로나있다.영귀루 옆에는 탁영 김일손 선생께서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동쪽으로 탁영선생의 신도비와 절효(節孝) 김선생 정려비(旌閭碑)라 쓴 조부의 비가 있으며, 서쪽에 서원정비(書院庭碑)등이 있다.

 

탁영종택(濯纓宗宅) 경북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145-1

선조11년(1578) 紫溪祠를 紫溪書院으로 중건하고 紫溪書院에 탁영선생을 奉安하면서 宗宅이 있는 백곡에도 탁영선생 不祧廟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바 있고 현종2년(1661) 자계원이 賜額되면서 士林 공의에 의한 不遷位로 모셔졌다. 이후 헌종10년(1844) 昌潤이 노후된 부조묘를 재건하였으며 다시 1940년에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택에는 탁영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永慕閣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다.

 

탁영문집(濯纓文集)

목판본으로 원집 8권, 속집 2권 합 4책이며 여러 차례에 걸쳐 증보 ·간행하여 판본이 다양한데, 탁영선생의 조카 대유(大有)가 수집. 편차하여 1512년(중종 7) 간행한 것이 초간본이다.

이 초간본을 사림에서 1668년(현종 9) 증보. 중간한 후, 후손 재옥(再玉)이 유문(遺文)부록을 증보하여 1827년(순조 27) 자계서원(紫溪書院)에서 삼간(三刊), 1838년 연시기록(延諡記錄)을 추가하여 사간(四刊)하고, 1903년 후손 현감 영호(榮灝)가 연보(김대유 편)와 가장초본(家藏草本)으로 속집을 편찬하여 오간(五刊)한 것을 1925년 연보를 제외하고 재편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이 있다. 6편의 부에는 저자의 뛰어난 문장력이 아낌없이 드러나 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그가 타던 거문고가 현재 전해지고 있고 거문고에 관한 글이 잡저에 들어 있다.

<중흥대책(中興對策)>에는 사림 출신으로서 도학을 강조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편린을 볼 수 있다. 그는 세(勢). 수(數). 도(道) 중에서 세 수는 논할 만한 것이 못되며 오직 도를 밝게 하여 군신이 노력하면 국가의 중흥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속집에 정여창(鄭汝昌)을 천거하는 <사검열천정여창소(辭檢閱薦鄭汝昌疏)>가 있다.

 

3. 淸道地域 先賢과 遺蹟 - 踏査 中心

남간서원(南岡書院)과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선생 1572(선조 5)∼1652(효종 3)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조선 중기의 학자인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선생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또는 숭정처사(崇禎處士). 동몽교관(童蒙敎官) 신(愼)의 아들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소학』을 항상 애독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싸웠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문제에 대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지어 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和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 숭정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과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는 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694년(숙종 20) 대구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국담박선생문집』·『독서지남(讀書指南)』·『학문유해(學問類解)』·『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의례견문해(疑禮見問解)』 등이 있다.

국담선생 문집은 4권 2책으로 후손 이주(履周)에 의해 편집, 간행된 것으로, 간행연도는 본집 서문의 글로 미루어 1725년(영조 1)경으로 추정되며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광정(李光庭)의 발문이 있다.

별집은 추선록(追先錄)으로서 윤순지(尹順之)의 서(序), 추선록세계도, 세계사실, 서문, 행산선조일고(杏山先祖逸稿), 제현유십(諸賢遺什) 15편, 제현유묵(諸賢遺墨) 및 부록으로 묘비명과 사적이 실려 있다.

「무오소(戊午疏)」는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여 올린 것이고,「창의격(倡義檄)」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에 의병을 모집할 때의 격문이다. 별집의 제현유묵에는 김종직(金宗直)·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 등 9인의 글이 실려 있다.

 

용강서원(龍岡書院) 경북 청도군 이서면 모산길 45-4청도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현조(玄祖)인 충숙공 박익(忠肅公 朴翊)과 임란14의사(壬亂14義士)를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하였다.서원 내에 있는 충열사(忠烈祠)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때 의병을 일으켜 청도·밀양·경산 등지에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준 박경신(朴慶新), 경인(慶因), 경전(慶傳), 경윤(慶胤), 경선(慶宣), 선(瑄), 찬(璨), 지남(智男), 철남(哲南), 린(璘), 우(瑀), 구(球), 숙(琡), 근(瑾) 14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14의사는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 사이로 이 가운데 12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2·3 등에 각각 책봉되었고, 한 분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1등에 녹훈 되었다.

이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개 사족(士族)가문의 부자, 형제, 숙질, 종반사이의 14명이 함께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궐기하였다는 점은 역사상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할수 있다.

이들을 제향하는 용강재(龍岡齋)는 1794년(정조18)이래 후손들을 위시한 지역 사림들이 사우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관철되지 못하다가 1816년(순조16)충열사(忠烈祠)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5) 훼철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용강서당(龍岡書堂)이 건립되었고 1935년 요사, 관리사, 창고, 14의사를 봉안한 숭의사(崇義祠)가 충열사(忠烈祠)로 용강서당(龍岡書堂)이 용강서원(龍岡書院)으로 승호되었다. 1960년 강당(講堂)이 건립되었다.14의사 묘정비(廟庭碑)는 1876년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김시질(金是瓆)이 찬하고 서자(書者)는 천주교도(天主敎徒)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다. 임란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비각의 구조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난 밀양박씨 일족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그 전통을 400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후손들의 의지는 후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서원내의 충열사 및 십사의사 묘정비(忠烈祠 및 十四義士 廟庭碑)가 있다

 

박 익(朴翊) 1332(충숙왕복위 1)∼1398(태조 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영균(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 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위(褘)의 딸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4) 공조.형조.예조.이조판서(吏曹判書)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松隱),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松京)의‘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훈령서원(薰嶺書院) 청도군 이서면 신촌동

1699년(숙종 2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양무(朴楊茂)의 절의와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계은(朴繼恩)·박맹문(朴孟文)·박란(朴鸞)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복원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7칸의 정당(正堂), 3칸의 퇴랑(退廊), 그 밖에 고사(庫舍) 등이 있다.

 

박양무(朴楊茂)

박양무(朴楊茂)의 자는 약생(若生)이며 호는 두촌이다. 고려 공민왕때 선무랑을 거쳐 김천 도독우(都督郵)를 지냈다. 포은 정몽주를 종유하고 고려의 운명이 다하자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에 퇴거하였다. 뜻을 함께한 선현들과 낙향하여 화양 대성산에 은거하여 성학을 강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봉안문에 의하여 의열(義烈)은 길재와 짝을 이룬다고 하였다.

 

삼족대(三足臺)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

삼족대는 조선 중종14년(1519년)에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년)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그의 호를 따서 삼족대(三足臺)라 하였다.삼족대(三足臺)는 학일산(鶴日山)의 지맥이 동창천(東倉川)으로 숙으려드는 기슭 절벽위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북쪽평지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방형일곽의 토석담장은 동쪽으로 싸고돌며 북동쪽으로 사주문이 나있다.

건물은 정면3칸 중 좌측 협칸은 전면이 개방된 2간통(間通) 마루이고 우측 2칸은 전면에 반칸 퇴를 물려 마루를 깔고 그 뒤쪽에 온돌방을 들였다.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는 동안 형상이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변모했지만 동창천 암벽 위 숲 속에 둘러 쌓인 삼족대는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자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삼족대 밑에는 1973년 세운 김대유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김대유(金大有) 1479(성종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극일(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준손(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서원(仙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가 있다.

 

선암서원(仙巖書院) 경북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55-27선암서원은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仙巖))에 자리잡고 있다.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506∼1543)선생 두 분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선조1년(1568년) 매전면 운수정(雲樹亭)에 두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여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가 1577년(선조10) 군수 황응규(黃應奎)의 주선으로 사우(祠宇)와 위패(位牌)를 옮겨 선암서원이라 개칭하였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고종15년(1878) 소요당(逍遙堂)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서원)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은 정면4칸, 측면1칸의 소규모 건물로 정침과는 토담으로 내.외 되어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으로 처마는 선자(扇字)가 걸린 귀보다 중앙부분이 튀어나오도록 긴 서가래를 걸었고 대청에 보는 3량 가로 걸작이다. 평면구성은 안채, 득월정(得月亭), 행량채, 대문채가 자를 이루고 그 뒤편으로 북향한 선암서당(仙巖書堂)이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과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海東續小學板木).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박하담(朴河淡) 1479(성종 10)∼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응천(應千), 호는 소요당(逍遙堂). 아버지는 승원(承元)이며, 어머니는 하숙보(河叔溥)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大科)에 실패하자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아래의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풍류로써 여생을 보냈다.

조정에서 그의 학행을 듣고 감역(監役)·봉사(奉事)·사평(司評)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김대유(金大有)와 교분이 두터워 그와 함께 지방에 사창(社倉: 환곡을 저장하던 창고)을 설치하고 이를 이용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처형되자 그의 문집을 불태워버렸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의 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5권이 있다.

 

명중고택(明重故宅)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80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의 손자인 박래현(朴來鉉:1861-1896)이 고종18년(1881년)에 별서로 건립한 것이다. 그 후 차자 박순희(朴淳熺)가 입주하여 명중고택(明重故宅) 이라 하였다.19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으로 배치형태는 튼 已 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정침은 서북향으로 정면5칸, 측면1칸의 골기와 집이다. 6.25때 대문채가 소실되었고 1990년 도로확장공사로 사랑채가 철거되었다.

 

운남고택(雲南故宅)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76

운암고택은 조선말기에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의 셋째 아들인 박재충(朴在忠:1850∼1869)이 분가를 하면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고택(雲岡故宅) 서편에 인접해있다. 사랑채 대청의 보(량)와 보고임이 특이하고 대청 끝의 보고임에는 태극문양을 그려 넣어 멋을 더하였다. 큰집(雲岡故宅)과의 격을 낮추기 위해 모든 지붕에 망와(望瓦)가 없도록 하였고 앞마당 동쪽에 위치한 중 사랑채는 193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도일고택(道一故宅)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65

운강(雲岡) 박시묵의 동생인 박기묵(朴起默1830-1911)이 고종14년(1877) 광무(光武)3년 합천군수로 재직시 신축하여 합천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11년 이후 박시묵의 손자 채현의 소유되었다가 다시 시묵공의 삼종질인 재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그의 □자를 따라 도일고택(道一故宅) 이라 하였다. 전체적으로 자형으로 영남평지 지역의 흔한 구조로 영남평지 가옥의 대표적인 구조이다.

 

섬암고택(剡巖故宅)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73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朴在韶:1840-1873)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雲岡故宅)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격을 높이기 위해 기둥상부의 보아지와 대공에는 화려한 조각을 하였고 안채에 비하여 기단과 지붕을 높게 하여 집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운강고택(雲岡故宅) 및 만화정(萬和亭)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 474. 명포 7-12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479∼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純祖9)에 박정주(朴廷周:1789∼1850)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朴淳炳)이 다시 중수하였다.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은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하였고 고종9년(1872년) 강학소절목(講學小節目)을 마련하여 교육기관으로서 큰 성과를 올렸으며 통정대부 좌승지에 증직 되었다. 만화정(萬和亭)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朴時默)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임당리 김씨고택(林塘里 金氏故宅)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631

임당리(林塘里)에는 조선시대 궁중내시(宮中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金馹俊: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職牒)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현재의 임당리김씨고택은 강희25년(康熙) 병인(丙寅)윤사월(1686년)이란 연기가 있는 암막새기와가 망와(望瓦)로 사용되고 있으나 건물 전체의 구조 양식으로 보아서는 19세기 건축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4. 淸道地域 先賢 - 參考 資料

김지대(金之岱) 1190(명종 20)∼1266(원종 7)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로 초명은 중룡(仲龍)이다.

1217년(고종 4) 3만명의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나라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해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이를 보고 중요한 자리를 주었다. 1218년 조충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구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해, 이민(吏民)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다.

1240년(고종 27) 전라도안찰사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를 보내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직접 만전을 만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자, 통지를 묶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원망하였으나 그가 청렴하고 근엄해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1255년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다.

1258년 몽고병이 침입하자,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를 대신해 그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였다.1260년(원종1)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鰲山은 지금의 청도)에 봉해졌다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이원(李原)1368 ~ 1429

본관은 고성(固城). 자 차산(次山). 호 용헌(容軒). 시호 양헌(襄憲). 고려말 서법의 일가를 이룬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이강(李岡)의 아들이다. 자형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에게서 글을 배웠고 1382년(우왕 8)에 15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385년(우왕 11)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복시승(司僕寺丞)에 등용되고 공조·예조의 좌랑,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 후 지평이 되었고 정종 때 좌승지에 올랐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太宗)을 도운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대사헌·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1403년(태종 3)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후 평양부윤(平壤府尹)·중군총제(中軍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대사헌(大司憲)·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역임하였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에 이어대사헌·병조판서·의정부참찬(參贊)·찬성사를 거쳐 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1422년(세종 4) 좌의정에 올랐으나 1426년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여산(礪山)에 귀양가 병사하였다. 문집에 《용헌집(容軒集)》《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등이 있다. 1790년(정조 14)에 청도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배향되었다가 1836년(헌종 3)에 안동의 명호서원(明湖書院)으로 옮겨졌다.

 

김맹(金孟) 1410(태종 10)∼1483(성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진(子進). 항(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이고, 아버지는 극일(克一)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윤 이간(李?)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김천도찰방·예조좌랑이 되었다. 1451년(문종 1) 평안도도사를 거쳐 고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좌랑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곧 의금부진무를 거쳐 오위도총부경력을 역임하였다. 성종 초에 집의에 올랐다가 퇴직하였다. 성품이 단아, 청렴하고 명예와 이익에 초연하였으며, 부자가 모두 문명을 떨쳤다.

 

박한주(朴漢柱) 1459년(세조 5) ~ 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돈인(敦仁)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현감으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을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諫)하였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평해군수·예천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 평안도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1506년(중종 1)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되었다.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

 

박하징(朴河澄) 1484년(성종 15)∼1566(명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천(聖千), 호는 병재(甁齋). 또는 서암(西巖). 청도 지내리(淸道池內里)에서 출생.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승원(承元), 어머니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숙부(叔溥)의 딸이다. 성수침(成守琛)을 사사했다.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하고 공경(恭敬)과 근신(謹愼)으로 수신하는 요점으로 삼고 평생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연구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도천(道薦)으로 교관(敎官)이 되었고, 1515년(중종 10)에 어사(御史) 이시백(李時白)의 추천으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중종(中宗)을 뵙고 옛 제왕(帝王)의 도를 힘써야한다고 하였다.

1519년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각지를 유람하며 송경(松京)에서 두문동구적(杜門洞舊蹟)을 찾고 돌아와서 병재를 짓고 후진을 가르치며 가례(家禮)를 고정(考訂)하여 솔선 시행했다.

이황(李滉)·조식(曺植)·성혼(成渾) 등과 교유하며 도학을 강론하고 조식과 인물성(人物性)의 동이(同異)를 논하여 조식의 인정을 받았다 뒤에 호조판서(戶曺判書)에 추증되었고, 명동사우(明洞祠宇)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병재문집』 4권이 있다.

 

이기옥(李璣玉)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의보(儀甫), 호는 두암(竇巖). 청도 출신. 아버지는 득록(得祿)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희려(希呂)의 딸이다.

처음 박광형(朴光亨)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를 사사하였다. 5세에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는데, 자질이 총명하여 1584년(선조 17)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1589년 변사(邊涘)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듬해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도중 관북의 시속·풍물·행사·신앙 등을 조사하여 『관북록(關北錄)』을 저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되었고, 1596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에는 「친정소(親征疏)」를 올려 왕이 직접 전지에 나가 왜적의 불의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고, 화의가 진행될 때에는 중국 정강(靖康)의 고사를 들어 강화를 반대하였다. 1599년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뒤에 다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당시 영남지방의 대학자인 장현광(張顯光)·김부륜(金富倫)·박성(朴醒) 등과 도의의 교유를 맺고 학문을 강마하였다. 뒤에 유림의 천거로 도림사(道林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두암문집』 4권이 있다.

 

김난상(金鸞祥) 1507(중종 2)∼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缾山). 좌참찬 점(漸)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우(靈雨)이고, 아버지는 현(俔)이며, 어머니는 전윤서(全允序)의 딸이다.

1528년 이황(李滉)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8월에 윤원형(尹元衡)이 왕의 명이라 하여 양사(兩司)를 협박,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김광준(金光準)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윤임 등을 대역으로 논하려 하여 집의 송희규(宋希奎), 지평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우(朴光佑)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모두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이기(李芑)·윤원형 등의 청에 의하여 남해로 유배되었고, 1565년에 감형되어 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선조초에 이준경(李浚慶)의 청으로 풀려나와 기대승(奇大升)의 주장으로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추천되어 집의·응교·직제학 등을 지내고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1569년 사류망담(士類妄談)의 잘못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주 오산사(梧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산유집』이 있다.

 

박경신(朴慶新)

조선중기 무신으로 중종 34년(1539년) 태어났으며, 호는 삼우정(三友亭)이고 본관은 밀성이다. 32세에 무과초시(武科初試), 다음해 복시에 급제하고 35세에(선조6년, 1573년) 전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임란 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하고, 청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치고 청도를 수비햐였다.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 1등, 호성원종공신 2등에 책훈(策勳)되었다.

 

박경전(朴慶傳)1553(명종 8)∼1623(인조 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 의병장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백(孝伯), 호는 제우당(悌友堂)·이모당(二慕堂).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 이(頤)이며, 어머니는 의흥예씨(義興芮氏)로 만호 신충(信忠)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운문산에 피난시킨 뒤 의병을 모집,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사들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적과 싸웠다. 청도를 비롯한 근처의 여러 읍을 굳게 방어하였다.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한 곽재우(郭再祐)와 팔공산에 웅거한 권응수(權應銖)의 양 진영을 내왕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다시 의병을 모집하고 울산 증성전투(甑城戰鬪) 등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뒤에 이항복(李恒福) 등이 천거하여 창녕현감(昌寧縣監)이 되었고, 1636년(인조 14)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운룡(李雲龍) 1562~1610

문무(文武)를 겸한 조선조의 무신(武臣)으로 자는 경명(景明)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재령이다. 1585년(선조18)에 24세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천거로 1587년(선조20)에 선전관(宣傳官)에 오르고 1592년(선조25)임진왜란 때 옥포만호(玉浦萬戶)로 많은 공을 세운 후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승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전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이 도망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하여 내원(來援)한 수군과 합세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50여척을 격침시켜 임진란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 선조29년(1596년) 이순신이 천거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선조 37년(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3등에 책록 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선조 38년(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都摠府 副摠管), 포도대장 겸 화기제조(捕盜大將 兼 火器提調),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냈다. 선조40년(1607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서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광해군2년(光海君:1610) 49세로 졸 한 이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5. 淸道地域 遺蹟 - 參考 資料

황강서원(皇岡書院) 청도군 금천면 금전리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등의 안(案)으로 청위공 천만리(千萬里)가 살던 정사에 서원을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으며 그 뒤 영정만 모시고 있다.

 

금호서원(琴湖書院) 청도군 이서면 삼성산길 106-58금호서원은 경상우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1562∼1610, 보물)장군과 향산 이백신(鄕山 李白新)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당초 출생지인 매전면 명대마을(온막리)에 상충사(尙忠祠)를 건립하여 향사 하다가 조선 순조14년(1814)에 이서면 금촌리로 이건 한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에 훼철(毁撤)되고 강당만 대월산 기슭으로 이건 하여 효충사(孝忠祠)라 하였고 1947년에는 서원을 중창하고 강당은 2001년 다시 중건하였다.서원은 대월산(對月山)을 배경으로 앞쪽의 풍양지와 학산(鶴山)바라보고 전체배치는 2단으로 조성된 대지에 외삼문 강당 사당을 일축선상(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좌우에 동.서재를 둔 전학후묘형식(前學後廟形式)이며 사당은 현충사(賢忠祠)라 하고 기둥 위를 연화와 봉두로 장식하고 있다.

 

봉양서원(鳳陽書院) 풍각면 봉기리

춘정(春亭) 변게량(卞季良)선생 제단 옆에 1935년 정사를 건립하여 운영해 오다가 서원으로 승호하였디.

 

차산서원(車山書院) 풍각면 차산리

밀성인 박한주, 철성인 이주(李冑), 탁영 김일손 세 분을 모신 서원으로 1953년에 건립하였다.

 

원모재 운문면 순지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2호)·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1593∼1647) 선생과 그의 아들 운계(雲溪) 김주(金柱:1612∼1678)를 모시는 재실이다. 건립연대는 효종 년간(1650∼1659)으로 추정하며 1957년 중수하였고 1993년 운문 댐 건설로 수몰지역인 운문면 순지리 484-1 번지에서 현 위치로 옮겼다

 

운곡정사(雲谷精舍)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0호)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1593∼1647)의 8대손 운곡(雲谷) 김몽노(金夢魯:1828-1884) 의 생가이다. 건립은 1700년경으로 추정하며 1910년에 중수하고 1993년 운문댐 건설로 인해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운곡정사(雲谷亭舍)란 당호는 운문면 방음리 낙화정(樂和亭)이 퇴락한 후 그곳 정자에 있던 편액을 가져와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낙화정에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선월정(先月亭) 청도읍 사촌리 / 군자정(君子亭) 화양읍 유등리

화산정(華山亭) 화양읍 범곡리 / 학산정(鶴山亭) 회양읍 금전리 등이 있다.

 

고운영정(孤雲影幀) 청도군 각남면 구곡길 125-1

최치원(崔致遠857∼?)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학자로서 경문왕(景文王) 9년(869년)에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그곳에서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활약했으며 879년(憲康王5년)에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특히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신라말 석학(碩學)인 고운 최치원선생(孤雲 崔致遠先生)의 영정(影幀)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리산 쌍계사(雙溪寺)본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본이 있다.

이곳 학남서원 계동사에 봉안된 영정(影幀)은 해인사 본으로 원래 해인사 나한(羅漢)의 영정(影幀) 가운데 섞여 있었던 것인데 구한말 왜적의 약탈이 두려워 최씨 문중에서 해인사 주지와 교섭하여 낮(日谷) 마을로 이봉(移奉)한 것으로 그 역사적(歷史的) 가치(價値)가 높이 평가(評價)되고 있는 영정이다.고운 영정(孤雲 影幀)은 우리나라 도처에 봉안되어 있으나 그 대부분이 승상(僧像) 형식을 취함에 반하여 이 영정은 중국풍(中國風)의 형식을 취한다. 이 영정에서 고운(孤雲)은 사방모(四方帽)에 연거복(燕居服)을 입고 부채를 쥐고 앉아 있다.

그 양 옆에는 석류를 담은 청자 그릇을 받쳐든 동자와 파초선을 든 동녀가 시립(侍立)해 있다. 또한 화폭 왼쪽 위에는 신라 최선생 고운진영(新羅 崔先生 孤雲眞影)이라는 제기(題記)가 기록되어 있다.

화폭의 크기는 세로105cm 가로 74cm로 고식(古式)을 취하고 있으나 안면 묘사와 옷주름 처리에 나타난 선염법의 사용,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그린 이모본(移模本)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록 이모 본이라 하여도 우리나라 일반 사대부상을 그릴 때에는 보통 주인공 한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리는 것을 상식으로 하나 이 초상화는 화면구성이 특이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초상화사상 크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도주관(道州館)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 건물로,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으로 1670년(현종 11)경 건립되었으며, 정당(政堂)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어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고, 좌우 익사(翼舍)에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방문하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의 진산인 오산(鰲山)의 소구릉 등성이에 옛 동헌의 자취가 남아 있고, 그 우측 밑으로 객사가 서향으로 자리하였는데, 현 도주관은 정당과 우익사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삼문과 정당은 일축선상에 놓여 있고, 평삼문 우측에 5칸 곳간이 우익사와 대향하여 서 있다.

마당의 우측 담장쪽에 역대 군수들의 선정비(善政碑)가 옮겨져 있고, 우익사 뒤쪽에 일각대문을 내었다. 좌익사와 그 앞에 있던 관리사는 한일합방 후 철거되었다.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

선암서원(仙巖書院) 장판각에 보관되어있는 이 판목은 청도 문화재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학상 유일한 각판목(刻板木)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부운략(禮部韻略)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초사전으로서 송(宋). 원(元)대부터 우리나라에 수입해온 음운고사전류(音韻考辭典類)이다. 고려 이래 선비들의 필수자전으로 쓰여왔고 조선시대에 들어와『홍무정운(洪武正韻)』『동국정운(東國正韻)』이 새로 나왔으나 일반인은 여전히 예부운략을 사용하였으며 뒤에 찾기에 간편한『삼운통고(三韻通攷)』가 보급되기까지 애용되었다.

이는 한문 공부의 기초부터 율시(律詩) 작문 등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특히 과거 응시자들의 필수서로 과거를 관장하는 주무부서인 예부(禮部)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예부운략(禮部韻略)은 1300년(충열왕26년)에 발행한 해계서원판(海溪書院版)이다.

예부운략은 원래 1464년(세조10년)에 방촌 황희(黃喜)의 손자 황종형(黃從兄)이 청도군수로 있을 때 김맹(執義 金孟1410∼1483년)의 글씨로 만든 예부운략(禮部韻略)이 청도 적천사(象川寺)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임란후 제우당 박경전(悌友堂 朴慶傳)과 국헌 박경윤(菊軒 朴慶胤)형제가 충북 영동에서 원판을 구해와 1573년(선조6년)에 복각한 만력판(萬曆板)12매와 1679년(숙종5)에 박동부(朴東傅)에 의해 다시 복각한 강희판(康熙板)150매 합162매로 크기는 세로20.5cm 가로46.2cm 두께1.8cm이다.

이것이 오늘날 선암서원(仙巖書院)에 보관되어 있는 배자예부운략판목(排字禮部韻略板木)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영동에서 구해온 원본은 청도의 황종형(黃從兄)군수 때 만들어진 천순본(天順本) 예부운략의 복각본(復刻本)이라 한다.

따라서 선암서원(仙巖書院)에 현재 소장되어있는 만력본(萬曆本) 예부운략은 청도에서 세조때 간행된 천순본(天順本)의 복각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천사(象川寺)에 보관 중이던 천순본(天順本) 예부운략이 우리나라의 최고본 예부운략이었으나 아깝게도 왜란당시 불타 없어지고 복각본이라 할 수 있는 선암서원 소장의 예부운략이 우리나라 유일의 예부운략으로 희귀본에 속하며 현존 판목수는 152매이다. 배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은 서(序), 본문(本文), 옥편(玉篇), 발(跋)의 4개 부문으로 구성(構成)되었다.

강희판(康熙板)은 5권 2책으로 간행되어 유포된바 있으며, 이들 판목은 조선조 서지학, 특히 판각연구 및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운룡(李雲龍)의 영정

이운룡(李雲龍)의 영정은 선조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3등 훈을 받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을 때 나라에서 초상을 그려 영구히 보존하라는 교서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조선 선조(1604) 초기에는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명대리 상충사(尙忠祠)에 봉안하였다가 순조18년(1818)에 유량(柳亮)등 400여명의 사림(士林)이 발의하여 이서면 금촌리에 금호서원(琴湖書院)을 건립하여 봉안해왔다.

고종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금호서원이 철폐되고 1928년 풍양지내 대원산 아래로 이건하여 효충사(孝忠祠)로 개칭하여 봉안하였고, 1919년 개모(改模)하여 구 영정은 청도읍 원정리 흑석에 있는 충현사(忠賢祠)로 이안(移安)하여 봉안하고 있다.가로178cm 세로140cm의 이 영정은 단호흉배(單虎胸背), 학정금대(鶴頂金帶) 의 착용은 공신호책록(功臣號冊錄) 당시 이운룡(李雲龍)장군의 품계(品階) 즉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部摠管)이란 종2품이 품계와 부합되며 조선중기 공신도상(功臣圖像)의 전형적인 형식을 예시해주는 가작이다.

 

이운룡(李雲龍)의 공신교서(功臣敎書)이운룡(李雲龍)의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선조37년(萬曆32년 1604년) 10월에 국왕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특히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식성군 이운용(息城君 李雲龍)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3등을 내린 상훈교서(賞勳敎書)이다.

 

청도 척화비(淸道 斥和碑) 청도군 화양읍 석상리 15-15

척화비는 고종(高宗)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후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대원군의 명령에 의하여 서울 종로를 위시하여 전국주요 도로변에 세웠던 척화비 가운데 하나이다.비문에는 전면에 주문으로『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를 새겼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 새겼는데 그 뜻은『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며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되니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이며 높이는 4자5치(155cm), 너비 1자5치(45cm), 두께 8치5푼(25cm) 크기이고 병인년(丙寅年1866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辛未年1871년)에 세운다 라고 적혀있다.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있고 난 뒤에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세계 각 국과 교류를 하게되자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도내에는 이 비를 비롯하여 구미. 경주 등 4. 5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원래는 도로변에 세웠던 것을 도주관(道州館)으로 옮긴 것이다.

 

김사미의 난(金沙彌─亂)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에서 김사미가 일으킨 반란이다. 역사적 배경으로는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의 귀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해,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은 약 1백년간(1170∼1270) 존속하지만 무신 집권 초기의 정국은 매우 혼란하고 불안정해,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은 이 틈을 타서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은 무신정권의 전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나, 그 규모나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은 무신정권 초기의 약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 시기에 삼남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민란의 하나였다.

김사미의 출신성분을 알 수가 없으나, 경상도 청도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출신으로서 농민반란군의 지휘자가 된 그는 1193년 청도군 내의 운문(雲門)에 본거를 두고 부근의 농민, 특히 유망농민(流亡農民)을 규합해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하여 당시의 정부인 무인정권에 반대하는 큰 민란으로 치닫게 하였다.

이 무렵에 경상도·전라도·양광도에서는 기근으로 민심이 매우 소란하였고, 1190년부터는 동경(東京:慶州)에서 일어난 민란을 비롯해서 이른바‘남적(南賊)’의 폭동이 남부지역에서 널리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렇게 확산된 남적에 의한 민란의 일환이었다. 그 동기에 있어서는 다른 여러 민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억압자인 무인정권에 반대해 농민과 천민이 그들의 압제와 수탈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하고, 또한 그것을 모색하는 매우 소박한 것이었다.

김사미 난의 경과와 결과는 김사미가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은 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을 근거로 한 효심(孝心)의 농민반란군들과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해 연합전선의 태세를 갖춘 일면도 있었던 것 같다.

남적 특히 김사미와 효심이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로 하여금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인솔하여 현지에 출정하게 하였다.

당시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이의민(李義旼)이며, 장군 이지순은 그의 아들이었다. 정부의 토벌군은 농민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해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고려사』 이의민전에 의하면 토벌작전의 실패는 이지순이 김사미·효심 등과 서로 통모(通謀)해서 작전의 기밀을 누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란군에게 의복·식량·신발·버선 등 군수물자를 원조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벌군 사령관 전존걸은 이지순의 통모행위를 알고 있었으나, “법에 따라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의 아비가 나를 죽일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이지순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그 배후에는 이의민이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스스로 새 왕조를 창립하려던 망상과 경주인(慶州人)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라의 부흥운동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조성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술책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의민은 신왕조 개창이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김사미·효심 등 남적의 지도자들을 이용하였고, 또 경주인들과 가맥이 상통하는 남적세력의 일부는 비록 사비(寺婢)의 소생이기는 하나, 경주 출신이며 경주이씨의 일족인 이의민을 이용해 신라의 부흥을 실현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고려왕조에 반대하는 당면의 처지는 공통되었으므로 서로를 이용하려는 수단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김사미의 난은 농민과 천민의 해방을 바라는 소박한 계급적인 문제와는 차원을 달리해, 그 배후에는 경주인의 신라부흥운동을 비롯, 당시의 지역감정문제 및 경주이씨의 족적(族的) 유대의식 등 상당히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난은 발생한 그 해 11월에 상장군 최인(崔仁)이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장군 고용지(高湧之)가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임명되어 토벌에 가세한 결과 겨우 진압되어 이듬해 2월에 김사미는 투항하여 참수되었다. 이의민은 김사미 등의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그들과 통모하려던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손을 떼고 말았다. 이 난이 발생·진행·진압되는 과정에는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이의민의 미묘한 처지가 매우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사미를 포함한 당시의 농민반란군 지휘자들이 조직적 훈련이 부족한 농민과 천민을 규합해서 큰 저항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주목된다.

 

 

 

출처 :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글쓴이 : 강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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