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21. 남원성 함락되다(1) - 남원 만인의총에서 김세곤 글 무등일보 연재
김세곤
2013. 4. 24. 00:17
호남정신 뿌리를 찾아-21. 남원성 함락되다(1) - 남원
만인의총에서 |
왜군, 구례·곡성 함락 후 남원으로 진격 |
입력시간 : 2013. 04.24.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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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인의총 | |
남원은 전라도·충청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
明장수 양원, 교룡산성 포기 남원성 수성 계획
남원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 고전 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다. 관광객들은 춘향이가 그네를 탔다는 광한루를 가장 구경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역사에서 남원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 그것은 남원성 함락이다.
1597년 8월16일에 남원성은 왜군에
의해 무너졌다. 명나라 총병 양원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4천명의 조명 연합군은 우키다와 고니시가 지휘하는 5만6천명의 왜군과 3박4일간
치열하게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남원성 전투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남원을 간다. 먼저 가는 곳은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만인의총이다.
입구에서 만인의총 안내판을 읽는다. 안내판에는 '남원성 전투에서 만 여 명에 달하는 민·관·군이 죽었고 파괴 또한 극심하여 성안에는 민가가
17가구 밖에 안 남았다. 광해군 때 충렬사 사당을 지었고 근래에 무덤과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성역화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의롭게 숨진 조상들의 절개를 느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먼저 기념관부터 구경한다. 기념관은 입구에서부터 볼거리가
많다. 바로 들어서니 남원부지도와 왜군 남원성 침공작전도가 전시되어 있다. 눈길이 가는 것은 왜군 남원성 침공작전도이다. 이 지도는 남원성
침공에 참전한 왜군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작성한 것인데, 그동안 일본 가고시마현 도서관에 묻혀 있던 것을 일본으로 끌려간 전라병사 이복남의 11대
후손인 이가정문(李家正文)이 찾아내어 1992년에 남원에 보낸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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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인의총 기념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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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에는 임진왜란침공상황도와
남원성전황도, 정기원·마응방·박계성의 교지가 벽에 붙어 있다. 남원성 전투 기록화도 전시되어 있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정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97년 5월에 명나라 총병 양원이 이끄는 요동군 3천명이 남원에 주둔한다. 양원은 남원성을 보수하는 등 전쟁에 대비한다.
8월초에 5만6천명의 일본 육군과 수군은 남원으로 진격을 한다.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에(우희다수가),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이고, 장수들은 시마즈 요시히로(도진의홍)·하치스가 이에마사·조소카베 모토치카·가토 요시아키·이코마 가즈마사 등이었다. 또한
도도 다카도라·와기사카 야스하루·가토 요기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도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우키타·고니시 등이 이끄는 육군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 구례로 진격하였고, 도도·와기사카가 이끄는 일본 수군은 8월3일에 두치진(전남 광양시 다압면 소재)에 들어왔다.
8월6일에 구례현감 이원춘은 왜적의 기세에 밀려 석주관에서 퇴각하여 본성으로 돌아와 창고를 불살랐다. 이윽고 그는 군사를 이끌고
남원으로 향하였다.
8월7일에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구례를 점령하였다. 구례·곡성 지역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순신은 이 날의
난중일기에서 “옥과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에서 전라병사 이복남 관하의 군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산성과 진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데 그 행렬이
길 위에 연달아 있었다. 이들에게서 말 3필과 활과 화살 약간을 빼앗았다”고 적고 있다.
8일에 왜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명나라 총병 양원은 명군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남원성으로 들어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전라병사 이복남의 군사는 1천명, 전주를
지키고 있는 진우충은 2천명의 군사가 있었다.
이날 운봉현감은 급히 보고를 하였다. “구례의 적들이 몰려오고, 영남 좌우도의 적도
이미 거창·산음 등지에 이르러 모두 분탕질하였습니다.”
9일에 흉악한 왜적은 둔산령(屯山嶺)을 넘어서 여러 마을을 불 지르며 남원
가까이 왔다. 백성들은 피난 가느라고 북새통이었다.
'난중잡록'을 지은 조경남도 깊은 산속으로 대피하였는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일기에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
8월10일에 총병 양원은 남원부사 임현으로 하여금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남원성 밖의 민가도 전부 불태우게 하였다.
남원에는 두 개의 성이 있었다. 평지에 남원성이 있고 산에는 교룡산성이
있었다. 일찍이 명나라 참장 낙상지는 남원성을 보수하였고, 또 교룡산성도 지킬 만한 곳이라고 여겨 여러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수리하고
성가퀴를 더 쌓았다.
그런데 총병 양원은 교룡산성을 버리고자 하였다. 접반사 정기원과 남원부사 임현은 양원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교룡산성은 천하에 험하기로 이름난 요새지이니 만약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적의 근거지가 될 것입니다. 본부의 민병은
힘을 다하여 본성을 지키고, 다른 고을의 백성은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룡산성과 본성인 남원성이 자모진(子母陣)이
되어 성세(聲勢)를 이루어 서로 의지한다면 어찌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양 총병은 비웃으면서 조선군의 무능부터
비난하였다.
“근래 누국안(婁國安)의 말을 들으니 조선 수군이 접전할 때에 오직 한 배의 장사만이 싸움에 항거할 계책을 세웠을 뿐
그 밖에는 모두 지레 물에 뛰어들어 죽거나 혹은 해안으로 기어올라 도망하여 흩어지니, 왜적들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조선 군사를 패망시킨
것이 아니라 조선 군사 스스로가 패망한 것이다. 만약 많은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남원으로 향한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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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남원성 입성 기록화 (1597년 8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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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의 이 말은 7월16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을 조선 수군의 무력함 탓으로 돌리는 치욕적인 발언이었다.
이어서 양원은 “그대 나라의 사람들은 멍청하고 겁이 많으니
만약 적을 보고 붕괴된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교룡산성을 지키자는 조선 지휘관들의 건의를 아예 무시하고 평지에 있는 남원성
고수만을 결정하였다.
한편 양원이 교룡산성을 포기한 것은 하책 중에 하책이었다. 이 당시 군량 지원을 챙기러 온 호조참판 이광정이
남원성 안에 머물러 있다가 남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우리나라 군사가 산성을 맡아 지킨다면 직책은 비록 다르나 나도 또한 죽음으로써 함께
지키려 하였는데 산성이 이미 파하였으니 여기 있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였다.
8월12일에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이 장사 50명과 수 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이복남의 군사들은 남원으로 오는 도중에
슬슬 도망을 하여 겨우 50여 명만 남았다. 이복남은 길에서 조방장 김경로를 만났다. 그는 기뻐하며 손을 잡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진군하여 비홍령(飛鴻嶺)을 넘어서니 왜군은 이미 남원성 가까이 도착하였다.
이복남이 이를 바라보고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군부(君父)의 급한 환란을 구하는 것이 오늘이 아닌가, 국가의 큰 은혜를 갚는 것도 오늘이 아닌가. 병졸은 분발함으로써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강해지니 생사와 화복을 어찌 논할 것인가.”
그리고는 나팔과 태평소를 불고 북을 치면서 만복사(萬福寺)
앞 대로를 따라 행군하여 남문으로 들어갔다.
이 때 왜적들은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왜적들이 묻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돌하냐?”하니 사로잡힌 조선 사람들이 “전라병사 이 아무개이다” 라고 하였다.
한편 전주에 있는 진우충은 아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토 기요사마가 전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도 진우충이 남원으로 가는 것에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일은 갓 부임한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전주 감영에서 부안군 변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황신은 1596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 결렬
때에 일본에 파견된 조선 사신이었다. 전라도를 책임지는 최고 수장이 저 혼자 살려고 도망을 갔으니 어찌 남원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김세곤 (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