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11, 여수 충민사에서 3, 김세곤 글 무등일보 연재

김세곤 2013. 1. 30. 02:27
호남정신 뿌리를 찾아-11. 보성군수 안홍국, 안골포해전에서 전사하다 - 여수 충민사에서 (3)
독불장군 원균 전장에서 첩과 놀아나
입력시간 : 2013. 01.30. 00:00



이순신을 도운 사람들을 새긴 비석 - 충민사 마당에 있다.

육군 선공격 요구로 시간 끌며 싸움 피해

상하 막론하고 불통으로 진중 불만 비등

1597년 6월 중순에 도체찰사 이원익은 종사관 남이공을 한산도에 파견시켜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린다. 원균은 마지못하여 6월18일에 안골포와 가덕도 앞 바다로 출전한다. 이때 도원수 권율이 조정에 올린 장계를 읽어 보면 원균이 어쩔 수 없이 출전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통제사 원균은 매양 육로에서 먼저 안골포 등의 적을 치라고 미루면서 바다로 나가 군사 작전을 벌여 오는 왜적을 막을 생각이 없으니, 신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혹은 전령으로 혹은 회송하면서 호되게 나무랐고 세 번이나 도체찰사에게 군관을 보내어 원균을 압박하도록 요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 남이공이 체찰사의 명을 받들고 한산도에 내려가서 원균에게 독촉하고서야 부득이한 나머지 18일에 비로소 전선을 출발시켜 크고 작은 배 1백여 척이 가덕도 앞바다를 향했으니, 이는 남이공의 힘이었지 어찌 원균의 마음이었겠습니까.' (선조실록 1597년 6월 28일)

조선수군의 부산 공격에 대한 권율과 원균의 갈등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적혀 있다. 6월17일과 6월19일의 '난중일기'에는 권율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충민사 유물관 안에 있는 부조



6월17일에 이순신이 아침을 먹은 후 도원수에게 갔더니, 권율은 이순신에게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여러 번 이야기 하였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준 공문을 보여 주는 데 원균의 장계에는 “안골포를 장악한 후에 부산을 쳐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적혀 있었고, 권율이 작성한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오직 안골포의 적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한다. 수군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므로 여러 장수들과 절대로 합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6월19일에 이순신은 도원수진에서 권율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권율은 원균에 대하여 극도로 불신에 찬 말을 한다.

'통제사의 일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소. 그는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질질 끌다가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오. 그래서 나는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를 독촉하여 진격하도록 할 작정이요. 통제사는 내가 지휘하지 않을 것이요.'

그러면 여기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한산도에서의 생활을 살펴보자. 이에 대하여는 유성룡의 '징비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신경의 '재조번방지' 등에 나와 있다. 가장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문집이 '징비록'이다. 징비록의 관련 부분을 읽어 보자.

'한산도에 부임한 원균이 맨 처음 한 일은 이순신이 시행했던 규정을 폐지하고 바꾼 것이다. 부하 장수와 수군들 중에서 이순신에게 신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조리 골라내어 쫓아버렸다. 원균이 특히 미워하였던 자는 이영남 이었다. 왜 그렇게 미워했는가 하면 그는 전에 자기가 패하여 도망간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은 드러내놓지는 못했지만 원균의 그러한 처사에 다 같이 미워했고 분노하였다.'

사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집을 한 채 지어 운주당이라 이름 짓고 거기에서 지내면서 밤낮없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의견을 말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곳에 들러 밝히게 끔 했다. 그러니 자연 군중의 여러 사정에 밝았었다. 그리고 전쟁을 하기에 앞서 번번히 전 부하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뒤 싸움에 임했으므로 패전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운주당에서 원균은 첩과 함께 거처하느라 울타리로 안팎을 다 막아버렸다. 그러므로 장수들조차 원균의 얼굴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날마다 술이 취해 주정을 하고 화를 내며 형벌을 내림에도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

진중에서는 이렇게들 수군거렸다. “만약 왜적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도망가는 게 상책이야.”

장수들은 장수들대로 함께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었다. 전쟁이나 군사에 관한 일을 얘기해 주지도 않았다. 또 그의 명령에 잘 따르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이순신은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원균의 리더십은 불통이었다. 원균은 용맹하기만 하고 꽉 막힌 독불장군이었다. 권율 등 상사와도 사이가 안 좋고 휘하의 수군 장수나 병졸들과도 화합하지 못하였다.

아무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 남이공의 독촉에 따라 안골포와 가덕도 전투에 임하였다.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6월18일에 원균은 대소 군선 9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거제도 장문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6월19일에 조선수군은 안골포로 진격하였다. 안골포는 지금의 경남 진해시 웅동면에 있는 포구이다. 그때 왜군들은 해안에 잠복해 있으면서 암석 사이에 기계를 설치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울리면서 전진했더니 적들도 배를 타고 싸움을 걸어와 서로 응전하였는데, 포탄과 화살이 함께 쏟아져 해안이 진동하였는데도 군사들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었다. 마침내 조선 수군이 적선에 육박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하니, 왜적은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해안 위로 도망하였고 조선수군은 왜선 2척을 빼앗았다.

이어서 원균은 가덕도(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로 향하였는데 그곳의 왜군은 이미 섬으로 피신한 후였다. 조선 수군들이 추격하였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군은 별수 없이 추적을 그만두고 돌아오려 할 즈음에 안골포의 왜군들이 또 다시 배를 타고 역습해 왔으므로 아군은 다시 돌아서 접전하였다. 왜군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배의 좌우를 협공하며 비처럼 탄환을 쏘아대었다. 아군 역시 방패에 의지하여 화살을 다발로 쏘아대며 응전하였다.

충민사 유물관



이 전투로 평산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탄환을 맞았는데 즉시 뽑아냈고 그밖에 졸병들은 하나도 중상을 입지 않았다. 다만, 보성 군수 안홍국(安弘國 1555∼1597)이 끝내 이마에 철환을 맞아 뇌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안골포 해전에서 전사한 보성군수 안홍국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고 영흥에 있는 임해군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였으며, 소식이 두절된 삼남의 각 진을 다니며 왕명을 알리었다. 이 해에 그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안홍국의 신위는 여수 충민사와 보성 정충사에 모시어져 있다.

결국 원균은 부산포까지 진출하지도 못 한 채 한산도로 돌아온다. 원균은 또 다시 출전하기 싫은 듯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안골포 전투를 조정에 장계하면서 조선 수군이 해로를 계속 왕래하면서 왜군을 교란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요즈음 왜군이 대마도에 많이 모여 있는데 그들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반드시 6∼7월 동남풍이 부는 때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당하여 수군이 해로를 왕래하면서 혹 적과 서로 마주쳐 막아 죽이고 혹은 의심하고 꺼려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 유익할 것입니다. 전선을 정제하여 해양을 출입하게 하되, 가덕도·안골포 등의 적진이야말로 출입하는 길목에 해당되니 그들과 서로 접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보성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은 것은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입니다.'

(선조실록 1597년 6월29일)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