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보성군수 안홍국 전사하다. 여수 충민사에서 (2), 김세곤 글

김세곤 2013. 1. 24. 10:51
호남정신 뿌리를 찾아-10. 보성군수 안홍국, 안골포해전에서 전사하다
여수 충민사에서(2)
입력시간 : 2013. 01.22. 16:25



충장사. 행주산성에 있는 충장공 권율을 모신 사당이다.

수군 단독작전과 수륙 양동작전 놓고 대치

이원익·권율, 수군의 왜선 보급로 차단 주문

원균, 육군의 선제공격 후에 수군 운신 주장

5월12일에 비변사는 도원수 권율의 장계를 바탕으로 수군의 단독작전을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당시 조선수군의 배는 187-188척으로 판옥대선(板屋大船)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한산도에 정박한 배가 1백 34척이고, 이미 출발하였으나 아직 도착하지 못한 배가 5∼6척, 건조가 곧 끝나는 배가 48척이었다. 이밖에도 수군의 형세를 도울 병선이 더 있었다.

비변사는 수군 세력이 이처럼 모아졌으니 통제사 원균을 시켜 다시 형세를 살피어 거제도와 옥포 등지에 진주시키고 부산과 대마도의 바닷길을 살피게 해서 중로를 막아 끊는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어서 비변사는 설령 크게 싸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배를 3등분해서 절영도 앞바다를 번갈아 오가며 전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부산과 서생포에 상륙해 있는 왜적들은 모두 군량미 수송로가 끊길까 걱정할 것이고, 뒤를 이어 나오는 적선들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함부로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적의 형세는 선두와 후미가 단절되어 조선수군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비변사는 덧붙였다. 그런데 선조는 비변사의 의견은 지당하나 체찰사가 재량대로 지휘하도록 체찰사에게 지시는 하지 말라고 전교한다.

같은 날 도체찰사 이원익은 조정에 왜적의 정세를 보고한다. 이원익은 경상좌도 방어사 권응수의 비보에 의거하여 조선이 만일 강화하지 않으면 일본의 대군이 6∼7월 사이에 바다를 건너와 먼저 전라도를 약탈하고 마음껏 분탕질을 할 것이라고 보고한다. 이 보고는 간첩 요시라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으로 왜군이 우선 전라도를 침범하여 군량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한편 선조는 5월15일에 대신과 비변사 유사당상을 인견하고 수군과 육군의 운용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는 영의정 유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형조판서 김명원, 병조판서 이항복 등이 참석하였다.

대첩기념관. 행주산성 안에 있다



이 회의에서 좌의정 김응남은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견해를 보고한다. 김응남은 ‘우리나라는 스스로 떨쳐 일어날 형세가 없으니 곧바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중국군대로 성원을 삼고 때때로 출병하여 출몰하는 적들을 공격한다면 좋겠다’는 것이 이원익의 의견이고, 권율의 견해는 ‘한쪽으로는 육병으로 소란스럽게 적을 침략하고, 또 수병을 3등분하여 번갈아 오가다가 외로이 떨어져 돌아다니는 적들을 만나게 되면 포획하는 것’이라고 아뢴다.

그러자 선조는 “수군이 어느 길을 따라 드나들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옥포에서 배를 띄워 가덕도 외양을 따라 드나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이항복은 “현지 수군 장수들은 불가능하다”고 하자, 선조가 “어찌하여 불가하다 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이항복이 “외양에는 배를 띄울 수 없는 까닭에 이 점을 어려워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고, 유성룡은 “수로로 적의 소굴과는 30리 정도입니다. 50척의 배로 번갈아 들고 난다면 좋을 듯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유성룡의 의견에 동조하여 “그렇다면 지금 거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성룡은 “기회를 보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렇듯 선조는 수군이 앞장 서서 왜군을 공격하기를 원하였다.

반면에 선조는 육군의 공격에는 회의적이었다. 선조가 “육군으로 침범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이항복이 “지세가 불편한 곳에 진격했다가 차질을 빚으면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선조가 “육군으로 소란스럽게 적을 침략하자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물으니, 윤두수가 답하기를 “전에는 우리의 군세가 미약해서 거사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중국군대로 성세를 삼아 협력하여 저들을 친다면 성공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마치 잠자는 범의 꼬리를 건드리는 격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꾸하였다. 선조의 이 말은 왜군을 잠자는 호랑이로 비유한 것이다. 이렇듯 선조는 육군은 왜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가장 믿는 수군의 부산 앞바다 진공작전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수군통제사 원균이 전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6월10일에 도체찰사 이원익은 수륙 양군의 전투계획을 보고한다. 그의 보고서를 읽어 보자

“왜군의 대군이 건너오기 전에 한 번 군사들을 총집결해 결전해보고 싶으나 우리와 저들의 힘을 헤아려 보건대 크게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도원수 권율 역시 군사를 내어 책을 공격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밤낮으로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오는 적을 막아 죽이는 것은 오직 수군만을 믿고 있는데, 근일에는 수군이 한 번도 해양에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세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매우 염려됩니다.

따라서 수군강화를 위하여 새로 배 37척을 건조하는 한편 제석산성에 서 근무하게 되어 있는 군사 5천 명 중에서 격군(格軍)을 충원하도록 하였고, 신의 종사관 남이공으로 하여금 한산도로 달려가 신구의 전선을 모두 합쳐 절반은 한산도 등에 머물러 있고 반은 운도 등의 해양에 출몰하게 하였습니다.

안골포 등에 왜적이 있지만 본진의 선박으로 배후를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이 있더라도 해양의 선박으로 즉시 처치케 할 수 있으므로, 통제사 원균 등 각 장수와 상세히 의논하여 시행하라고 남이공에게 지시하여 보냈습니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해로를 차단하는 일은 이전부터 힘써 왔는데도 그 계책이 아직 한 번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매우 개탄스러우나, 이번에는 기회를 잃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6월11일에 원균은 또 다시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점령하여야만 수군의 부산 공격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조정에 올린다. 원균의 보고는 이원익과 권율의 작전과 정면 배치되는 보고였다.

“거제의 왜적은 안골포로 들어가 점거하고 김해의 왜적은 죽도로 들어가 점거하여 목을 막고 서로 의지하면서 우리나라의 뱃길을 막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적의 무리를 차단하여 공격할 방도가 다시없게 되었는데, 설사 대거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나아가서는 배를 머무를 곳이 없고, 물러나서는 뒤를 돌아다보아야 할 근심이 있습니다.

권율 초상화.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충장사에 있다



신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수륙으로 병진하여 안골포의 적을 도모한 연후에야 차단할 방도가 생겨 회복하는 형세를 십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조정에서도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신이 변방에 있으면서 적을 헤아려 보건대 금일의 계책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각별히 처치하여 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이에 비변사는 “원균의 뜻은 반드시 육군이 먼저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도원수와 체찰사의 뜻은 수군을 나누어 다대포 등을 왕래시키면서 해양에서 요격하려는 계획입니다. 이는 대사이니, 여러 장수의 계책을 하나로 결정하여 처리해야지 서로 달라서 기회를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보고한다.

그러면서 “지도로 형세를 살피고 해변의 형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의 말을 참조하건대 안골포는 김해·죽도와 매우 가깝고 지형이 바다 가운데로 뻗어 나왔으므로 군사가 육로로 공격하면 적에게 뒤에서 엄습당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도원수가 진공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또한 반드시 소견이 있을 듯합니다”라고 말하여 권율의 의견에 찬동한다.

끝으로 비변사는 일선 장수들의 지휘문란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대저 군중의 일을 제어하는 권한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있으니, 제장으로서는 품하여 지휘를 받아서 진퇴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근일 남쪽의 장수들이 조정에 처치해 달라고 자청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체통을 유지시키는 뜻이 도무지 없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 6월 11일)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