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6세기 호남사림의 위상과 유산
일정 |
상세일정 |
내용 |
비고 |
09:00 ~ 09:30 |
접수, 참가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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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09:40 |
준비 및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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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0 ~ 10:40 |
백화정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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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취지안내, 일정안내, 자료집배포, 간식배포 등 |
10:40 ~ 11:00 |
백화정 |
이종범교수님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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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11:20 |
하서묘소, 신도비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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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이동 |
11:20 ~ 11:40 |
하서묘소, 신도비 |
이종범교수님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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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12:20 |
박수량백비 |
이종범교수님 설명 |
박수량선생묘소(백비)이동 및 설명 |
12:20 ~ 12:30 |
기삼연선생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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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선생생가(홍길동생가) |
12:30 ~ 12:40 |
필암서원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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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0 ~ 13:20 |
점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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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
13:20 ~ 14:00 |
현장강좌1 |
이종범교수님 강의 |
강의 (필암서원 청절당) |
14:00 ~ 14:10 |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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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 ~ 14:50 |
현장강좌2 |
안동교선생님 강의 |
강의 (필암서원 청절당) |
14:50 ~ 15:20 |
필암서원유물전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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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관람(문화해설사), 기념촬영 |
15:20 ~ 15:50 |
고산서원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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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 16:20 |
고산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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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 |
16:20 ~ 17:20 |
학교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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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
16세기 호남사림의 위상과 유산
이 종 범(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15세기 후반 등장한 사림파는 언론 활동과 학술 역량을 통하여 재상을 견제하고 국왕을 견인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갔다. 또한 對民庶政의 현장에서 토호와 향리의 규찰 및 지방사족의 의식각성과 자율규제를 통하여 서정쇄신운동을 전개한 사림은 ‘體制 性理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 성리학’을 啓發하였다. 그것은 군주를 公道로 인도하는 帝王學으로 구체화되는 한편, ‘士’의 주체의지를 뒷받침하고 得民을 향한 사회적 실천과 개혁의 흐름을 촉진시켰던 새로운 성리학이었다. 우주의 본체를 일상의 공용에 온전히 구현한다는 ‘全體大用’을 표방하였던 중국 송나라 經世理學의 ‘朝鮮的 變容’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사림의 公道와 得民을 겨냥한 정치ㆍ사회ㆍ이념적 활동은 시기가 내려옴에 따라 확산되었고, 마침내 乙卯倭變과 ‘林巨正의 난’과 같은 위기상황에 즈음하여 통치력의 한계를 드러낸 훈척세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따라서 16세기 후반 사림정치는 왕권을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국왕이 사림을 등용하고 그의 이념 좌표인 주자성리학을 수용한 때문에 개막된 것이 아니었다. 즉 ‘국왕의 위로부터의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왕권과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아래로부터의 도전과 성취’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군주국가에서 국왕의 역할을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지만, 국왕도 선택도 사림의 주체역량을 전제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또한 中宗反正, 金安老와 같은 權臣의 퇴진 및 외척정치의 버팀목이었던 文定王后의 薨去 등의 사건도 사림파에게 유리하였지만, 사림정치가 그러한 상황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역사를 ‘우연의 연속’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림정치는 어느 한 기간, 몇몇 인물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 백년에 걸쳐 언론과 학문, 교육 및 향촌활동 등에서 추구한 제 나름의 몫과 구실이 세대와 세대, 학파와 학파, 재조와 재야를 넘어서 진행되었던 轉乘과 共助의 과정에서 얻어낸 결실이었다. 이때 사림은 家門과 師承관계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仕宦 여부를 떠나서 상호 교류하였다. 또한 지역의 경계에 갇히지 않았다. 새로운 학풍의 힘이 먼저 발휘하기 시작한 공간도 지방이었다.
2. 15세기 호남사림의 존재와 학문
조선국가의 정치 형태는 사대부(훈척)정치 ⇒ 사림(붕당)정치 ⇒ 탕평(벌열) 정치의 형태로 전변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남의 학인관료의 역할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18세기 이후 상황은 타당할지 모르지만 이 시기에도 호남의 학인관료는 치열하게 자기모색을 추구하였다.
세종 치세는 우리 겨레가 儀禮文物만이 아니라 農學ㆍ天文ㆍ醫藥ㆍ印刷 등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비약을 이룩한 시기였다. 특히 訓民正音 창제는 德治敎化의 結晶이었다. 이러한 문화 창달은 무엇보다도 중국문명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것과는 風土가 다른 고유문명에 대한 自意識이 한층 고양된 결과였다. 물론 국가창업과 왕위승계과정에서 불가피하였던 상흔을 치유하고자 하였던 과거와의 화해 조치도 한 몫을 하였다. 그만큼 국정의 인재 기반이 확충되고, 국정 운영 또한 議政府署事制를 시행하고 인사권은 이ㆍ병조에 보장하면서 한동안의 재상정치론과 국왕전제론 사이의 갈등 또한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문화역량과 국력의 신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호남에서는 安止(1377∼1464, 강진)ㆍ申檣(1392∼1432, 나주)ㆍ崔德之(1384∼1455, 영암)ㆍ李先齊(1390∼1453, 광주) 등이 집현전의 고위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申叔舟(1417∼1475)는 훈민정음 창제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후진을 양성하고 향약과 鄕飮酒禮를 보급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문종ㆍ단종 치세 5년 동안 李始元(1428∼1488)ㆍ亨元(1440∼1479) 형제를 비롯하여 申末舟(1429∼1503)ㆍ丁克仁(1401∼1481, 태인)ㆍ尹孝孫(1431∼1503, 남원) 등이 문과에 들었다.
그러나 세조의 치세는 달랐다. 이 시기 정치는 외양으로는 전제왕권이 힘을 발휘하였지만 정치의 중심은 공신과 왕실의 인척이 차지하였다. 이때 호남 출신으로는 세조로부터 “卿은 나에게 당태종의 魏徵과 같다”고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던 신숙주가 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고위직에 오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학술 있는 문사로서 경전을 親講한 朴時衡(생몰년 미상, 세조 2년 식년문과, 장성)은 “道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고 하여, 亂言으로 걸려들어 13개월이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호남 사족은 학문을 진흥하고 향풍을 개선하였다. 세조 6년(1460)부터 2년가량을 호남을 유랑한 김시습이 적었다. “근래 사람마다 학문에 나서 완강한 풍속을 바꾸어 孝悌廉恥의 고장이 되면서 대를 이어 좋은 인재가 나오고 세를 이어 왕실을 보좌하고 있다.” 여기에는 15세기 농법 개선과 지방개발에 따른 경제적 실력이 뒷받침되었다. 해남의 草溪 鄭氏의 경우도 왜구의 잦은 노략으로 없어진 관아를 복설하였을 만큼의 튼실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인근의 林秀(선산 임씨), 崔溥(탐진 최씨), 尹孝貞(해남 윤씨) 가문의 정치ㆍ학술적 진출을 후원할 수 있었다.
성종 치세에 호남 인재의 진출은 한층 두드러졌다. 특히 성종 3년(1472) 사마시에서 전주부에서만 10인의 入格者가 나왔다. 사마시 정원이 200인임을 감안하여 한 고을 10인은 상당한 비중이었다. 전주향교의 敎授만 7년을 봉직한 卓中(생몰면 미상, 태인)이 착실하게 지도한 덕분이었다. 또한 성종 11년(1480)에도 나주에서만 10명이 사마시에 들었는데 향교 교수 朴成乾(1418∼1487)의 「錦城別曲」은 이때의 감회를 노래한 작품이었다.
이전에 비하여 문과급제자도 늘어났다. 박성건(성종 3년, 영암), 李復善(1443∼1504, 성종 5년, 광주)과 金塊(1450∼1482, 성종 5년, 장흥)에 이어서 崔溥(1454∼1404, 성종 13년 친시, 나주) 崔亨漢(? ∼1504, 성종 14년 春塘臺試, 광주), 李達善(1457∼1506, 성종 17년 식년시, 광주) 李繼孟(1458∼1523, 성종 20년 식년시, 전주) 宋欽(1459∼1457, 성종 23년 식년시, 영광), 朴權(1465∼1506, 성종 23년 식년시, 영암) 등이 뒤따랐다.
이중 최부는 제주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으로 급히 육지로 나오다가 풍랑을 만나 浙江省에 표착하여 귀환한 여정의 견문을 漂海錄으로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經史學과 인문지리학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東國通鑑과 東國輿地勝覽의 증보, 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동국통감의 새로운 史論은 훈구파의 현실안주의 공리주의 역사의식을 극복하고 의리명분의 성리학적 역사의식의 선구가 된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 평생을 처사로 지낸 최충성은 「正名論」 「一言興邦論」 「聖人百世師論」 등의 논설을 통하여 명분과 의리 및 中和의 정치를 제창하였는데, 특히 “스승은 사람에 있지 않고 도에 있다”는 새로운 師友論을 통하여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데 역할이 컸다. 또한 일찍이 맹자가 천명하고 주희가 강조하였던 君臣義理論에 주목하여 새로운 출처론을 제시하였다. “군자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합치하면 머물지만 맞지 않으면 떠난다.”
3. 무오ㆍ갑자사화와 호남사림
최부는 연산군 치세 국왕과 훈구파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하다가 무오사화로 유배를 갔다가 갑자사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에게 배운 尹孝貞(1476~1543)ㆍ柳桂隣(1478~1528)ㆍ林遇利 등의 후예가 중심이 되어 호남의 학문이 발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호남지방의 사림은 서로 교류 소통하였다. 당시 호남에는 연산군에 실망하여 “성종이 우리 임금이다” 하였던 李冑와 김종직에게 文忠이란 시호를 올렸다고 하여 형벌을 받은 李黿(?∼1504)이 있었다. 이원은 이제현의 7대손이며 박팽년의 외손이었다. 이들은 옛 동지를 만나고 인근의 사족과 교류하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원은 유배에서 돌아온 朴權의 당부를 받고 그의 부친 박성건이 조성한 間竹亭의 記文을 적었는데, “窮達로 마음을 바꾸지 않고 富貴로 志操를 둘로 하지 않는 것이 선조의 舊址를 새롭게 하는 뜻이다” 하였다. 또한 이주는 연산군 8년(1502) 승려와 함께 진도 금골산의 토굴에서 생활하였는데, “헤아릴 수 없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으니 천명을 안다는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고 권유한 박권과 최형한의 편지를 받고 하산한 적이 있었다. 이때 최형한은 영암군수로 있었다. 이렇듯 나주와 영암 그리고 진도에 있으면서도 이들은 서로 소식을 알고 지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순천의 적객 김굉필과 조위의 생활은 대조적이었다. 조위는 부로와 어울리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편하게 지냈지만 김굉필은 간혹 배회할 뿐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김굉필에게 柳桂隣, 柳孟權 등이 執贄하였고 광양의 崔山斗가 私淑하였다. 최부의 제자이며 사위이기도 한 유계린은 최부와 김굉필의 학문을 柳成春ㆍ希春 두 아들에게 전수하였고, 최산두은 김인후와 유희춘 등을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甲子士禍 때에 참살을 당하였다. 당시 전라도에 유배를 왔던 金宏弼ㆍ李黿ㆍ李冑 등도 같은 운명이었다. 朴權은 해남관아의 종이 되는 형벌을 받았으며, 무오사화 때에 무사하여 영암 군수를 지내면서 ‘公廉勤謹’으로 민업을 안정시킨 치적을 올린 최형한은 폐정을 직간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세상을 떠났다.
4. 16세기 초반 개혁정치와 호남사림
중종반정(1506.9.2) 전야 전라도 정세는 긴박하였다. 전라도사 朴祥(1474∼1530)은 제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것을 믿고 패악을 저지른 牛夫里를 장살하고, 옥과현감 金漑 등은 전라도의 謫客인 李顆ㆍ金駿孫 등과 반정을 위하여 군사를 모았다. 박상은 광주, 김개는 장성 출신이었다.
중종반정은 ‘인심이 떠나면 국왕을 교체할 수 있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산군 치세의 학정에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연산군의 친위세력까지 가담한 일종의 궁정쿠데타였다. 처음부터 인적 청산을 거부하였다. 다만 任士洪과 연산군의 처남인 愼守勤(1450∼1506)을 처단하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신수근의 딸로 중종의 糟糠之妻인 愼氏의 왕비 책봉을 거부하였다. 중종으로 하여금 부부의 도리를 저버리게 한 셈이었다.
또한 반정공신은 중국에 보내는 奏文을 ‘왕이 병환과 세자의 죽음으로 禪位하였다’는 식으로 꾸몄다. 중종의 즉위 명분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소매 속 공신’을 양산하였다. ‘반정은 정당하나 공신은 잘못이다’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반정 6개월 후 ‘朴耕ㆍ金公著 옥사’는 그러한 여파였다. 두 사람이 조야의 친분 있는 중신들을 만나 朴元宗과 柳子光의 퇴진여론을 조장하다가 ‘謀逆’으로 처단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진사림은 좀처럼 정국에 나설 수 없었다. 중종 10년(1515) 가을 박상ㆍ金淨(1486∼1521)의 ‘愼氏復位疏’로 정국은 일변하였다. 훗날의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세상을 떠난 章敬王后의 곤위를 폐출된 신씨로 하여금 잇게 하자는 실로 파격적인 상소는 국왕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함과 동시에 신씨 폐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공신들의 퇴진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두 사람은 유배를 갔다.
이를 계기로 신진사림이 전면 언론 三司에 포진하였다. 趙光祖(1482∼1519)를 비롯하여 李耔(1480∼1533)ㆍ金安國(1478∼1543)ㆍ金湜(1482∼1520)ㆍ李延慶(1484∼1548)ㆍ金正國(1485∼1541)ㆍ金絿(1488∼1534)ㆍ奇遵(1492∼1521) 등이 세력을 이루었다. 이른바 己卯士林의 등장이었다. 이들의 변통노선은 훈구파의 개량노선과 충돌하고, 이 틈새에서 왕실과 연결된 수구파 공신의 반격을 당하였으니 바로 기묘사화였다. 그리고 2년 후에는 辛巳誣獄(1521.9)이 있었다.
이러한 개혁과 사화의 정국에서 崔山斗(광양, 1483∼1536) 梁彭孫(능주, 1488∼1545) 柳成春(해남, 1495~1522) 尹衢(해남, 1495∼1549) 등이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중종 10년(1515) 5월 弘文錄에 선발된 최산두는 조광조, 김정 등과 ‘洛中君子會’에서 만났으며, 기준, 양팽손, 朴世熹와 함께 ‘己卯四學士’의 호칭을 얻었으며, 性理大全을 강독할 26인 중에 들기도 하였다. 특히 乙巴素(?∼203)의 예를 들며 재상은 위계에 따라 의망하지 말고 초빙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귀족을 억제하고 진대법을 추진한 을파소와 같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재상을 바랐던 것이다.
일찍이 용인의 조광조를 찾아 ‘芝蘭之交’를 맺은 양팽손은 ‘재용 절감과 긴축으로 공물을 蠲減하여 백성에게 실질적 혜택을 주자’고 주장하였으며, 유성춘은 楮貨法을 申明하고 내수사 長利 금지를 주장하고, ‘재물은 한 곳에 모여 있게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제기하며 균전실시를 주장하였다. 토지소유의 한계를 정하자는 限田論보다 철저한 토지개혁론이었다.
기묘사화 이후 민심은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기묘사림은 절망하지 않았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위한 사우를 짓고 제사를 잊지 않았으며, 유배지의 동지를 찾았다. 동복의 최산두, 장흥의 신잠 등에는 자주 갔으며, 金絿를 찾아 남해까지 간 적이 있었다. 동복의 최산두는 적벽에서 인근의 자제를 가르쳤는데, 이때 김인후와 유희춘이 찾아와 배웠다. 한편 기묘사림은 ‘詩社會’를 가졌다. 박상, 최산두, 신잠, 유성춘, 윤구 등이 시를 앞세워 모였던 것이다. 주로 장흥 가지산의 보림사와 강진 白蓮社 등지가 주요 회합장소로 활용되었는데, 林億齡(1496∼1568)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박상은 16년(1521) 가을부터 3년 이상 충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인근의 기묘사림인 金世弼(1473∼1533), 이자, 김안국 등의 학문과 교육활동을 후원하였으며, 자신도 東國史略을 편찬하고 이자와 함께 김시습의 시문을 엮었다. 특히 김세필과는 양명학의 본질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송순ㆍ임억령 등을 가르친 박상은 은퇴에 즈음하여 김인후(1510∼1560)를 받아들였으며, 마지막 임지인 나주에서는 羅世纘(1498∼1551)에게 기묘사화의 참상을 전하며 깊은 영향을 끼쳤다.
5. 16세기 중반 호남 사림의 공부와 진출
중종 치세 중반 심정이나 김안로와 같은 권신이 정권을 요리하던 시절 사림파는 성리대전 근사록 심경 자치통감등을 연구하며 시대를 돌파하고자 하였으며, 기묘사림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한편 시문을 통하여 시대를 비판하고 민생의 안정을 염원하였다. 이 시기 송순ㆍ임억령ㆍ나세찬ㆍ이항(1499~1576)ㆍ임형수(1504~1547)ㆍ김인후ㆍ유희춘ㆍ丁熿(1512~1560) 등이 존재를 드러냈다.
중종 32년(1537) 金安老의 패사 이후 이들은 신원되지 않는 조광조, 김식, 김정, 기준 등의 완전 복권을 주장하는 한편 기묘사림이 추진하였던 소학 및 향약의 보급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기묘핵심사림을 불신하였던 중종이 반대하고 大尹ㆍ小尹의 외척의 갈등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수용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사림파는 다시 한 번 시련을 당하였다. 문정왕후와 尹元衡 등이 대윤 일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사화를 일으킨 것이다. 인종의 외척인 대윤 일파가 명종이 아닌 다른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는 ‘擇賢’의 누명을 뒤집어씌우면서 시작된 乙巳士禍는 외척과 권신을 비판하는 일체의 정치행동을 억압하며 몇 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러한 시기 호남에서는 임형수가 사약을 받았으며, 정황과 유희춘 등이 유배를 갔다.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이 일어나면서 재야의 선비들은 권신정치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겨울 조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면서 올린 “국사는 이미 그르쳤고 근본은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가버리고 인심도 이미 떠났으니 慈殿은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유충한 전하는 선왕의 외로운 後嗣이다”는 상소는 신호탄이었다.
이듬해 5월에는 무장의 유생 安瑞順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으니 천재지변이 계속되고 왜변까지 일어난다’ 하면서 ‘을사년에 선비가 화를 당하고 女主에게 나라의 권한이 돌아가서 외척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이전에도 안서순은 민생의 곤궁과 유리걸식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에게 올리기도 하였고, 승려 普雨를 처단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이때 김인후는 배후의 혐의를 받았다. 사실 안서순의 상소는 김인후의 제자인 卞成溫의 손을 거쳤던 것이다.
이 시기 사림은 일종의 결사와 같은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서경덕의 문인이 결집한 花潭學派에 이어 이황의 退溪學派, 조식의 南冥學派가 성립한 것이다. 호남에서는 김인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인의 이항이 一齋學派를 이루기도 하였지만, 이황과 조식을 찾았던 젊은 선비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 학단은 지방에 근거를 두었던 만큼 둔 학단은 ‘지방의 학문화’와 ‘학문의 지방화’를 촉진하였다는 의의가 있었다.
이들 학파는 종장에 따라 학풍과 처세관에서 차이가 있었다. 퇴계학파가 주자를 墨守하는 주자성리학 위주였다면 다른 학파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지만 천문․지리․병법․의술 등에도 깊이 파고들어 博學과 會通의 특징을 보였다. 또한 處世觀에서는 퇴계학파가 ‘難進易退’의 출처를 보여준 이황을 모범으로 하였다고 한다면 남명학파는 은둔과 처사의 길을 고집한 조식을 따라 ‘士尊官卑論’에 투철하였다. 퇴계학파에 비하면 재야 본위의 처세관을 견지한 것이다. 이렇듯 지역이 다르고 학풍과 처세관은 차이가 있었지만 인정(仁政)과 왕도정치에의 신념, 또한 학술과 정치가 일관하여야 한다는 바람은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이황과 기대승의 왕복서간은 ‘新風’의 의미가 있었다. 즉 학술논쟁의 분수령이기도 하였지만 사림에게 ‘공론의 장’을 제공하였던 의의가 있었다. 조식이 두 사람의 논쟁을 ‘賣名心의 발로이며 欺世盜名目’으로 혹평하였지만, 대부분 사림은 ‘학술의 힘이 어두운 시대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선언’으로 읽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진사림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호남에서는 朴淳(1523~1589)ㆍ奇大升(1527~1572)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박순은 명종 11년(1556) 부마의 밀수품을 압수하기도 하고, 명종 16년(1561)에 ‘衛社功臣’ 林百齡의 시호를 지으면서 공훈을 폄하하여 문외출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기대승은 윤원형과 세력을 다투었던 인순왕후 외숙인 李樑(1519~1563)의 전횡에 저항하다가 ‘신진사림의 영수’로 지목되어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림관료의 활동은 조정에 국한되지 않았다. 재야유생과의 연계의 경향을 분명히 하였다. 명종 22년(1565) 여름 척신정치의 종식은 대사간 박순의 윤원형 탄핵이 신호탄이었지만 조정만의 공론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재야 유생의 공론이 가세하면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척신정치의 종식은 朝野連帶 공론의 성과였던 것이다.
6. 16세기 후반 붕당정치와 호남사림
척신정치가 종식되면서 구악을 청산하자는 新政의 기운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선조 즉위 후에도 이런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윤원형 등의 척신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의 실정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원로중신이 소극적이었다. 성운ㆍ이황ㆍ이항 등 원로사림이 초치되고 을사피화인으로 노수신ㆍ유희춘이 복직하였지만, 이들의 활동공간은 극히 좁았으며, 鄭澈(1536~1593)ㆍ李珥(1536~1584)ㆍ金孝元(1532∼1590)ㆍ李山海(1539∼1609)ㆍ柳成龍(1542∼1607) 등 신진사림은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 박순과 기대승이 원로사림과 신진사림의 소통을 위하여 일정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박순은 원로사림에 합당한 대우를 주장하였으며, 기대승은 을사피화인의 特差를 실현시켰다.
그런데 원로중신과 신진관료는 처음부터 소통이 힘들었다. 구폐의 일소문제 만이 아니라 을사사화에 대한 인식과 기묘사림을 보는 시각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신진사림은 李俊慶(1499∼1572)ㆍ權轍(1503∼1578)ㆍ洪暹(1504∼1585) 등의 원로중신을 ‘舊臣’으로 지목하여 공격하였다. 이른바 ‘新舊葛藤’, ‘老少黨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알력은 원로중신 측에서 박순과 기대승, 정철 등을 ‘小己卯’로 지목하고, 이황을 배후로 삼으려고 하였던 기미가 폭로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선조 2년(1569) 7월이었다. 이때 원로중신에 대한 공세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기대승이었다. 그리고 박순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士林宰相’의 출현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 사림의 분열은 이조전랑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을 알력이 기폭제가 되었지만, 선조 즉위 이후에 조정에 들어온 金宇顒(1540∼1603), 金誠一(1538∼1593), 李潑(1544~1589) 등이 그동안 신정의 성과가 미미한 데에 따른 선배사림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였다.
또한 어떤 정책을 먼저 시행할 것인가, 구체적 실용적 개혁인가 아니면 근본주의 개혁 이를테면 향약을 먼저 실시하자는 교화정책이 중요한가 하는 정책론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외척 등에 배타적이고, 임금을 바라보는 태도도 임금이 바뀌어야 하며 ‘임금을 바로 잡자[格君]’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관직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지방의 處士型 사림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비하여 임금을 끌어들이자[引君], 임금의 마음을 돌리자[回天]는 입장, 그러자면 외척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일찍 심의겸과 연계가 있었던 선배사림이 여기에 많았다.
이런 와중에서 敎民을 중시하고 외척의 배제를 주장하는 後輩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한 동인이 되었고, 養民과 외척과의 공존에 방점을 찍을 前輩사림은 심의겸에 동조하며 서인을 표방하였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학파에 따른 학풍과 처세관의 차이나 그리고 출신 지역이 개재되었다. 동인은 대체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와 연계되어 있었는데, 남명학파 계열이 외척에 대하여 완강하게 반대하고 또한 근본주의 성향이 보다 강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학파와 거리가 있던 서인은 이이ㆍ성혼의 栗谷ㆍ牛溪學派가 가세하며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흔히 붕당은 식민사학이 제창하고 우리 지식인도 맹목적으로 따랐던 ‘붕당망국론’의 틀에서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붕당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勢道政治 때문에 조선국가가 망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붕당은 정국이 일방의 독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상호 견제와 균형의 장치이며 비판과 경쟁의 公論場이며 輿論網이었다. 외척권신이 정권을 천단하던 시기에 비하여 왕권이 안정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새로운 인재를 중앙정계로 끌어들이는 輸血路 역할도 하였다. 그만큼 중앙과 지방의 소통도 활발해졌고 조정과 임금의 동향은 전국적 여론을 탔다. 이런 점에서 붕당은 임금을 견인하며 외척권신의 출현을 차단하는 공론정치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호남은 당시 붕당의 진원지와 같았다. 이발과 정철이 외척관계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을 보였으며, 학문과 사습문제로 정철과 鄭介淸(1529∼1590)이 대립하고 정개청은 金千鎰(1537~1593)과 갈등하였다. 특히 정개청은 「東漢節義晉宋淸談說」이라는 논설에서 ‘호남의 士習이 의리를 따르지 않고 절의에 의탁하면서 名敎에 몽매하고 혹은 청담을 본받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利祿을 밝힌다’ 하면서 정철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결국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일파만파로 번진 기축옥사에서 동인계 호남사림은 혹독한 피해를 당하였는데 이발ㆍ李洁(1547∼1589) 형제와 정개청ㆍ柳夢井ㆍ曺大中(1549∼1590)ㆍ白惟讓(1530~1589) 등은 정철과의 악연으로 희생을 당하였다. 붕당정치의 미숙성이 빚어낸 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권을 견제하려는 사상이 호남사림을 중심으로 보다 격렬하게 표출되었는데, 이에 대한 선조의 정치적 계산 또한 간과할 수 없다.
7. 임진왜란과 호남의병
선조 25년(1592) 4월 14일 일본군이 침공하여 순식간에 도성에 닿았으니 5월 초였다.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옥포에서 승리를 일궈냈다. 5월 7일,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다. 이어 7월 초순에 한산대첩을 이끌고 9월 초순에는 일본 수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로서 제해권은 온전히 조선 수군이 장악하였다.
이순신이 해상에서 연전연승하는 동안 호남 각처에서 의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김천일은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아 북상하였다. 高敬命은 옥과의 柳彭老(1564~1592), 남원의 梁大樸(1544~1592)의 추대로 맹주가 되어 담양에서 창의를 선포하였다. 각처의 사족이 함께 하였다. 순창의 楊士衡(1547∼1599)도 참가하였다. 호남회맹군은 5월 25일에 거병하여 6월 초에 북상을 시작, 6월 25일에 금산 근처에 도착하였다.
호남을 지키기 위한 공동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광주목사 權栗(1537∼1599)과 동복현감 黃進(1550∼1593)은 금산 서편의 梨峙(배재)에 진을 치고 다른 관군과 의병은 금산 남쪽 남원 방면의 熊峙(곰재)에 군사를 모아 전주를 지키고자 하였다. 호남회맹군이 금산의 일본군을 앞장에서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7월 9일이었다. 8월 초에는 趙憲(1544∼1592)ㆍ靈圭(?∼1592) 부대가 다시 금산으로 군사를 몰았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두 차례의 금산전투로 인하여 관군은 전력을 보강할 시간을 벌었고 이후 이치와 웅치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와 충청우도가 보존되었다.
전라도에서 금산전투의 복수를 위한 의병이 일어났다. 전라우도는 崔慶會(1536∼1593)가 맹주였으며 좌도는 朴光前(1526∼1597)ㆍ文緯世(1534~1600)ㆍ任啓英(1528∼1597)이 주창하였다. 호남의병은 영남의병과 힘을 합하여 진주성을 지키고 이어 경상도 서부 일대를 회복하였다. 1592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였다.
이후 전선은 한양 부근으로 옮겨졌다. 한양수복전이 벌어진 것이다. 선조 26년(1593) 4월 ? 양이 수복되면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재차 진주성으로 집결하였다. 임진전란 중사상자가 가장 많았다고 하는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해 6월 하순이었다. 이때 진주성 사수를 주창하여 산화한 인사들이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이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하였지만 엄청난 손실을 입어 전라도를 넘보지는 못하였다.
선조 26년(1593) 7월 이순신은 통제영을 여수에서 통영으로 옮겼다. 영남 연안의 적이 바다로 나와 일본 본토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때 영암 학산의 玄德信에게 편지를 보냈다.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던 현덕신은 진도군수로 부임하면서 찾아와 친교를 맺은 이순신의 군진에 여러 차례 물자를 보내서 도왔었다. 여기에 “호남이 국가를 보장하였으니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순신은 막하에 羅大用(1556∼1612)이라는 당대 최고의 조선기술자를 군관으로 두고 거북선을 창제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나대용은 나주출신이었다. 이순신이 우수영에서 군사를 조련할 뿐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에 신중하였을 때 녹도만호 鄭運(1543∼1592)은 이렇게 말하였다. “영남이 이미 적에게 함락되었으니 영남도 우리나라 땅이요 호남도 우리나라 땅입니다. 어찌 越나라가 秦나라 패한 것을 보듯 할 수 있습니까? 울타리 밖의 적은 막기가 쉽고 울타리 안의 적은 막기가 어려운 것이니 지금 왜적이 아직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이때에 급히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여 한편으로 호남을 지키고 한편으로 영남을 구하여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머뭇거리며 앞 바다만을 방어하려는 계책에만 골몰하시어 여러 진의 군사를 이렇게 헛되이 머물게 하며 시일을 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에 이순신은 ‘녹도만호의 말이 옳다. 녹도만호가 아니었으면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다’고 하고 출전하여 비로소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운이 선조 25년(1592) 9월 부산해전에서 전사하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국가가 오른팔을 잃었구나!” 정운은 영암 출신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金德齡(1568~1596)이 의병을 통솔하였다. 1594년 1월부터였다. 그러나 전공을 세울 기회는 거의 없었다. 강화교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김덕령은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의 연루되었다는 무함을 당하여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이야 끌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 끌 물 없어 하노라”라는 시를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훗날 송사 기우만은 한말 의병이 깊은 시름 속에서 거듭 초야에 묻혀가던 1909년 호남의사열전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호남은 예로부터 충의의 고장이다. 임진왜란에 금산에서 순국한 이는 어디 사람이며,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이는 어디 사람인가 … 산천의 빼어난 기운이 모이고 선현이 남긴 교화가 점차로 배어나 이리 된 것이다. 임진왜란에는 종묘사직이 거의 빈터가 될 뻔했는데 마침내 회복된 것은 諸公의 순국한 힘이 아닌 것이 없다.”
조선후기 하서 김인후의 현창활동
이해준(공주대 역사학과 교수)
1. 머리말
본고는 河西 金麟厚(1510∼1560)의 생애와 그의 학통이 지니는 역사적 성격을 부각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즉 필자는 河西 金麟厚의 학문, 사상적인 의미를 보다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또 다른 두 측면의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그것은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시각으로 첫째는 河西 金麟厚가 생존했던 당 시대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河西가 차지하는 비중을 검토하는 것이고, 둘째는 후대의 河西에 대한 인식과 그 영향을 검토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본고에서 첫째의 문제를 주로 호남사림의 학맥, 성격과 河西의 위상에 초점을 둘 생각이며, 아울러 장성지역의 사림분위기와 울산김씨 가문과의 관계를 살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둘째 후대의 河西인식과 영향검토는 실상 거의 미답의 상태라고 할 수 있어 장성 및 호남지역의 사림활동과 연계하여 이해되는 書院의 건립과 운영, 文廟配享, 文集刊行 등 後代 追崇의 면모를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2. 16세기 全般의 湖南學脈과 河西
필자는 기묘사화를 전후한 16세기 전반의 호남학맥을 정리하는 기회에, 아직도 조선전기 호남출신 사림파 인물들의 활동상과 그 수적인 배출의 의미는 관념적으로만 강조될뿐 본격적 연구가 많지 않은 실정을 지적한 바 있다. 본고가 중심과제로 삼고 있는 河西 金麟厚(1510∼1560)의 생존 시기는 바로 이 같은 연구의 현황이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생애시기가 바로 호남사림의 최융성기의 바로 직전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고, 그의 학문과 사상이 남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만큼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이후 괄목할 활동을 보이는 호남사림의 동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그의 학풍이나 사상은 바로 호남사림의 전체적인 성향이나 학맥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파악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조선전기 신진사류들은 정치권력의 명분을 유교논리 안에서 찾았으며, 그들의 현실인식도 역시 유교적 규범 논리에 준거하였다. 그중에서 道學과 義理를 중시하는 전통은 조선전기 사림의 기본 德目이자 實踐論理로 확립되어 갔다. 이같은 의리실천의 문제가 가장 높아진 것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死六臣의 도전이나, 1498년의 무오사화, 廢妃 尹씨와 연루된 1504년의 갑자사화, 그리고 1519년의 己卯士禍 등에서 구체화되었다.
특히 世祖의 세습도 선양도 아닌 王位簒奪이라는 사건을 성리학자들은 불의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고, 이같은 불의에 항거한 인물들이 바로 사육신과 생육신이었다. 물론 世祖의 찬탈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인물들이 제거되고, 뒤이은 무오ㆍ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세력의 논리와 명분은 왕권과 결탁된 훈구 집권세력에 의하여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명분과 사회적인 입지를 새롭게 인정받게 해준 사건이 바로 1506년의 中宗反正이었다. 연산군의 방탕과 폐정에 종지부를 찍은 중종반정이후 이러한 논리는 당시 사림파의 정신적 영수인 靜庵 趙光祖(1482∼1519)이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더욱 고양되었고, 호남의 인맥도 사실은 이러한 분위기와 연계하여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전기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호남지방의 사림계 인사들 대부분은 출신 성분상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신왕조 개창 이후 정치적 파동기에 節義를 고집했거나 이 건국기의 政爭에 연루된 士大夫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문의 정치적인 배경으로 그들의 선조들은 박해를 피하여 중앙으로부터 멀리 호남지역으로 落南해왔던 것이다. 그들이 전라도를 落南의 대상지로 택한 것은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政禍가 쉽게 미쳐오지 않을 곳이면서,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隱遁의 最適地로 판단하였던 때문으로 보인다. 이 지방을 政亂의 피난처나 은둔지로 택한 落南의 경향은 세조의 왕위찬탈사건 때 그 절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유명 가문의 조선전기 入鄕事跡을 추적하면 자명해 지며, 실상 이 시기의 사림형성도 이들 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節義派 인물의 호남지방 은거현상은 이후 연산군 때의 사화기에도 계속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사림파 인물의 영수였던 金宏弼의 順天 流配를 비롯한 金安國의 전라관찰사 부임같은 사실도 이 지역의 사림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金宏弼은 순천 유배 중에 문인으로 李勣(광주), 崔忠成(영암), 尹信(광주?), 柳桂隣(해남), 孟權(순천) 등을 배출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사림계 중추적 인물이었던 金安國의 전라도 관찰사 부임, 金宗直의 문인인 崔溥의 나주 해남 광주에서의 활동, 鄭汝昌의 인척이면서 문인이기도 했던 鄭汝諧가 능주에 海望壇을 건립하고 무오사화 인물들을 祭享했던 것은 뒤이은 시기의 사림활동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연산군의 몰락은 그 동안 억눌려 지내던 각 지방의 사림을 자극하여 다투어 중앙에 진출케 한 기폭제가 되었지만, 특히 호남지방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데에는 또 하나의 요인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연산군 집정기에 朴元宗 등의 반정계획이 중앙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그와 때를 같이하여 전라도에서도 독자적인 거사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이어 昭陵復位문제도 호남의 인맥과 연결 이해될 부분이다. 昭陵의 복위문제는 중종 7년 호남출신 經筵檢討官 蘇世讓의 주장에 의해 새로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昭陵의 복위 주장은 世祖의 왕위찬탈과 거기에 동조했던 훈구파에 대한 도전과 다름 없었다. 이 문제는 약 5개월간에 걸친 논쟁 끝에 마침내 復位의 傳敎가 내림으로서 사림파의 뜻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昭陵復位문제보다 중앙정계에 더욱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4년 뒤에 있은 己卯士禍의 禍因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바로 중종 10년에 일어난 愼妃復位疏 사건이었다. 전라도 순창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潭陽府使 朴祥, 淳昌郡守 金淨, 務安縣監 柳沃에 의해 이루어지고, 朴祥과 金淨의 이름으로 올린 상소사건이었다. 내용적으로 보면 愼妃復位疏는 단순히 愼妃의 복위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3공신의 정치세력을 구축하려는 사림들의 정치운동의 전초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 상소로 朴祥은 남평으로, 金淨은 보은으로 유배된다.
주지하듯이 이 사건은 己卯士禍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고, 조선조 도학정치 사림정치의 전통을 자리매김하게 하였던 것이다. 뒤이어 賢良科(중종 13년)가 실시되는 것이나 偉勳削除 운동에 이은 己卯士禍(중종 14, 1519)가 이 愼妃復位疏에 이어 朝臣間의 핵심적인 정치논의와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같이 기묘사화를 전후한 시기에 활약했던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사림들은 바로 河西 金麟厚(1510∼1560)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선배이자 함께 활동한 동료들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崔溥(1454∼1504)ㆍ宋欽(1459∼1547)ㆍ朴祥(1474∼1530)ㆍ朴祐(1476∼1547)ㆍ尹孝貞(1476∼1543)ㆍ高雲(1479∼1550)ㆍ梁彭孫(1480∼1545)ㆍ崔山斗(1483∼1535)ㆍ奇遵(1492∼1521)ㆍ宋純(1493∼1583)ㆍ尹衢(1495∼1549)ㆍ林億齡(1496∼1568)ㆍ吳謙(1496∼1582)ㆍ羅世纘(1498∼1551)ㆍ梁山甫(1503∼1557)ㆍ林亨秀(1504∼1547) 등이 바로 그러한 이들이었다.
나아가 그와 동시대를 살거나 교유하면서 호남사림 문화의 꽃을 피운 후배인물들은 더욱 기라성 같다. 柳成春과 柳希春(1513∼1577)ㆍ李後白(1520∼1578)ㆍ李長榮(1521∼1589)ㆍ朴淳(1523∼1589)ㆍ梁子澂(1523∼1594)ㆍ朴光前(1526∼1597)ㆍ朴光玉(1526∼1593)ㆍ奇大升(1527∼1572)ㆍ鄭介淸(1529∼1590)ㆍ崔慶會(1532∼1593)ㆍ高敬命(1533∼1592)ㆍ鄭澈(1536∼1593)ㆍ金千鎰(1537∼1593)ㆍ白光勳(1537∼1582)ㆍ崔慶昌(1539∼1583)ㆍ李潑(1544∼1589)ㆍ曺大中(1549∼1590)ㆍ林悌(1549∼1587) 등은 비록 후대에 이르러 당색의 분기와 학맥에 따라 구분, 대비되기는 하지만 당 시대에는 같은 목표와 경향을 가진 동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같은 호남인물의 집중적인 배출을 朴世采는 林億齡의 墓表에서 ‘중종∼명종대에 이르러 호남에서 名賢逸士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고 洪奭周가 호남이 인재의 淵藪로서 조선중엽에 특히 그 수가 많았다고 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호남사정에 비교적 밝았던 許筠(1569∼1618) 역시 중종시대 호남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朴祥 朴佑 형제로부터 崔山斗ㆍ柳成春, 希春 형제ㆍ梁彭孫ㆍ나세찬ㆍ임형수ㆍ金麟厚ㆍ林億齡ㆍ宋純ㆍ오겸 등과 함께 朴淳ㆍ李恒ㆍ양응정ㆍ奇大升을 지적했던 것도 그 같은 상황과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호남을 일컬어 ‘곡창이자 인물의 부고’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이 지목되는 인물들 때문이었다.
3. 長城의 蔚山金氏와 河西 金麟厚
이상에서 간략히 살핀 것처럼 河西 金麟厚의 시대는 河西와 같은 도학자와 사상가가 배출뙬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 시기였고, 한편에서 보면 이같은 분위기를 이끌었던 중심인물로써 그가 호남지역의 학맥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면 본 절에서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河西를 배출한 장성지역의 분위기와 울산김씨 가문의 문제와 연결시켜 살펴보기로 하자.
장성지역은 ‘湖南八不如’ 중 ‘文不如長城’이라 칭하여졌고,『東國輿地志』長城都護府, 風俗條에 ‘士尙文學’이라고 하듯 사족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다. 이 같은 평의 배경은 역시 호남출신인물로는 유일하게 文廟에 배향되어 있는 河西 金麟厚(1510∼1560)가 끼친 영향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과 성가는 물론이고, 그를 配享한 筆岩書院이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세력으로 君臨한 것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河西 金麟厚의 시대가 끼친 영향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이 지역의 사족들이 일련의 역사적 경험속에서 축적하여 온 결과이기도 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河西 金麟厚가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과, 동시에 河西의 후대에 河西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활동하는 모습을 통하여 그같은 결과가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울산김씨의 위상은 조선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잇을 것인데, 전기는 주로 入鄕의 과정과 河西 金麟厚로 대표되는 사족배출을 통하여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이래 서울에 기반을 가졌던 蔚山金氏가 장성에 처음으로 입향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中始祖 金穩(1348∼1413)의 아들대에 이르러서 이다. 金穩은 부인이 驪興閔氏로 太宗과는 사촌동서 간이었다. 그리하여 金穩은 건국에 일조 하기도 하였으나 태종의 처남인 閔無咎와 閔無疾의 옥사와 관련되어 화를 입게 된다. 이로 인해 그의 부인과 세아들 達根, 達源, 達枝가 落南하여 장성으로 들어왔던 것이며 그 시기는 1413년 이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울산김씨는 이들 3형제의 계파가 후에 다시 거처를 옮겼는데, 長子 達根系는 그의 아들 代에 이르러 咸安과 咸平으로 이거하였고, 次子 達源系는 河西 金麟厚(1510∼1560)로 대표되는 집안으로 초기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다가 金麟厚대에 이르러 가서야 그 활동상이 나타난다. 三子 達枝系는 그의 孫인 俊이 珍原 水流村으로 이거, 이로써 진원 세거가 시작되었다.
이중 초기에는 3자인 達枝系가 가장 먼저 士族적 기반을 다져 그의 子 處리를 비롯하여 俊·應斗·百鈞兄弟·震秋 등 5대가 연이어 生進試에 합격하였다. 특히 金應斗(1492∼1552)는 1522년 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校理·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는데 그는 후일 조카 되는 河西의 중앙 진출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전기의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울산김씨들의 사족적인 진출은 다른 姓氏들에 비하여 매우 활발하였던 것 같다. 조선전기 사족적인 활동상의 지표로써 장성지역 조선전기 각 성씨별 生員進士 및 文科及第者의 배출 수를 보면, 울산김씨가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성지방은 金麟厚와 같은 명현을 배출한 이래 유교적 의리나 士風이 크게 진작되어 있었다. 특히 장성지방은 東西分黨이래 黨派에 따른 첨예한 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도 주로 西人系의 성향이 일방화하여 커다란 파란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는 1589년(선조 22) 己丑獄에서 호남의 각 지역 사림들이 편당을 나누어 고변과 피화자의 분기를 이루었을 때에도 장성지역 사림들은 주로 서인계측에 좌정하여 黨禍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임란으로 전란의 피해는 매우 커서 많은 인명 및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다. 즉 사족들 자신의 사망과 피해, 田畓과 農民의 流散, 官의 횡포 등은 향촌질서를 극도로 문란케 하였다. 특히 장성지역의 피폐함과 문란함의 정도는 장성, 진원현의 실정을 보고한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결과 복구책의 하나로 양현의 父老들은 1600년(선조 33) 양현의 합현을 조정에 청하게 되었다. 즉 양현 모두 피폐하여 자립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합현의 과정에서 향촌 운영 주도권에 관련된 불협화가 없을 수 없었으니, 邑治所와 鄕校의 건립 위치를 둘러싼 마찰이 바로 그것이었다. 본래 長城縣의 治所는 현재의 北一面 鰲山里이고, 珍原縣의 治所는 현재의 珍原面 珍原里였다. 1600년 양현의 합현은 새로이 邑治所를 정하여야 했는데 이의 지정을 두고 서로 자기 縣에 두고자 하였다. 이는 결국 논란 끝에 양현의 舊地에서 20里씩 나온 경계되는 지점에 두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邑治所는 현재의 長城邑 鈴泉里로, 鄕校는 현재의 長城邑 長安里 長者洞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양현 간의 세력다툼은 治所와 鄕校를 서로 다른 곳에 두어 鄕校는 장성현 구역으로, 治所는 진원현 구역으로 하여 勢力處를 균등하게 나누는 형태로 타협되었다.
이와 같이 임란이후 향촌질서의 재획립은 양현의 합현과 함께 또 다른 해결책의 제시로서 1606년(선조 39) 鄕約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장성지방에서의 향약의 시행은 양현의 합현에 따른 부작용의 해결이라는 측면도 크게 작용하여 이루어졌다. 본래 향약은 장성현 지역에서 1586년(선조19) 시행된 것이 처음으로, 임란으로 중간에 손실되어 1606년(선조 39) 增損을 거쳐 <鄕憲> 20條로 완성하여 재시행 되었다.
이 같은 장성지방에서의 향약의 시행은 金麟厚 이래 이에 영향 받은 門人들의 시행 노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일찌기 金麟厚는 중앙에서 활동할 때인 中宗 38년(1543) 왕에게 小學과 鄕約書의 보급·시행을 주청한 적이 있으며, 낙향 이후에는 제자들에게 강학할 때 꼭 小學을 먼저 읽고서 大本을 세운 뒤에 다른 책을 읽도록 권하였다. 이는 바로 『小學』 속에 呂氏鄕約의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呂氏鄕約에 대한 관심이 그의 문인들에게 이어졌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1586년(선조 29) 장성지방에서도 향약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金麟厚의 이같은 학문적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에서 보는 17세기 이후의 향안 입록 성씨의 숫자는 당시 장성지방 유력성씨의 세력판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울산김씨가 매번 향안추록이 있을 때마다 전체 30여 입록성씨 중 평균 15.3%로 가장 많은 입록수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으로 광산김씨 8.5%, 황주변씨 7.6%, 행주기씨 4.6%의 순이다. 향안 입록에 있어서 울산김씨의 수적인 우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장성지방의 사족학맥은 대체로 牛溪·栗谷에서 宋時烈로 이어지는 西人계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분위기는 중앙에서 老·少分論이 일어나고 여기에 연루되는 신임옥사가 일어남을 계기로 장성지방에서도 당파에 따른 변동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즉, 앞에 소개한 <一鄕契約文> 序文에
(前略) 辛壬年間(1721∼1722년 간의 辛壬士禍)에 이르러 평지에 파란이 갑자기 일어나 (遺風이) 일시에 무너지고 분열하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前後가 서로 반대하고 天地가 뒤바뀌어 徒黨을 나누어 서로 능멸하고 짓밟으며 親疎가 바뀌어 分義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록 親戚 朋友와 같은 가장 친애하는 사람도 당색이 같지 않은 즉 문득 원수가 되어 반드시 우물에 넣어 돌을 떨어뜨리고자 하듯 한다. 본디 疎遠하고 卑賤한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며 일어서 말하길 나와 同色이다 하면 本末을 불문하고 손을 맞잡고 도우며 이로 하여금 자기와 다른 色의 사람을 攻斥한다.
고 한 것은 다소 과장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분위기의 변화를 말해준다. 그리하여 貴賤 親疎를 불문하고 당색에 따라 대립하게 되고, 그 장소는 鄕堂과 鄕校이었다. 서인계의 老·少論 분당과 관련되는 이 시기 장성지방의 黨色구분은 대체로 老論계열은 宋時烈·金壽恒·金昌協 등의 학통을 잇는 문인들이 울산김씨의 金器夏와 그의 子 羲瑞·禹瑞, 致瑞와 그의 子 宅賢, 그리고 奇挺翼(행주), 李實之(광산) 金天心(광산) 등으로 파악된다. 한편 少論계열로는 朴世采·尹拯 등의 학맥을 이은 황주변씨의 邊烋 邊脩·邊攸 등과 致明·致道, 그리고 邊世老(攸와 脩의 父)의 사위인 金會慶과·會英(이상 광산인) 등으로 나타난다.
이중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金麟厚의 후손들인 울산김씨 인물들이 주로 老論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金麟厚의 顯揚事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宋浚吉·宋時烈·金壽恒·金昌協 등 당대 노론 명인들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金麟厚는 당파와는 무관한 전 시기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나 그를 제향한 筆岩書院이 이후 장성을 비롯한 호남 노론세력의 연원 혹은 추존인물, 그리고 그들 세력의 중심 결집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河西의 현양과 추숭활동을 통하여 보여준 장성지방 老論系의 활동과 강한 결집력은 1725년(영조 원년)에 있었던 全羅道 儒生 1200여명이 올린 疏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疏에는 長城人 金宅賢(울산인)을 疏頭로 하여 장성지방의 사족 60∼70 여명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는데 疏頭인 金宅賢은 金麟厚의 5대손으로 그의 祖 鳴夏와 器夏는 宋時烈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이 상소는 당시 全州·南原·羅州·長城·潭陽 등지의 노론계 사림들이 노론의 領首인 宋時烈과 그의 嫡傳이라 일컬어지는 權尙夏를 현양시키고자 한 것으로 宋時烈과 權尙夏를 무고한 자들에 대한 탄핵과 治罪, 그리고 宋時烈을 배향한 井邑 考巖書院을 復額해 줄 것과 礪山 竹林書院에 權尙夏를 追配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시기 조정에서는 1728년(영조 4) 戊申亂의 발생과 이의 진압에 따른 논죄가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는 노론계의 소론계에 대한 억압 구실이 되고 있었다. 이같은 움직임은 결국 비슷한 형태로 지방사회에서도 이루어졌고 곧이어 우위권을 확보한 노론계 인사들에 의한 사후 수습의 화합의 방 안들이 모색되게 되었다. 장성의 경우 이러한 움직임은 鄕員 29명이 1731년 4월 15일 筆岩書院에 모여 蕩平을 도모하자는 통문을 발송하는 것에서 밝혀진다. 한편 이같은 탕평의 목적은 鄕權을 둘러싼 鄕校와 鄕堂에서의 執任 배정에 따른 대립을 해소하여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같은 달 20일에 장성지방 사족들이 鄕校 鄕射堂에 모여 탕평을 이루는데 「不召而來者」가 40∼50人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정의 국면을 노론계가 주도하게 되면서 장성지방의 향론분열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으며, 그것은 노론계 중심 가문인 울산김씨의 사회적 지위 강화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筆巖書院에 대립적이었던 소론계 중심가문의 황주 변씨가 흡수, 포섭되고 더욱이 1796년(정조 20) 河西 金麟厚의 文廟從享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이 지방에서의 더 확고한 노론계의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정의 국면을 노론계가 주도하게 되면서 장성지방의 향론분열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으며, 그것은 노론계 중심 가문인 울산김씨의 사회적 지위 강화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河西라고 하는 대학자를 배출한 울산김씨들의 사족적인 모습은 조선후기 과거급제자 배출에서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조선후기 장성지방 생원진사 배출인원은 총 130명이었는데 그중 생원진사를 배출한 가문은 총 37개 성관이며 그 중 행주기씨, 광산김씨, 울산김씨, 황주변씨 등 이들 4개 특정성씨가 차지하는 인원이 전체 인원 130명 중 79명으로 전체의 61%를 차지한다. 조선후기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면, 먼저 17세기초부터 18세기 전반에는 18개 가문에 47명으로 그 중 울산 김·황주 변·행주 기·광산 김씨의 4개 성씨가 차지하는 인원은 23명으로 전체의 48%이며,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에는 22개 가문에 83명으로 이들 4개 성씨가 차지하는 인원은 56명으로 전체의 67%이다. 또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1∼2명의 생진배출에 그친 성씨가 11개 가문, 14명으로 말기에 이를수록 특정가문으로 생원진사 배출이 집중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중에서 장성의 주요 4개 성씨의 盛衰를 과거를 통하여 파악해 보면, (1)황주 변씨, 광산김씨의 고른 급제자 배출 (2)울산김씨의 1800년 이후 득세 (3)행주 기씨의 1750년대 이후 진출 가속이라는 점이었다. 울산 김씨의 경우는 이시기에 河西의 가계인 達源系에서 집중적인 생원 진사배출이 돋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문과 급제자의 배출추이를 보면 장성지역의 조선후기 문과 급제자 수는 모두 24명으로(조선전기 18명) 가문별로는 역시 생원진사 배출자수와 마찬가지로 울산김씨가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황주 변·행주 기씨 등의 순이다. 그 중 이들 3개 성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66.6%이다.
이제 다음 절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면서 시기별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河西 金麟厚의 현양 추숭활동들을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4. 河西 金麟厚 顯揚活動
河西 金麟厚에 대한 후인들의 추앙활동은 크게 서원의 건립과 賜額, 文集의 간행, 증시, 行狀과 神道碑文의 撰述, 贈諡, 文廟의 配享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년대별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561년 河西 가장 찬술(양자징)
1564년 옥과에 영귀정사 건립, 제향
1568년 文集 초고본 간행(조희문 서)
1569년 순창에 화산사건립, 제향
1590년 筆巖書院 건립
1624년 서원 이건 복설
1658년 전라도 유생 청액상소
1659년 筆巖書院 사액
1662년 현종 어필로 선액(예조정랑 尹衡啓치제, 사제문(申炯 찬)
1668년 이조판서 및 양관대제학 증직
1669년 「文靖」시호 내림(道德博聞曰文 寬樂令終曰靖)
1672년 筆巖書院 현재 위치로 이건
1672년 행장 완성(박세채 찬)
1675년 묘표 완성(김수항 찬)
1682년 신도비명 완성(송시열 찬)
1686년 河西文集 중간(서문 송시열, 발문 박세채)
1771년 전라도 유생 梁學淵 등 文廟배향 상소(불허)
1777년 묘지명 완성(金鍾厚 찬)
1786년 鼓岩 梁子澂, 筆巖書院에 추배
1786년 정조 사제문(좌부승지 朴天行치제)
1786년 8도유생 朴盈源 등 文廟종향 건의(불윤)
1789년 8도유생 沈翼賢 등 文廟종향 건의(불윤)
1790년 8도유생 李岳謙 등 文廟종향 건의(불윤)
1796년 金懋淳, 李明彩, 蔡弘臣, 李奎南, 沈來永, 李光憲, 洪準源 등의 종향 상소
1796년 文廟 배향 결정(정조 사제문, 우부승지 李勉兢 예관치제)
1796년 증직 및 부조묘 허락
1796년 「文正」이라 改諡(道德博聞曰文, 以正服人曰正)
1796년 『河西集(文廟配享時 遺集)』 3차 중간 하교
1802년(순조 2) 『河西集』 3차 간행
1) 筆岩書院의 建立과 賜額
筆岩書院은 장성 유일의 賜額書院이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書院毁撤令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치되어 남은 곳이다. 이는 筆巖書院이 이 지방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金麟厚라는 배향인이 갖는 의미도 크다는 것을 말한다. 金麟厚는 주지하듯이 호남지방 사림의 기풍 진작과 함께 그를 연맥으로하는 사림들이 장성지방에서의 사족 지배질서 확립에 바탕이 되었고 작게는 蔚山金氏家의 장성지방에서의 세력유지에 支柱가 되었다. 그리하여 筆巖書院의 운영은 단순한 河西의 제향이라는 문제외에 사회사상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고, 특히 그 운영에 있어서 17∼18세기 중앙의 정치적 파동과 일정하게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河西에 대한 추숭활동이 본격화되는 것은 1590년 筆巖書院의 건립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河西의 학문과 학행에 대한 추숭의 분위기는 河西 사후 곧바로 시작되고 있었다. 즉 河西가 죽은 뒤 8년만인 1568년(선조 1) 문인들에 의하여 『河西集』(趙希立 編)이 1차 간행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는 자못 후손이나 문인들의 사적인 추숭작업이라 볼 수 있고, 이 단계에서 한단계 진전하여 더욱 적극성을 가진 사회적 활동으로 나타난 것은 역시 서원의 건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筆巖書院의 건립은 河西가 죽은지 30년이 지난 1590년에 직접 훈도를 받은 門人 卞成溫·奇孝諫·邊以中 등의 발의로 府의 서쪽 10里 되는 岐山아래(현.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진다.☞ 26) 물론 河西를 배향한 서원은 이보다 앞선 현감으로 훈화가 있었던 玉果에 1564년(명종19) 세워지는 詠歸亭祠와 만년에 강학하였던 순창에 1569년(선조 3)에 세워지는 華山祠가 있었다. 장성에서의 서원 건립은 여기에 비해서는 다소 늦은 감이 있고 실제로 임란이전의 筆巖書院 사정에 대하여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밝히기가 어렵다. 임란의 극심한 피해는 筆巖書院에도 찾아와 소실되는 운명에 처하였으며, 병란이 지나간 1624년(인조 2)에 이르러서야 서원을 復設할 수 있었다. 이 때에는 甑山아래(현재의 필암리 증산동)로 이건하였는데 移建 上樑文을 쓴 秋潭 金友伋(광산인)을 비롯하여 이 지방 사림들의 노력이 컸다.
서원의 복설이후 이 지방 사림들에 의한 지위 고양을 위한 노력들은 우선 賜額 청원활동을 시발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658년(효종 9) 河西의 門人 吳希吉의 從姪인 吳以翼(吳希道의 子)을 疏頭로 한 전라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이듬해인 1659년 筆岩이라 사액 받았다. 그리하여 1662년에는 현종의 어필로 「筆巖」이라 선액되었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이로써 筆巖書院은 경제력의 확보와 함께 정치세력과의 연계속에서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장성지방은 西人系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金麟厚는 서인계의 추존인물이 되었고 그를 제향한 서원 역시 서인계의 결집처였고, 따라서 賜額을 받는 일 역시 서인계의 비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청액활동과 사액에 이어 서원의 면모를 일신하는 작업이 1672년(현종 13)에 이루어져 마침내 그해 3월 현재의 위치인 筆岩里로 移建하게 된다. 이때의 移建에는 河西의 外玄孫인 李實之(광산인)를 비롯하여 朴升華(밀양인) 奇挺然(행주인) 등이 노력하였으며, 당시 書院掌議 李實之는 院長 宋浚吉에게 서한을 보내 이건을 상의하고 있었다. 여기에 답하여 宋浚吉은 이건문제는 府使와 잘 상의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당시 府使는 金世鼎(1620∼1686)으로 그는 西人系 성향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의 뒤를 이어 부임한 부사 宋時燾(1671.25∼1674. 10.1 재임)는 尤庵 宋時烈의 아우로 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筆巖書院은 移建의 어려운 役事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중앙의 지원과 함께 보여지는 것은 노론계 원장과 원임의 임명을 통한 서원 위상이 강화과정이다. 이 시기 중앙의 명망 있는 관료의 원장임명은 西人系 書院의 한 특징으로 나타난 현상인데, 이들 원장은 명분상의 직책이기는 하지만 같은 黨色의 중앙 고관을 원장으로 택정함으로서 그들이 지원 속에 서원의 정치력과 경제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또 중앙의 위정자들 입장에서도 역시 사림의 공론이 중시되는 당시 정치 풍토 하에서 자파의 유리한 여론조성을 위해서는 지방세력의 포섭이 매우 중요하였고, 자파 黨勢의 부식처로 지방의 서원을 이용하는 경향이었다.
筆巖書院의 원장과 운임의 임명은 이 같은 유기적인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筆巖書院의 歷代 院長들을 보면 宋浚吉(1670∼1672)·兪拓基(1753∼1768)·金元行(1771∼1775)·金履安(1786∼1787)·金鍾秀(1789∼1793)·沈煥之(1802년)·洪直弼(1845∼1852) 등으로 모두 당대의 명망가이자 西人 그 중에서도 老·少論 분당 이후에는 老論系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筆巖書院은 이들 院長 외에도 院貳(1人)·搢紳掌議(1人)·儒林掌議(2人)·色掌(2人) 등의 임원 구성 중 院貳는 관찰사가, 搢紳掌議는 장성이나 광주·담양·부안 등 인근지방의 府使·郡守 등이 맡아 하였는데, 이러한 것 역시 당파적 성향이 같은 官人을 중심으로 官權과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유용하였을 것이다.
2) 河西 略傳의 再整理 : 行狀(墓表)과 神道碑
河西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생애가 지닌 인종의 세자시절 사부였다는 특이함으로, 역사적인 정당한 평가가 일부 불가능한 면이 있었다. 때문에 인종의 의외의 죽음에 뒤이어 왕위를 이은 명종 대에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진행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물론 河西 金麟厚의 行狀 정리는 사실상 그의 사후 사위이자 문인인 고암 梁子澂에 의하여 1561년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행장의 찬술과정을 고암 梁子澂은 家狀의 말미에서 “문인인 鄭澈, 기효간은 선생의 도덕과 조행이 오래되면 민멸의 두려움이 있어 행장을 준비할 때에 나에게 자네는 일찍 선생의 사위가 되어 선생의 동작과 규법을 남다르게 잘 알고 있으며, 빛나는 도덕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으니 家狀의 찬술에 적격인 사람이라 하여 가장을 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에 그가 지은 家狀은 河西의 실제 생전의 모습과 의지를 가장 잘 알고 익힌 梁子澂에 의하여 撰述된 것이라는 점과 함께, 시기적으로도 가장 선행한 河西의 행적과 의미 정리 작업으로 의의가 있다. 특히 이 家狀은 鄭澈이나 기효간 등 제론을 종합하여 河西 金麟厚의 節義를 묘사하고자 하였을 것이나, 시대적인 조건(명종 대)으로 불충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서 이후 약전과 세평의 재정리 작업이 절실하여 지며 이 작업이 바로 河西의 行狀, 墓碣銘, 神道碑銘의 찬술을 통한 현양활동으로 이를 통한 구체적인 재조명과 사회적 인식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은 울산김씨와 河西의 후학들이 東西 分黨過程에서 西人측에 좌정하여 장성의 사족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었던 사정과 관련하여 1590년의 筆巖書院 건립, 그리고 양란이후 향촌사회가 재정비되는 시기인 1624년 서원 의 이건(복설)을 이루어 냈다는 점, 더구나 1659년에는 筆巖書院이 사액을 받는 것에서 일종의 사회적인 지지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과 연계된다. 사액이후 1662년 현종 御筆의 사액판이 하사되고 예조정랑 尹衡啓이 禮官으로 파견되어 치제를 올리게 되며, 곧이어 河西가 1668년 吏曹判書 및 兩館大提學에 贈職된 것은 후학과 후손의 입장에서는 광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이에 이어서 1669년에는 ‘文靖’이라는 諡號까지 내려짐으로 인하여 河西 金麟厚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사실상 일단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본 절에서 다루는 1672년 행장완성(朴世采 撰), 1675년 묘표완성(金壽恒찬), 1672∼1682년 신도비명 완성(宋時烈 撰)은 그 같은 재평가의 결과를 문서화하고 재확인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1672년 玄石 朴世采가 찬술한 행장은 바로 그러한 재정리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은 행장 찬술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즉 행장 중에서 玄石 朴世采는 후손 亨祉가 찾아와 梁子澂의 家狀 내용이 ‘높힘과 지극한 칭송’으로서는 의미가 있으나 ‘간결하지 못하고 사적이 누락’되었다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손 亨祉로 대표되는 행장의 재찬술을 도모한 세력들은 그같은 전후 시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재찬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河西의 年譜와 家狀 중에서 河西 당대에는 첨예한 사안이었던 「姜公望」 부분의 출처를 재확인한다든가, 河西의 도학적인 위상을 학문은 退溪와, 출처의 바름은 栗谷과 비교하려는 시도가 나타난 것이 바로 그러한 과정을 잘 말해준다.
行狀의 찬술에 이어 묘표와 神道碑銘이 연이어 찬술되고, 특히 그 찬자들이 모두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도비문의 찬술과정을 살펴보면 麥村 金亨祉가 玄石 朴世采에게 행장을 부탁하고 이와 동시에 尤庵 宋時烈에게 신도비문을 부탁한 것은 1672년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麥村의 사돈이자 친구인 安村 朴光後의 文集에 尤庵이 亨祉의 부탁으로 묘도문자(신도비문) 짓는 일을 허락했으며, 당시 尤庵이 河西의 年譜만 보고 玄石의 행장은 미쳐 보지 못하였음을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尤庵은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비문의 찬술을 쉽게 끝내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1670년 해배된 후 覺齋 金器夏, 自然堂 金時瑞, 松柏堂 李實之( 광산인 麥村의 생질)등 가문의 인사들이 尤庵에게 편지를 보내어 비문의 완성을 부탁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尤庵의 문인인 松柏堂 등 문인들이 중간역할을 중심적으로 하였고, 이를 통하여 비문 뿐만아니라 書院 移築, 文集중간의 중요 역할을 직접 담당하였던 것이다.
尤庵이 지은 河西 金麟厚의 신도비문은 위에서 설명한 그의 공업에 대한 재정리의 의미에 더하여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이 신도비문에서 거론된 尤庵의 평가가 후일 정조대 文廟配享의 과정에서 그대로 재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尤庵 宋時烈은 이 비문에서 河西를 평가하여 “국조의 인물중 道學과 節義 文章에 있어 대개 품차가 있어 이 세가지를 모두 겸하고도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하늘이 우리 河西선생을 이땅에 낳게하셔서 세가지를 兼全하게 하였다” 한 것이나, “지금 文廟에 從享하지 못한 先賢가운데 유독 河西가 우뚝하여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 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와 함께 1675년에는 金壽恒이 찬술한 「묘표」가, 그리고 시대는 약간 뒤지지만 1777년에 후손인 金鍾厚에 의하여 「묘지명」이 찬술되어 河西의 略傳은 모두 갖추어 지게 된다.
3) 文集의 刊行
이상에서 우리는 河西 金麟厚의 略傳 정리가 그의 사후 가장으로부터 시작하여 1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걸려서 후대에 완료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같은 略傳이나 年譜의 정리보다 더욱 비중이 큰 것이 바로 文集의 간행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기 가문이나 사족들에게 있어 선조, 스승의 文集을 간행하는 일은 서원.사우의 건립과 함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追崇作業이었다. 대체로 후손이나 후학들이 자신의 선조나 스승의 업적이나 학문을 알리고,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같은 追崇活動의 시발은 대개 앞에서 살핀 바와같은 行狀이나 碑文의 撰述, 나아가 文集의 간행을 통하여 그 功業을 드러내는 작업을 선행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같은 선행작업을 통하여 국가나 관, 혹은 향론의 지원을 받을 정도가 되면, 贈職이나 정려포장이라든가, 서원 건립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상인물에 따라 편차가 많기는 하지만 그 같은 과정도 단순하게 대상인물의 功業만으로 진행되기 보다는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지닌 정치, 사회적인 지위나 특정인물의 활동여하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河西의 경우는 양자가 모두 합치된 경우로써 그만큼 명분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다고 보겠다.
河西의 文集刊行은 4차에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그 단서를 마련하는 것은 1561년 사위이자 문인인 高巖 梁子澂에 의한 家狀의 찬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절에서도 간략히 밝혔듯이 그가 지은 家狀은 河西의 실제 생전의 모습과 의지를 그대로 전하기에 시대적인 조건상(명종대)으로 불충분하였다고 보여진다.
물론 河西의 文集刊行은 1차로 사후 8년인 1568년에 제자이자 사위인 趙希文 등에 의하여 文集 유고본이 발간되고 있다. 이때의 遺稿文集 간행도 家狀과 같이 한계점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이 초간본 文集의 서문을 쓴 趙希文은 유고의 수집에 전후 8년이 소요되었고, 이중 白光勳은 초서의 일을 맡고, 감사 宋淳과 도사 閔공이 각재와 판각을, 감각은 梁子澂과 신각이 나누어 맡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유고의 수집은 아들인 종호의 구송과, 문인 노적, 기효간, 변성온의 수집으로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폈듯이 100여 년이 걸린 지속적 노력의 결과 河西 金麟厚에 대한 재평가와 사회적 위상마련 작업이 달성되자, 그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정리작업으로 文集의 중간이 필요해 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686년 文集의 중간은 일단 河西에 대한 내외적인 추숭활동이 단락됨을 의미한다. 이제 文集 중간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金麟厚의 증손인 金亨祉와 현손 金器夏는 尤庵 宋時烈과 文谷 金壽恒(1629∼1689)의 문인으로 玄石 朴世采(1631∼1695), 그리고 農巖 金昌協(1651∼1708), 三淵 金昌翕(1653∼1722) 형제와 교유하면서 그들의 지원과 협조속에 1686년(숙종 12) 河西文集의 重刊을 이루어 냈다. 이 같은 河西文集의 重刊의 과정은 1673년 4월 玄石 朴世采가 金亨祉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文集간행에 대한 의지와 내락이 진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文谷 金壽恒의 역할은 매우 컸다. 1682년(숙종 8)에 金壽恒은 文集발간의 발의에서 부터 간행의 전 과정을 주관하였고, 현지의 수령들과 연결하여 文集의 간행에 차질이 없도록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가 1682년 金器夏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당시 文集 刊行사업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잦은 全羅監司와 長城府使의 교체로 일이 지체되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어 文集의 간행이 순조롭지 만은 않았던 것같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수령의 비협조도 그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1686년 윤 4월 5일자 尤庵 宋時烈이 自然堂 金時瑞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松柏堂 李實之의 청에 의하여 文集의 서문을 완료하였음을 밝히고, 跋文을 지은 朴世采는 文谷의 뜻에 따라 편집을 맡았고 공역이 끝남에 自然堂 金時瑞가 跋文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1686년(숙종 12)에 『河西集』(金壽恒 編)의 2차 간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2단계의 추숭활동이 전개되는데 그것이 바로 文廟從享이고, 그 과정에서 정조의 특명으로 다시 文集의 3차 중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河西의 文廟配享이 결정되면서 정조는 經筵 중에 河西文集 중간의 下敎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정조는 河西의 文集 구본에는 遺漏가 많다고 하고 내탕금 千緡과 함께 8인의 校訂遺事를 擇定하고 禮官에서 공역을 주관토록 지시한 것이다. 이때 退溪文集의 중간도 함께 지시가 되어 退溪集은 곧바로 완료되었으나, 河西文集은 1802년(순조 2)에야 『河西集』 간행되기에 이른다.
4) 文廟配享
16세기 전반기를 살다 간 河西 金麟厚(1510∼1560)의 학문과 절의, 그리고 도학정신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추숭을 받는 것이 바로 1796년의 文廟從享이다. 河西에 대한 전후 200여 년의 추숭, 현양활동이 마침내 대단원을 장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河西의 학통을 이은 후학들은 앞에서도 자주 지적했던 것처럼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대개 「서인-노론계」로 좌정하여 호남지방의 이 계열 인사들의 학문적인 종주로써,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筆巖書院은 그러한 세력의 정치적 거점으로써 장성지역은 물론 호남지역의 중심처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河西 金麟厚의 사회적, 정치적인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文廟從享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河西의 文廟配享 논의는 1771년 전라도 유생 梁學淵 등이 金麟厚를 文廟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오리는 것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상소는 허락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786년 筆巖書院에 鼓岩 梁子澂의 추배를 예조가 허락하면서, 정조는 어제 사제문을 지어 학덕을 포장하고, 좌부승지 朴天行을 예관으로 파견하여 筆巖書院에서 치제하도록 하였다. 이에 고무된 팔도유생 朴盈源 등은 다시 河西의 文廟종향을 건의하였으나 이때에도 역시 允許를 받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96년 金懋淳 등의 종향상소 6∼7차의 건의를 통하여 종향은 마침내 결정되기에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정조의 확고한 河西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가 있다. 같은 시기에 팔도유생 李明彩 등은 조헌과 金潗을 文廟에 종향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정조의 비답 중에서 河西를 겨냥한 정조의 인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정조는 이 비답에서 “선정신 金麟厚는 의리의 큰 근원을 뚫어지게 보아 홀로 그 宗을 얻었으니 그 높은 충성과, 아름다운 절개가 다른 인물들의 風騷로 보여져서는 부족하다. (宋時烈이 河西의 신도비문에서: 필자) 道學.節義.文章이 대개는 품차가 있는 바 이 세 가지를 다 겸비하고서도 일편에 치우치지 않은 이는 河西선생이 이에 근사하다 하였는데,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정조는 “지금 儒林의 소가 3번이나 올라 왔으나 文正으로써 왜 머리를 삼지 않는가” 라는 질타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이해 가을 蔡弘臣 등은 다시 河西와 조헌, 金潗의 文廟祭享을 다시 소청하고, 경외유생 李奎南 등이 河西와 조헌의 文廟祭享을 건의하자 다시 비답을 내리기를 “(河西와 중봉) 두 사람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조정이 들어선 이후에 으뜸으로 성리를 천명하고 비로소 大原을 보아 천지의 중간에는 단지 仲尼(공자)와 紫陽(주자) 두분이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단지 文正뿐이다”라 하고, 나아가 단연 河西의 單擧가 합당할 것이니 이 비답을 가지고 가서 세밀히 묻고 침잠, 연구하여(‘細叩潛繹 以求其單擧’) 단거로 정할 것을 강구하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어쩌면 이는 정조의 의견 통일과 독려의 성격으로까지 보이는 일면으로 河西 金麟厚에 대한 정조의 높은 평가를 보여준다.
이 같은 정조의 河西에 대한 깊은 애정이 비답을 통하여 알려지자 마침내 이해 9월에는 관학유생 沈來永, 李光憲, 洪準源 등의 계속된 소청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조는 河西 金麟厚를 文廟에 제향하도록 윤허하기에 이른다. 내용상 河西의 文廟祭享은 계속된 유생들의 건의라기보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철저히 왕이 감독하고 조장하면서 결정하는 형태가 되고 있었다.
文廟祭享을 결정하는 비답에서 정조는 “선정신 文正公은 곧 우리 동방의 周子이다. 兩程과 張ㆍ朱가 문성묘에 배향되고 朱子만 홀로 종사의 열에서 빠진다면 그분들이 과연 마음이 편하겠는가. 너희들 소청의 뜻은 바로 趙文正, 李文純, 李文成, 宋文正의 마음일 것이다.” 라고 하고, 아울러 河西에게 領議政을 내렸다.
金麟厚의 文廟 배향이 결정되자 정조는 어제 사제문을 지어 우부승지 李勉兢을 예관으로 치제하였는데, 이 사제문에서 정조는 ‘圃隱과 靜庵 이후 우리나라의 도가 막혔다가 퇴계, 河西에 이르러 빛남을 밝히고 있다. 한편 文廟종사의 교서는 당시의 예문관 제학 具庠이 찬하였는데, 여기에서는 ’眞儒가 천 년만에 나타났으니 마땅히 숭보의 법전에 합당하고, 공론이 백년 뒤에 정해지니 이에 배향의 의식을 거행한다.(중략) 河西는 海東의 濂溪요, 湖南의 洙泗‘라고 평하였다.
한편 이와 함께 改諡의 지시도 내려졌는데, 정조는 河西 金麟厚의 諡號인 ‘문정’의 ‘靖’이 ‘寬樂令終’의 뜻인데 이는 도학자의 기상을 표현하기에 부적절하다고 보고 신하들의 논의를 거쳐 다시 정하라 하였다 이에 채제공, 윤시동, 김이소, 김희, 이병모, 송환기 등의 논의를 수렴하여 결국 1796년 겨울 특명으로 새롭게 시호가 내려지는데, ‘道德博聞曰文, 以正服人曰正’의 「文正」 시호가 이때에 결정된 것이었다.
5.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간략하게나마 河西 金麟厚의 當代 位相과 後代의 顯陽活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河西 金麟厚의 시대가 지닌 역사성과 그 속에서 활동한 河西의 생애가 상대적으로 주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나아가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河西의 모습들이 어떠한 과정 속에서 정형화하고 있는가를 각각의 시대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하려 하였다. 한편 본고에서 필자는 단지 河西의 생애나 사상에 대한 별도의 정밀한 연구들이 준비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부면의 논의는 생략하였다.
이는 그 부면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결코 아님을 독자들은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우선 논의의 중복을 피하자는 의도가 컸고, 또 필자가 맡은 연구에서 그것들을 포괄하기도 어려웠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河西의 시대나 河西의 사상을 다루는 논고에서 접하기 어려운 長城地域과 河西, 長城地域 蔚山 金氏 家門과 河西, 후대인들의 河西에 대한 재평가 작업들은 새로운 측면의 이해에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앞으로 河西 金麟厚의 역사적인 평가와 河西思想의 포괄적인 이해에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기정진과 고산서원
안 동 교 (조선대학교 한국학 자료센터 전임연구원)
1. 노사의 삶의 여정
蘆沙 奇正鎭(1798-1879)의 자는 大中, 시호는 文簡公, 본관은 행주이다. 奇在祐와 안동권씨의 아들로 1798년(정조 22) 6월 3일에 전북 순창군 福興面 九水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금빛 얼굴의 大人이 한 사내아이를 안아다 주는 꿈을 꾸고 노사를 낳았기 때문에 어렸을 적의 이름을 金賜라 했다.
노사는 비법한 천품을 타고나 말을 하면서부터 문자를 해득했으며, 5세에 효경과 격몽요결 등을 읽어 문리가 날로 성취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6세에 천연두를 앓다가 왼쪽 눈을 잃었다. 7세에 소학을 배우고 나서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때에 노사는 맷돌을 보고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고요한 이치를 나는 맷돌에서 보았네”라는 시구를 읊었다. 8세에 정월부터 通鑑綱目을 보기 시작하여 6월에 끝마쳤다. 이때부터 經史와 제자백가서에 어려워하거나 막힘이 없어, 비가 죽죽 내리듯 환하게 깨달았으며 흐르는 물처럼 응답하였다. 이 무렵 학자들의 性理에 대해 묻자, “天理는 사물의 본성이니 性이란 곧 理이다. 理에는 본래 性이 없으나 성에는 곧 理가 갖추어져 있다. 어린애들은 무지하여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고, 또 학자들의 格致에 대해 묻자, “마음이 사물을 향해 도달하는 것을 格物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을 알게 되는 것을 致知라 하니, 격물과 치지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고 답했다. 이처럼 노사는 어려서부터 성리학과 경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였다. 13세에는 白巖寺로 들어가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책상 위에 놓고 단정히 앉아 깊이 음미하였으며, 뜰을 배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깍지를 낀 채 종일토록 정좌하기도 했다.
14세에 울산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18세 되던 해 5월에 부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10월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산을 정리하여 장성 하남으로 돌아왔다. 23세 여름에 南庵寺에서 독서하고, 24세 가을에는 觀庵에서 독서했다. 28세에는 鰲村을 지나가다 당시 기호유학의 종장인 剛齋 宋穉圭를 배알했다. 34세에 司馬試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이듬해에 康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0세에는 遺逸에 천거되어 司甕院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44세에 부모의 묘소를 광주 瑞石山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 45세에 典設司別提를 제수 받고 부임한 지 6일 만에 사표를 제출했고, 이어 平安道 都事를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6세(1843년) 여름에 南庵寺에서 피서하면서 「納凉私議」 초고를 작성하여 性理를 논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근세에 性을 논하는 학자들이 理와 分에 어두워 理一을 形氣에서 떠난 곳에 한정하고 分殊를 형기에서 떨어진 뒤의 일로 국한시키니 理와 分이 사이가 뜨고 性과 命이 엇갈려 성에 대한 논란이 비로소 천하에 분열되었다”고 주장했다. 48세에는 문인 李鳳燮이 “「태극도설」에 ‘聖人定之’라는 ‘定’자가 자신을 정함인가 타인까지 정함인가”를 묻자, 노사는 「定字說」을 지어 일깨워 주었다. 또 「偶記」를 지어 사단칠정을 논변하였다. 50세에는 李應辰의 서신에 답하여 人物性同異와 心氣體質의 내용을 토론하고, 55세에는 權宇仁의 서한에 답하여 理氣의 문제를 논했다. 56세에는 「理通說」을 지었는데, 이는 권우인이 율곡의 理通氣局說을 잘못 해석하여 본지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쓴 것이다. 59세에는 남원의 의병장 趙慶南(1570-1637, 호 山西)이 지은『亂中雜錄의 서문을 지어 붕당의 시비를 변론했다. 60세에 무장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64세에는 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체직되었다.
65세(1862년)에 「三政策」(일명 壬戌擬策)을 올리려다가 실행하지 못했다. 이 해에 삼남지방에 민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전부와 군제와 환곡 등 세 가지 정책에 대하여 널리 구언했다. 노사는 封事를 작성하여 사대부 습속의 문란이 현실을 급속히 파괴하게 된 증후라고 주장하고, 이어서 삼정의 폐단을 구해낼 방법과 실시할 계책을 제시했다. 67세 여름에 枕漱亭에서 피서했는데 이 때 배종한 문인이 수십 명이었다. 69세(1866년) 6월에 執義를 제수 받고, 7월에 6조로 된 상소, 이른바 「六條疏」를 올렸다. 이 때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도 조정에서 화친하자는 의논이 비등하자, 노사는 이 말을 듣고 상소하여 간사한 오랑캐의 정상을 말하고 방비할 계책을 말하였으며, 말미에서 또 안으로 덕을 닦는 것이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이 상소는 당시 이항로의 척사론과 함께 그 후로 계속된 위정척사의 기본논리가 되었다.
77세(1874년)에 「납량사의」의 몇 문단을 고치고 「蘆沙說」을 지었다. 79세에 호조참판을 제수하였다. 81세(1878년)에 「猥筆」을 지어 문인 趙性家에게 보여주었으며, ‘澹對軒’이라는 精舍를 짓고 그 기문을 지었다. 82세(1879년)에 「납량사의」와 「외필」을 문인 金錫龜, 鄭載圭, 鄭義林에게 보여 주었다. 이해 겨울에 주역을 보았는데 12월 21일에 병환이 생겼다가 29일에 생을 마쳤다. 이듬해 2월 15일에 凰山에다 장사를 지냈다. 1892년에 문인 趙性家가 「행장」을 지었고, 1901년에 최익현이 「신도비문」을 만들었으며, 1910년에 조정으로부터 ‘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924년에 澹對軒을 중건하고, 이듬해에 釋菜의식을 거행했다. 1927년에 祠宇와 居敬齋, 集義齋를 건립하여 高山書院의 규모를 갖추고 노사를 주벽으로 모셔 제향했다. 고산서원 이외에도 노사는 광산의 道林祠, 담양의 金谷祠, 화순의 龜巖影堂, 三山祠, 高岡祠, 나주의 五峰祠 등에서 제향을 드리고 있다.
2. 노사의 학문과 사상
1) 理 중심의 철학
노사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남 장성으로 이사하여 평생 그곳을 생활 기반으로 삼아 학문에 정진했다. 동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대부분 師承관계를 뚜렷이 맺으면서 학문을 연마해간 것과 달리, 노사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사승관계 없이 자신의 탁월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높은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이로 인해 후대에 近世儒學을 대표하는 3인 중의 한 명 또는 理學 6대가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사는 세계를 理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의 이기설에서는 불가피한 경우 ‘氣’라는 용어를 쓰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分’이라 표현한다. 그는 46세(1843년)에 고창 문수사의 南庵에서 쓴 역작 「納凉私議」에서 “氣로서의 分이 실은 理 하나 가운데의 미세한 條理”이며, “理와 대비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곧 氣란 理와 대립․대칭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81세(1878년)에 저술한 「猥筆」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氣 역시 理 가운데의 일”이라거나 “氣가 어찌 理와 대비되는 짝일 수 있는가”라고 말함으로써 主理的 논점을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모든 “氣의 발동과 유행이 理의 명령을 받아 실현되는 것”이요, “氣는 理가 유행하는데 필요한 수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 성리학에서 理의 기본적인 뜻은 모든 현상과 존재의 원인이 되는 원리․원칙을 가리키는 반면, 氣는 모든 현상과 존재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기의 의미는 사실과 가치의 양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다만 가치적 측면에서 의미의 비중이 사실적 측면에서 의미의 비중보다 더 클 뿐이다. 특히 가치의 측면으로 볼 때 氣는 그 자체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이른바 가치중립의 성질을 가진 것인데 비하여, 理는 善의 원인 혹은 선으로서 의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위에서 노사가 발언한 내용들은 사실의 측면에서 한 의미로 볼 여지가 없지 않지만, 理가 실제적인 작위성이 없음을 고려한다면, 대체로 이것들은 가치의 측면에서 한 의미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언의 이면에는 벌써 행위상의 선악에 대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理를 氣에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노사가 가치중립의 태도를 벗어나 선의 원리 또는 선으로서 의리를 그만큼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노사가 四端七情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사단은 善 한 쪽이니 理로 말하고, 칠정은 선악을 겸한 것이므로 理氣를 겸한 것이다. ‘이기’라는 글자는 ‘선악’이라는 글자로 보면 무방하다.” 이처럼 그의 理 중심의 성리설은 그만큼 철저히 악을 피하고 선 또는 의리를 위하려는 의지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철저히 선 또는 의리를 실현하려는 목적의식이 그로 하여금 理 중심의 성리학을 이룩하게 했던 것이다.
2) 위정척사 사상
노사는 이미 청년시절에 權宇仁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교와 노장의 空/無한 이론과 유학의 인의와 禮에 기초한 충실한 도덕 이론을 대비․설명한 바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불교와 노장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유학을 護敎的 관점에서 지지하는 노사의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노사의 위정척사론은 西學을 이단으로 격렬히 배척하면서 싹이 튼다. 노사는 1839년(42세) 겨울, 왕명으로 華陽書院(송시열을 제향)에 致祭한 일을 기록한 金在晉의 시를 차운하여, “서학의 요괴를 도끼로 내려쳐 이목이 상쾌하니/ 이에 유학을 천명하여 온 누리를 안정시키네”라고 자신의 심정의 일단을 내비쳤다. 노사가 이 시를 짓던 해에 조선에서는 己亥邪獄(7월)이 일어나 프랑스 신부 앙베르․샤스탕․모방 등이 사형되고, 斥邪綸音(11월)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사도로 규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노사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의식하면서 서학을 이단․사설로, 유학을 正學으로 규정하는 확고한 도식을 드러냈다. 나아가 노사는 서학의 천당 지옥설에 대해 불교의 극락 지옥설보다 더 요망하고 괴기한 술책이라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군주와 부모를 배반하고 사람들에게 세금을 교묘하게 거두어들이는 등 모든 악을 갖춘 종교로 인식했다.
노사의 위정척사론은 서양의 침략이 빈번하던 1866년(69세)에 올린 「丙寅疏」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1862년(65세)에 작성한 「壬戌擬策」(실제로 올리지는 못함)에서 이미 ‘민심의 결집[結人心]’을 요체로 內修論을 주장했던 노사는 이제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이 자행되자 내수를 기반으로 한 척사론을 강력하게 제기한 것이다. 그는 서양의 침략에 대해 극도의 우려를 표시하면서 6조목의 방비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외침에 대해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심의 합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정의 정책’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廟算不可不定]고 주장한다. 이 대책은 외세의 침략에 맞선 내부의 태도를 좀더 강화하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척사에 대한 군주와 백성의 합일된 결의를 촉구한 그는 국가의 일정한 정책, 만민의 귀일하는 정신, 국론의 분열요소 제거 등 일원적인 체계구성을 주장하고,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대해 흡입되고 동화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여 방책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둘째, 연해의 관원들이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정의 명령’을 정비해야 한다[先修辭令]고 주장한다. 이 대책은 서양 물건의 엄단을 통해 내적인 주체성을 확보하고 정당성을 갖춰 서양의 세력에게 우리의 입장을 보여주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적인 주체성과 정당성을 바탕으로 통상요구 거절의 이유가 서양의 부당함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셋째, 유사시에 대비하여 우리의 지세를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도록 지형을 잘 관찰해야[審地形] 하고, 넷째, 외침에 대비하여 軍籍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시켜야[鍊兵] 하며, 다섯째, 천하에 쓰지 못할 사람이 없듯이 이용하지 못할 방책이 없으므로 널리 좋은 의견을 구하되[求言] 한글로 쓰인 것도 받아들여야 하며, 여섯째, 내정개혁을 과감히 단행하고 외양의 토대를 이뤄내는[內修外攘] 것이 급선무인데 이를 위해서는 민심의 결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대책은 상황적인 요인에 의해 불가피하게 서양과의 대결이 이루어질 것에 대비하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대책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가운데 적극적인 척사론의 전개라기보다는 국가적 합일을 바탕으로 내부의 단결을 꾀하여 서양의 물리력을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대비하자는 수세적 입장의 방책이라 할 수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서양의 군대에 대해 水戰과 陸戰을 대비시켜 우리의 장점을 살리려는 지세의 이용을 제기하고, 치병에 대해서도 당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점이다. 아울러 求言에서도 한글로 쓰인 것도 수용해야 함을 역설한 것은 비록 수세적인 척사 논의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인 주의․주장을 벗어나 신분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사상가 또는 철학자의 경우에나 그 사상 또는 철학이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사회적 환경과의 관련을 감안하면서 그의 전술한 主理的 성리설을 되돌아본다면, 그 성리설의 실천적 성격은 결국 理 중심의 의리사상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이 민족과 국가의 수호를 뒷받침한 것이라 하겠다.
3. 노사의 유적지
1) 高山書院
이 서원은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이곳은 노사가 1878년에 精舍를 지어 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인데, 1924년에 다시 중건한 후 1927년에 고산서원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처음엔 노사를 주벽으로 삼고 鄭載圭, 趙性家, 金祿休, 曺毅坤, 李最善, 奇宇萬을 배향했으며, 이후 金錫龜와 鄭義林을 추가로 배향했다. 祠宇의 상량문은 문인 吳駿善이 지었고, 노사위패의 봉안문은 權載圭가 지었으며, 서원의 창건실기는 朴興圭가 지었다. 1978년에 뜰에다 藏板閣을 새로 지어 居敬齋에 있던 문집과 목판, 유품(갓․탕건․옥돌담배상자․은장도․지팡이․안석 등) 등을 옮겨 보관하고 있다.
건물 현황을 보면, 총 8棟으로 외삼문인 山仰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이 있고, 강당 좌우로 東齋인 居敬齋와 西齋인 集義齋가 교육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어 서재 옆에 藏板閣이 있고 강당 뒤로 내삼문과 사당인 高山祠가 자리잡고 있다. 그밖에 정문 옆에 살림살이를 맡은 고직사가 있다. 1982년에 전남기념물 제 63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에 사당과 주변 담장을 보수했으며, 현재 高山書院廟庭碑가 세워져있다. 서원의 역사와 현황을 알려주는 高山書院誌가 1968년에 간행되었는데, 서문은 송재성과 김상진이 썼고, 발문은 여창현․홍석희․박영봉이 썼다.
2) 澹對軒
1878년(노사 81세)에 월송리 집의 서쪽 빈터에 精舍를 건립하여 문인들에게 강학하던 곳인데, 瑞石山(지금의 무등산)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바라볼 수 있어 '담대헌'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가 지은 「澹對軒記」에서 “평생 뜻에 맞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 한 가지 일은 뜻밖에 얻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 정사를 짓고 매우 흡족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3) 南庵寺
전북 고창군 소요산에 있던 절인데, 노사가 1843년 46세에 「納凉私議」 초고를 작성한 곳이다.
4) 枕漱亭
문인들이 石屛山에 조성한 정자로, 노사가 여름에 피서하며 강학한 곳이었으나, 爽凉한 石氣가 사람에게 맞지 않다 하여 훗날 헐어버렸다.
5) 기타
노사의 묘소는 전남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또는 황산리)에 있고, 장성군 진원면 진원초등학교 교정에는 노사의 敬慕碑가 남아있다.
4. 門人들의 성향과 분포
노사의 學名은 40대에 이미 널리 확산되어 많은 제자들이 그의 문하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노사의 성리설과 위정척사론을 학문적․실천적으로 계승하여 스승의 성리설이 공격받을 때는 글로써 논변․옹호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는 상소와 擧義로써 저항했다.
澹對軒에서 발간한 蘆沙先生淵源錄(1960년 간행)에는 노사의 문하에서 직접 수학한 문인과 그 문인들이 門派를 이뤄 배출한 再傳․三傳․四傳 문인들의 명단과 간략한 프로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연원록에는 직접 수학한 594명의 문인(67 門派 포함)과 再傳․三傳․四傳 문인 약 4천여 명(약 194 門派 포함)이 들어있다. 직접 수학한 문인은 吳相鳳(1801년 생, 병인양요에 서양인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吳漢斗․徐泳喆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킴)과 魏成祚(1801년 생)처럼 노사와 불과 3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인물들부터 李鶴濟(1863년 생)처럼 노사와 65세나 차이가 나는 인물들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거주하면서 활동한 지역은 주로 전남․전북에 고루 분포되어 있고, 경남의 진주․하동․산청․합천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주․ 충남․ 충북․함경북도 지역에도 산재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조 후기에 성리학이 華西학파(이항로)․寒洲학파(이진상)․淵齋학파(송병선)․艮齋학파(전우) 등으로 분파되어 가던 시점에, 노사의 학문적 영향력은 주로 충남․충북․전북․전남․경남․제주 지역에 파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사의 많은 문인 중에서도 李僖錫․金瀏․趙性家․李最善․羅燾圭․金祿休․曺毅坤․金錫龜․崔琡民․鄭時林․鄭載圭․鄭義林․奇宇萬․李直鉉․吳駿善․奇參衍․權雲煥․奇宰․高光善 등은 노사의 성리학과 위정척사 정신을 투철히 계승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각자 거주지역에서 강학활동과 의병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노사학파의 위상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그중 노사의 가장 뛰어난 문인 鄭載圭와 노사의 손자 奇宇萬은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고, 동시에 뚜렷한 師承관계를 형성하여 현재까지도 학맥을 유지하고 있어 주목된다.
5. 배향된 인물들
1)月皐 趙性家
1824-1904. 자는 直敎, 본관은 함안, 漁溪 趙旅의 후손으로 경남 함안에서 살았다. 그는 노사를 30년 이상 가까이 모시면서 스승이 가난하여 식량이 부족하면 하동 옥종 땅에서 30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나귀 등에 쌀가마를 싣고 와 생계를 도운 애제자였다. 노사는 1878년에 조성가를 불러 「猥筆」이라는 책을 보이면서 “내가 마음에 간직하고 조심한지 80년이 되었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지금 비록 만 가지 생각이 재처럼 식어 버렸지만 잊지 못하는 마음은 남아있다. 前賢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後賢이다” 말하고 잘 보관하라고 부탁했다. 이는 노사가 작고하기 1년 전에 조성가에게 자신의 성리설을 전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성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노사가 저술한 「외필」은 사단과 칠정을 互發이라고 본 퇴계나 氣發만을 인정하는 율곡의 입장과 달리 氣發이 곧 理發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같은 기호계열의 간재학파나 연재학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사의 主理論을 계승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영남학파의 종장이라고 할 수 있는 李震相의 心卽理說과 상통한 면이 많았다. 학맥은 영남과 기호로 크게 나뉘지만 학문 경향은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877년에 이진상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를 방문해 허유․곽종석 등 당시 영남학맥을 대표하던 학자들과 鄕飮酒禮를 행하고 講座를 열었는데, 이때 조성가를 정중히 초청했으며, 남쪽으로 100여 리를 내려가 남해 금산을 함께 등반하기도 했다. 또 이들은 조식의 신도비를 둘러본 뒤, 사당을 배알하고 山天齋로 들어가 조식이 손수 그린 공자와 주돈이․정호․주희의 墨像을 배알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강론했다. 이때 두 사람은 영남과 기호의 사단칠정에 대한 학설의 차이점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하였다.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한말의 급변하는 과정에서 유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扶正斥邪論」을 지어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노사집과 그의 「연보」를 10여 년에 걸쳐 교정하여 간행했고, 최익현과 편지로 四七理氣論을 변론했다.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1902년에 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月皐文集』20권 10책 분량의 글을 남겼는데 詩와 書의 분량에 비해 論이나 雜著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노사의 학설을 그대로 계승하다보니 나름대로의 학설들을 개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중 「沙上日記」는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어, 월고의 학문 사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후에 장성의 高山書院에 배향되었고, 그가 태어난 경남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에 묘소가 있는데, 총탄 자국이 난 묘비엔 ‘大韓徵士月皐趙先生之墓’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임금이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徵士’라는 말을 썼다. 문인으로는 趙纘奎․權鳳鉉 등 약 5명을 배출했다.
2) 石田 李最善
1825-1883. 자는 樂裕, 본관은 전주, 양녕대군의 후손, 전남 담양군 창평면 長田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노사의 문하에 입문한 뒤, 40년간을 하루같이 지성을 다해 섬김으로서 ‘정자 문하의 呂希哲’에 비견되었다. 1859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864년에 初試에 합격했으나 覆試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讀猥筆」에서 노사의 「외필」이 主理說을 밝혀 성현의 올바른 도리를 세상에 천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율곡의 機自爾說과 氣發理乘一途說도 전체적으로 탐구해보면 주리설이라 하여 율곡과 노사의 입장을 일치시켰다. 그는 禮學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노사에게 喪禮에 관해 질문하고 비평을 받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외세를 철저하게 배격할 만큼 위정척사의 정신에도 투철했다.
1862년에 조정에서 三政(田稅․軍布․還穀)의 폐단을 구제할 방책을 구하자, 그는 장문의 「三政策」을 올려서 삼정의 문란한 실상, 관료의 부패, 백성의 도탄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삼정의 법제를 개혁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바로잡아야 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삼정의 문란보다 더욱 근원적인 병폐를, 첫째 기강이 무너지고, 둘째 염치가 소멸된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기강과 염치의 정신적 기반이 바로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삼정의 제도적 폐단을 개혁하는 것이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말단에 매달려 근본적인 해결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임을 경계했다. 또한 그는 습속의 병폐를 바로잡아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려면 무엇보다 인재를 얻어야 하며,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이치를 밝혀 도학에 힘쓰고, 언론을 개방하며, 인재의 선발을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는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로 올라가서 당시의 집정자인 대원군을 만났다. 대원군이 時務의 급한 일을 묻자, 그는 인재를 얻는 것과 독서하는 것이 중요하며, 경전과 역사서를 읽어 천고의 흥망을 살펴 견식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도 근본에 관한 식견을 길러야 당면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위정척사 정신은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전승되었다. 아들 李承鶴은 기우만 등과 함께 의병으로 활약했고, 손자 李光秀(기우만의 문인)도 나인영이 주도한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비밀결사에 참여하여 의열투쟁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진도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梁漢黙 등과 함께 3․1운동에도 참여했다.
사후에 전남 장성군 진원면의 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長田 마을의 동구에는 그가 지었다고 알려진 聞一亭과 노사가 써준 聞一亭記가 남아있고, 마을 안쪽에는 그의 고택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장전 마을에서 2km 쯤 더 들어간 茶洞마을 뒷산 꼭대기에 그의 묘소가 있는데 묘비의 글은 李建昌이 지었고, 묘소 왼편 골짜기에는 재실인 石田齋가 있다. 문집으로는 石田集 4권 2책을 남겼고, 송경진․정강원 등 약 4명의 문인을 배출했다.
3) 莘湖 金祿休
1827-1899. 자는 穉敬, 본관을 울산, 김인후의 후손으로 전남 장성군 월평리에서 출생했다. 1842년에 鄕試에 합격하고, 1846년에 노사의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닦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신촌으로 옮겨 살았다. 1877년에 조정에서 학행으로 繕工監 監役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화창한 봄이나 가을이면 교유하는 벗들과 명승을 탐방하고 글을 쓰곤 했다. 문집으로 莘湖集 2권 1책이 있다. 문인으로는 이희용․변권용 등 10여 명이 있다.
4) 東塢 曺毅坤
1832-1893. 자는 士弘, 본관은 창녕, 曺庶의 후손으로 전북 고창군 검암리에서 태어났다. 1847년에 노사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위기지학에 몰두하며 경서와 제자백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6년에 도적이 들끓자 「止盜論」을 지었다. 1893년에 노사의 제사를 지내는 도중에 병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東塢集 6권 2책의 시문집을 남겼고, 문인으로는 조석일 등 약 25명을 배출했다.
5) 大谷 金錫龜
1835-1885. 자는 景範, 본관은 김해, 金漢慶의 후손으로 남원 송동면 細田에서 출생했다. 10세 안팎에 마을 서숙에서 소학을 배우고, 17․8세에 노사의 제자가 된 뒤 광주 大谷(현 담양 대치리 금곡)으로 이사했다. 그는 鄭載圭․鄭義林과 함께 노사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릴 만큼 도학의 측면에서 노사의 이기론을 그대로 계승했고, 存養省察을 주로 하여 노사학파의 수양체계를 정립한 인물이다. 노사학파에서는 그를 공자 문하의 顔子에 비유하기도 한다.
문집으로 大谷遺稿 6권 3책을 남겼는데, 「自警說」은 그의 구체적인 학문관을 드러내주는 저술로 25세부터 36세까지 약 10년에 걸쳐 도학의 요체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 외에 「師門問答」․「沙上語錄」․「知舊問答」도 노사와 노사학파의 학문성격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자료로 생각된다. 문인으로는 이용채․김용일 등 약 26명이 있다.
6) 老柏軒 鄭載圭
1843-1911. 자는 厚允, 본관은 草溪, 鄭玉潤의 후손으로 경남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태어났다. 1864년에 崔惟允의 안내로 노사 문하를 찾아와 수학한 뒤, 노사의 학통을 계승․정립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영남의 李震相과 그의 문인 許愈․郭鍾錫․李承熙 등 寒洲학파와 교유하고, 金平黙․崔益鉉․柳基一 등 화서학파와도 교유하여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폭넓게 사유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노사가 종래의 성리설이 끝없는 논쟁에 휘말려 있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도에서 「納凉私議」와 「猥筆」을 통해 理一分殊說에 따른 주리론적 이기일원론의 천명한 데 대해, 田愚는 노사의 입장을 氣를 理로 인식했다고 규정하고 조목 별로 반박하여 「猥筆辨」과 「納凉私議疑目」 등을 저술했다. 이때 정재규는 전우의 비판을 재반박하여 「猥筆辨辨」과 「納凉私議記疑辨」을 저술했는데, 이러한 논변은 노사학파의 성리학적 입장을 더욱 엄밀히 정립하여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1880년에 노사집의 교정에 참여했고, 1900년에 「노사선생언행총록」을 편찬했으며, 1901년에는 노사집의 간행을 주동했다.
정재규는 1903년에 儒臣으로서 經筵에 천거되고 肇慶廟 參奉에 제수되기도 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忠義의 울분을 안고 호남과 영남에 布告文을 내어 일본과 담판할 것을 촉구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논산에 있는 闕里祠에서 최익현을 만나서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으나 외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운을 당하자 그는 “우리는 죽지 않으면 곧 포로다. 구차스럽게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루하루가 수치이다. 평생 성현의 글을 읽고 강론한 것이 무엇이었는데 오늘의 마지막 날에 수치스러운 귀신이 되어 끝날 것인가”라고 통탄하고, 1911년에 자신의 老柏書舍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문집으로 老柏軒集 49권 25책을 남겼고, 문인으로는 鄭冕圭․權雲煥․南廷燮․南廷瑀․權載奎․鄭琦 등 약 139명이 있다. 고산서원에 배향되어 있고, 그가 강학했던 老柏書舍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노백서사 뒤편 대숲에 자리 잡은 景德祠에 위패가 모셔져있다.
7) 日新齋 鄭義林
1845-1910. 자는 季方, 본관은 광산, 監司 鄭麟晉의 후예로 화순군 능주 大德에서 태어났다. 1869년 24세 때부터 노사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하면서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金錫龜․鄭載圭와 더불어 노사의 3대 제자가 되었다. 이들 세 사람은 친형제처럼 우의가 돈독했고, 서로 성리학을 토론하면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876년 2월에 일본 군함 7척이 강화도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고 2월에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통탄했고,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를 분개하여 이듬해에 정재규․기우만 등과 의병을 일으켜 위정척사를 부르짖었다. 1905년에도 최익현을 도와 斥倭와 時政을 극언하는 소장을 올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국가가 존망 위기에 처한 격변기에 민족의 지성으로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0년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는 日新齋集 21권 12책을 남겼다. 田愚가 노사의 「납량사의」와 「외필」을 비판하자, 그는 「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와 「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을 지어 노사의 학설을 옹호했다. 이외에도 「通告嶺南列邑章甫文」․「通告湖南列邑章甫文」․「答通長城會所文」 등은 주목할만한 저술이다. 문인으로는 朴準基․洪承渙․黃澈源 등 약 89명을 배출했다. 유적으로는 화순의 七松祠․三山祠․龍山祠와 담양의 金谷祠가 있는데, 이곳은 사후에 그의 문인들이 정의림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제향을 드리는 곳이다.
8) 松沙 奇宇萬
1846-1916. 자는 會一, 본관은 행주, 노사의 손자, 장성군 卓谷에서 奇晩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9년(34세) 동문 김석구․정재규․정의림과 「납량사의」와 「외필」을 강론했고, 1881년에 ! 사의 문집을 편집했고, 이 해에 김평묵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萬人疏를 올렸다. 1882년에 김병학이 ‘經明行修’한 인물로 조정에 천거하여 翼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3년에 노사의 문집을 간행했다. 1884년에 조정이 외교를 개통하면서부터 국가의 구제도를 크게 바꾸고자했는데, 늘어진 소매옷을 금하여 간편함을 추구한다는 영을 내리자, 온 나라가 바람에 휩쓸리듯 따랐으나, 그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것이 있다” 하고 끝내 새로 만들어진 옷을 입지 않았다. 1890년에 정재규와 함께 노사의 答問類編을 완성하여 간행했다.
그는 조부인 노사의 사상을 가학으로 이어받아 국세가 기울어져 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다난한 현실에 대처하여 위정척사의 의리를 강인하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894년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그는 鄕會를 열어 奇陽衍․奇亮衍․金鎭祜 등과 더불어 비적(동학도)을 소탕하는 일을 논하고, 왕의 군사에게 먹일 소고기와 양식을 先鋒所에 전달했다. 1895년에는 국모를 시해한 원수에 대해 와신상담하고, 임금이 굴욕을 당하였으니 신하로써 목숨을 바쳐야 할 때임을 역설하여 모두 함께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 상소문에서는 원수와 역적들을 성토할 것, 단발령을 철회할 것, 정치행정의 제도를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개화를 한다는 것은 난신적자요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치는 간사한 계략이라고 규탄하였다. 이듬해에 고종이 아관으로 파천하는 변란이 일어나자, 그는 장성향교에 湖南議會를 설치하고 포고문과 격문을 여러 고을에 보내 의병을 일으켰으며, 全州營과 京營의 병사들에게도 告諭文을 보내 호응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호남지방에서 그의 완강한 의거는 宣諭使 申箕善의 회유와 고종의 密旨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 내용을 보면, 지금 賊臣들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이 뜻을 펼 수 없고 도리어 집권자들에게 임금을 협박할 구실을 만들어 주어 임금에게 재앙을 미치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분과 통곡을 금치 못하면서 의병을 해산했다. 의병을 해산시킨 뒤 그는 생사를 걸고 대궐에 나아가 왕명을 받으려 하였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자, 처자의 봉양을 거절하고 三聖山으로 들어가 三山齋라는 초막을 짓고 그를 따라온 제자들에게 강학을 폈다. 이것은 스스로 다하지 못한 우국충절의 기개를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의 불굴의 우국충절의 정신과 기백은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짐을 본다. 을사조약으로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수년에 걸친 호남 의병들의 강렬한 항일투쟁은 바로 그의 우국충절과 그 정신적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통분을 금치 못하고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듬해에 곡성 道東祠에서 다시 鄭載圭․崔益鉉 등과 함께 거의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모으기 위해 호남 열읍에 告諭文을 돌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에 영광경무서에서 광주경무서로 압송되고 다시 목포경무서를 거쳐 경성감옥에 이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9년에 「湖南義士列傳」을 짓고, 1916년에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高山書院과 능주 草坊里의 高岡影堂에 배향되어 있고, 이외에도 무안의 平山祠, 순창의 武陽祠, 곡성의 武山祠, 장성의 書林祠 등에서 제향하고 있다.
문집으로 松沙集 53권 27책을 남겼는데, 「乙未疏」, 「丙申疏1.2.3」, 「乙巳疏」, 「輪告列邑文」, 「檄文」 등은 노사 성리학의 의리론을 계승하여 위정척사의 투쟁으로 승화시킨 내용들이 들어있다. 그는 1895년에 나주 동학토평비(금성토평비, 나주시 과원동 109-5 소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를 세울 때도 비문을 지었다. 문인으로 孔學源․洪奎植․曺悳承․梁會甲․李光秀․趙章燮․白弘寅․呂昌鉉 등 약 1238명을 배출했다.
< 자 료 >
1) 김인후의 백화정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 종사된 하서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에 닿으면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답게 입구의 문루에 송시열이 쓴 ‘확연루(廓然樓)’ 현판이 눈을 확 끌어당긴다. 강당 대청마루의 ‘청절당(淸節堂)’ 현판은 송준길의 글씨, ‘장경각(藏經閣)’은 정조의 어필이다. 필암서원의 위상을 말없이 과시하고 있다. 김인후는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김안국, 송순, 최산두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기대승, 이황, 이항 등과 교유하면서 실천만 중요시 하던 당시 학풍을 지양하고 이론적인 연구 또한 중요시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선비들에 대하여 ‘行에 열심이고 知에 간략하며 안에 소홀하고 밖에 힘쓴다’고 꾸짖은 것이 이러한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도학, 절의와 문장을 두루 갖춘 인물로 널리 추앙을 받았는데, 특히 인종이 세자 시절부터 그를 총애하여 묵죽도를 직접 그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직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인종에 대한 의리를 가슴에 품고 낙향하였다. 그는 맥동마을에 백화정을 짓고 평생 제자를 키우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주자의 설에 충실하는 정통 정주학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8년 뒤 선조 23년(1590)에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문인들이 서원을 세웠다. 지금의 서원은 원래 그 자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기산리에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가 인조 대에 그가 태어난 증산동으로 옮겨 다시 세운 후 1662년(현종 3) ‘필암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증산동은 지대가 낮아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하여 1672년(현종 13)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긴 것이다. 그의 분묘는 황룡면 맥호리에 있는데 묘역 입구에 대신들에게만 하사하는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이재가 썼다.
○ 백화정 :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필암서원을 나서 김인후선생 신도비를 찾아가는 길, 들어온 길을 되짚어 나가다 관동천을 거슬러 오르면 맥동마을에 닿는다. 아무 표시가 없어 일삼아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백화정(百花亭)이 거기 있다. 도학자답지 않게 이름 한 ‘백화정’에서 백성이 웃음꽃을 비우고 선비는 나랏일을 흔쾌하게 말할 수 있는 활짝 핀 세상을 꿈꾸었던 하서의 깊은 바람이 엿보인다. 백화정은 세자 때부터 깊은 신뢰를 나누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조정과 인연을 끊고 낙향한 하서가 1552년 건립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정자이다. 백화정 뜰에 서면 먼 오른편으로 난산(卵山)이 내다보이는데 하서가 인종의 기일마다 올라 종일토록 통곡했다 하여 난산비와 망곡단을 세워 두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1년에 복원된 것이어서 정자 본연의 모습도, 고졸한 맛도 없는 것이 아쉽다. 오른편에 있는 작은 텃밭이 하서의 탯자리이다.
2) 청백리가 무슨 자랑인가, 박수량(朴守良)의 백비
박수량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났다. 박수량은 연생의 현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인접마을 출신으로 연산군을 탄핵한 교리 김개(金漑)가 고부현감으로 있을 때 그곳으로 다니며 학업을 닦았다. 이때 전라감사가 여러 읍을 순시차 고부에 왔는데 이때 수량은 12세의 나이로 망해부(望海賦)를 지었다. 전라감사는 이 글을 보고 해남에서는 윤구(尹衢)의 문장을 얻고 고부에서는 망해부를 얻었다고 탄복하며 ‘비범한 재능이다’고 서울에까지 퍼뜨렸다. 망해부에 소년시절의 품성과 포부가 잘 나타나 있어 몇 구절만 살펴본다.
가슴에는 기상이 드넓어 지네, 마음에서 삼팽(三彭)을 도려내고,
어리석음 속에서 오개(五蓋)를 씻어내네, 눈에 보이는 것이 옛날과 달라지고,
흉중을 지키는 것이 바뀌어 지네, 작은 흐름도 가리지 않으니,
내 기상의 관용을 키워주며, 가득 차서 넘치니, 내 마음의 덕성을 북돋아 주도다.
모든 계곡의 물을 끌어들이니,
뭇이치가 하나에 귀착함을 깨우쳐 주고 한번 들었다 한번 빠져나가니,
삼라만상이 변천함을 알려 주도다.
바다는 자신의 본체를 갖고 있고, 나 또한 마음의 본체를 잃지 않네,
바다는 자신의 도량을 갖고 있거니와, 내 마음의 도량을 벗어나지는 않네.
그 후에는 무장향교 백일장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23세(중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廣州) 주학교수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승문원 부정자․박사․성균관 전적․예조정랑․사간원정언을 거쳐 충청도 도사로 나가 오직 덕과 예로서 목민관의 소임을 다하였다. 형조좌랑을 거쳐 32세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을 때 소격서 철폐를 주청하여 미신타파를 주장함으로써 사림의 자세를 보였다. 35세 때 부친의 병환을 돌보기 위하여 고부군수로 내려와 정성을 다하였으나 2년 후 부친이 죽자 관직을 사퇴하고 상기를 마쳤다. 39세에 헌납에 복직되어 이듬해 사헌부장령을 거쳐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대사간 심언광(沈彦光)과 대신 이항(李沆)의 위세가 언관들에게까지 미치자 이를 논박하고 조정이 바로잡아야 할 다섯가지 상소를 올렸는데 모두가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조정과 관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조목들로써 그의 청백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41세 때 모친의 병환으로 보성군수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내직을 거쳐 45세에 함경도 경차관이 되어 종성 관리의 부정을 조정에 알려 바로 잡았다. 그 후 승문원 판교․춘추관 편수관․병조참지를 거쳐, 47세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맡아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면서 그들을 감복시킨 송별시 두편이 남아 있다. 이해 10월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2월 한성우윤, 4월 공조참판, 7월 예조참의를 거쳐, 49세 1월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으나 노모의 병환으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의 내용을 보면 그의 충효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데 중종의 신임 또한 두터워서 담양부사로 내려가 노모를 봉양케 하였다. 53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복기를 마친 후 56세 때인 명종 1년 상호군이 되었는데 4월에 청백리 표창을 받고 9월에 한성판윤이 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를 거쳐 58세(명종 3) 때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60세(명종 5) 때 의정부 우참찬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관에 이르렀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는데 인심이 사나워져 품계 높은 대신이라야 이를 감복시킬 수 있다하여 특별히 내직을 겸하여 발령을 받았으며 1년 후 도총관을 겸하여 한성판윤 우참찬을 재차 맡게 되었다. 이렇듯 38년간 조정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 명종 9년 1월 19일 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64!세를 일기로 운명하니 명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조의를 표하였다. 대사헌 윤춘년이 “죽은 박수량은 청백한 신하로서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서울에서는 셋집에서 살았으며 본집이 장성에 있기 때문에 그의 유족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가고자 하나 이도 어려운 형편이니 이 사람을 포상하면 청백한 신하들에게 격려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여 장례비용을 하사하니 사관은 이를 기록하고 말미에 “외면으로는 청백한 것 같지만 내용으로는 비루한 행동을 자행한 사람들이 박수량의 사적을 읽어볼 때 어찌 이마와 등에서 땀방울이 흐르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명종은 서해바다에서 빗돌을 골라 하사하였는데 누를 끼칠까 비문을 새기지 않고 그대로 묘 앞에 세우니 이 비가 오늘날 청백리의 표상으로 유명한 백비이며 묘지명은 김인후, 신도비문을 송병선이 짓고 순조 5년 정혜(貞惠)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향유들은 모암서원(훼철)과 수산사에 배향 향사하고 있다. 박수량은 청빈하여 가세가 매우 궁핍했다고 한다. 명종은 이 말을 듣고 암행어사에게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니 “끼니때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며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 노모가 식은 죽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보고하였다. 임금은 수량의 장성에 99칸의 집을 지어 청백당이라 이름 붙여 하사하였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하남골에 빈터만 남아있다.
3) 필암서원[筆岩書院]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 김인후(金麟厚)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가 1624년(인조 2) 다시 세웠으며, 유생들의 소청으로 1662년(현종 3) ‘筆巖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1672년(현종 13)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어 1786년 양자징(梁子徵)을 추가 배향하였다.
완전한 평지에 입지한 서원으로 남북자오선의 중심축을 설정해 놓고 그 일축선상에 주요건물을 배치한 유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축선상의 맨 앞에는 정문인 곽연루가 배치되고 그 앞에는 신성한 묘의 구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안쪽으로는 곽연루와 약 23m의 거리를 두고 강당이 자리한 강학구역이 펼쳐지며, 맨 윗쪽에 위치한 제향구역은 다시 내삼문을 통하여 진입하게 되어있다. 강당과 내삼문 사이에는 동․서제가 대칭으로 건립되어 있고 교육의 기능을 도왔던 장판각과 장석각 등은 제향구역 우측 담장밖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교직사로의 진입은 서원 좌측편에 난 별도의 문간채를 통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① 우동사(祐東祠)
필암서원의 사우로, 북쪽에 河西 金麟厚선생, 동쪽에 鼓巖 梁子澂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단층 맞배집으로 전면 반칸은 퇴간으로 개방하였다.
② 청절당(淸節堂)
중앙은 대청, 좌우에 협실, 옛 진원현의 객사건물을 옮겼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을 인용하였으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다. 정면 중앙의 3칸에 대청을 들이고 그 양측으로는 각각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③ 확연루(廓然樓)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門樓)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진리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하는 서원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④ 경장각(敬藏閣)
인종이 하사하신 묵죽도(墨竹圖)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이며, 망이 쳐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귀공포 상부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를 꽂아 매우 화려하다.
⑤ 장판각(藏板閣)
하서선생 문집과 유묵 등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4)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산실 고산서원
진원면 진원리에 노사 기정진을 모신 고산서원이 있다. 기정진은 조선말기 성리학 6대가로 불리는 유학자로 호남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황과 사단칠정논쟁으로 유명한 기대승 또한 그의 조상이었다. 가학의 전통이 면면히 내려오다가 19세기 말에 활짝 꽃핀 것이었다. 그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몰두한 순수 재야유학자였다. 벼슬을 사양한 것이 40여 차례였으며 평생 벼슬에 나간 것은 6일에 불과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주기론과 주리론의 극단적인 대립을 극복하고 유리론(唯理論)으로 통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살았던 때는 19세기 말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민족이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였다. 그는 위정척사운동의 선구를 이루어 척사주전론(斥邪主戰論)을 내세우고 민중의 단결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실천운동은 그의 학문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알아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었지만, 탁월한 학문으로 ‘장안의 만개 눈이 장성의 눈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의 학문을 흠모하는 선비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는 정사를 세우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였으니 담대헌(澹對軒)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후손들이 고산서원을 세웠다. 서원이 설립된 것은 1927년이니 그렇게 고풍스러운 서원은 아니지만 노사 선생의 자취와 학문 활동을 온전히 담고있는 의미 깊은 곳인 것이다.
기정진이 1878년(고종 15)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994년 사당과 주변 담장을 보수하였다.
고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6대가의 한사람으로, 조선말기의 대표적 성리학자 기정진이 강학한곳에 그를 추모 기념하기 위하여 문인 후학들이 1927년 건립한 것이다. 현재는 그의 문인인 조성가․이최선․김녹휴․조의곤․정재규․기우만이 배향되어 있다.
서원경내의 부지면적은 484평으로 여기에는 7동의 건물이 있다. 특히 14평의 장서각에는 노사문집 목판 980매와 노사문집 12책(1질)을 비롯하여 많은 전적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기정진은 정조 22년(1798)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서 중추서원 건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대중, 호는 노사, 본관은 행주다. 8․9세에 이미 경사에 통했다는 천재로 순조 31년(1831)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순조32년(1832) 강릉참봉을 초임으로 시작하여 고종13년(1876)호조참판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오로지 장성의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후생들에 대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의 생활중에도 고종 3년(1866) 병인양란이 발발하자 조정에 방비의 계책을 상류하여 시행하게 함과 동시에 몸소 의거하고자 군사를 모집하다가 소모어사의 권유로 부득이 중지한 일이 있다.
고종 16년(1879)82세로 서거하고 순종 4년(1910)에 “문간공”의 시호가 하사되었다. 유저로 『납량사의』『노사문집』이 오늘날 전하고 있다.
5) 호남창의영수 기삼연
기삼연(1851~1908)의 본관(本貫)은 행주(幸州), 자(字)는 경로(景魯), 호(號)는 성재(省齋)이다. 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봉진의 4남으로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말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고 의병에 나섰던 기정진의 문하에서 재종질 송사 기우만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과거(科擧)를 응시하기 위해서 학문하기보다는 현실 사회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기삼연은 약 3백 명의 의병을 모아 기우만이 주도한 호남대의소에 참여하였다. 기삼연이 참여한 호남대의소는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기정진의 문인들이 주도하였다. 이 의병에는 장성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기삼연은 선봉장이 되었다.
남로선유사 신기선은 기우만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종용하였다. 기우만은 신기선의 설유에 순응하여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기삼연은 의병의 해산 종용은 임금의 뜻이 아니며 여기에서 군대를 해산하면 모두 화를 당한다고 반대했으나 의병 해산을 막지 못하였다. 그는 ‘서생과 일을 하지 말라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 의병 해산을 안타까워했다. 호남대의소의 의병은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움 한 번 갖지 못하고 해산했다.
기삼연은 고향인 장성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유랑하였다. 그는 한때 담양 금성면 손곡리 송진우의 생가에서 서당 훈장으로 지냈다. 그는 7살의 송진우를 가르치며 그에게 고하(古下)란 호도 지어줬다.
기삼연은 1902년 2월 딸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의병 재거(再擧)를 몰래 모의하다가 일진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의 명을 받고 내려온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로 압송되어 구금되었다가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었다. 한달 정도 그곳에서 구금되었다가 평리원장 이용태(李容泰)의 호의로 탈출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기삼연은 서삼면 축암리 송계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 수락산 기슭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과 가까운 고창 장성 영광 함평 등지의 지사(志士)들과 연락하여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였다. 그는 총기를 수집하고 화약기술자를 초치하는 등 거의(擧義)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대한매일신보와 조정대신들에게 글을 보내 거의 명분을 알렸다. 그는 국왕에게도 상소하여 자신의 거사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기삼연은 1907년 9월 수록산 석수승암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그는 대장에 추대되고 여기에 영광의 김용구, 함평의 김태원, 임실의 이석용, 장수 전수용 등이 참여하였다. 김익중은 종사관 겸 참모역할을 맡았다. 기삼연은 격문을 발하여
"백성 가운데서 왜적 한 명을 잡은 사람에게는 상금 일백량을 준다."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는 적과 같으니 용서할 수 없다."
"왜적에게 의병 안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도운 자는 극형으로 다스린다."
는 등 의병에 동참할 것으로 호소하며 의병에게 엄한 규율을 적용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에 참가한 의병은 기삼연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단일한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기삼연은 비록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이었지만 그 부대를 일사불란(一絲不亂)한 단독체계로 지휘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실제로 여러 독립 부대의 연합 조직과 같았다.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한 특정 인물은 단위부대를 지휘하고 독자적으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기삼연 봉기 이후 호남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의병장들이 봉기했다. 그 부대는 기삼연 부대와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으며 활동하였다.
기삼연이 이끈 의병부대는 영광읍으로 나아가 적과 전투를 벌였고 고창 문수사로 옮겨갔다. 문수사에서 기삼연과 김태원은 밤늦도록 앞으로의 항일투쟁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9월 16일 밤 가을비가 내렸는데 일본군경은 어둠을 이용하여 문수사에 들이닥쳤다. 김태원의 활약으로 의병부대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9월 24일 장성군 삼계면 수각리에서 기삼연은 의병의 대열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기삼연의 의병부대는 무장, 고창에서 일본군과 싸워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는 10월에 의병을 이끌고 법성포에 들어가 주재소 우편 취급소 일본인 상점들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일본인들이 그곳 창고에 쌓아둔 식량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법성포에는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거주하였고 이들을 우한 주재소 우편취급소 상점 등이 갖춰졌다. 기삼연의병부대가 일본인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물러났다. 기삼연부대는 초기에 가는 곳마다 적과 싸워 이겼지만 일본군의 추격과 공세가 심해져 전세가 어려워져 갔다. 장성 오동촌에서 적과 싸웠고 그 후 백양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영광읍 남문 밖에서 일본군과 싸워 쫓긴 적도 있었다.
1908년 1월 말(양력) 기삼연의 의병부대는 담양읍을 습격하였다. 담양읍내에 있던 우편소 세무서 군아 등을 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들 기구는 일제의 조선인들에 대한 침략과 탄압의 하부기관이었다. 기삼연은 부대를 이끌고 금성산성에 들어가 겨울의 혹한(酷寒)을 피하고 설을 지내려고 했다. 금성산성은 천험의 요새이며 예전부터 외적의 침입시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하기 위해 기삼연의 의병대는 금성산성에 들어갔지만 추위에 시달리고 식량이 떨어져 기세가 약해졌다. 일본군은 기삼연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60여 명의 의병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다리가 좋지 않았던 기삼연은 일본군의 총격에 부상을 당하여 통령 김용구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순창 복흥산에 들어갔다. 그는 6촌 동생 기구연의 집(순창군 복흥면 조동마을)에서 요양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기삼연은 가마에 태워져 광주로 압송되었다. 기삼연의 압송소식을 들은 김태원은 발빠른 3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경양역까지 추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의병장 기삼연을 탈옥시키려는 의병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군경은 의병들이 사방에서 담양에 집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일본군경은 의병장 기삼연을 그대로 살려두기 어려워 빨리 처단하려고 했다. 일본군경은 정당한 법적인 절차 없이 의병대장 기삼연의 처형을 서둘렀다. 일본경찰은 드디어 경무서(경찰서)에 갇혀 있던 기삼연을 광주 서천 백사장으로 끌고 나갔다. 기삼연은 일본경찰의 심한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기삼연은 죽음을 앞두고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의병을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내 몸 먼저 죽어가니, 일본을 삼킬 옛날의 꿈 허사였네
그가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 함축적인 말이었다. 그는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거나 일본의 침탈기구를 습격하여 백성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했으나 이 땅에서 일본을 축출하는데 이르지 못하였다. 1908년 2월 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고 숨을 거두었다.
기삼연은 총살당한 후 그 시신이 백사장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일본군경의 감시와 탄압이 두려워 기삼연의 시신을 거둬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광주에 살던 안규용은 관을 마련하여 유해를 거두었다. 그는 기삼연의 유해를 서탑동에 가매장하였다. 그 후 일본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기삼연의 업적을 높이 치하하고 목비(木碑)를 세워 주었다. 그 목비에는 ‘호남의병대장기삼연지묘(湖南義兵大將奇參衍之墓)’라고 새겨졌다.
그의 묘는 지금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 뒷산에 있다. 재종손인 기산도가 을사오적 암살사건으로 복역하였다가 풀려난 후 기삼연의 묘를 서탑동에서 장성군으로 이장하였다. 기삼연은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