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9. 보성군수 안홍국, 안골포해전에서 전사하다 - 여수 충민사에서, 김세곤 글 )

김세곤 2013. 1. 16. 02:53
호남정신 뿌리를찾아-원균, 선조 신임 얻으려고 비겁한 작전 수행
9. 보성군수 안홍국, 안골포해전에서 전사하다 - 여수 충민사에서(1)
입력시간 : 2013. 01.16. 00:00



충민사 충의문 (내삼문)

밥짓는 왜군 잡아 풀어준 뒤 뒤에서 공격

정예 30만명 조직해 양동작전 제안 '황당'

여수 충민사를 간다. 충민사는 이순신이 죽은 후 3년 뒤인 1601년에 세워진 이순신을 모신 최초의 사액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보다 62년, 아산 현충사 보다 103년 먼저 건립되었다.

홍살문을 들어가기 전에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적힌 표석을 보았다. 나라를 구한 것은 호남이었다. 1597년 7월16일 칠천량 해전으로 수군이 몰살한 지 두 달 후인 9월16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전라도 사람들과 함께 이룬 명량대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이어서 내삼문인 충의문을 지나 사당으로 들어간다. 사당 안에는 가운데에 이순신, 왼편에는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1555∼1597), 오른편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의 영정과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안홍국은 1597년 6월19일 안골포 해전에서, 이억기는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먼저 2월26일에 원균이 이순신으로부터 삼도수군을 인계받은 후의 조선 수군 동향을 살펴보자.

3월8일에 통제사 원균은 거제도 기문포에 일본의 전선 3척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음날 조선 수군이 출병하여 살펴보니 왜군은 상륙하여 밥을 짓는 중이었다. 원균은 투항한 왜군 남여문 등을 보내어 이들을 회유하자 숨어 있던 왜적 20여 명이 나왔고, 남여문이 왜군 우두머리와 대화를 하자 숨어 있던 왜적 80여 명이 모두 나왔다. 안골포 만호 우수, 고성현령 조응도, 거제 현령 안위 등이 왜선에 올라가 항복을 받았고, 그 중 왜군 우두머리는 왜군 7명을 거느리고 통제사의 배로 올라갔다. 원균은 그들에게 술을 주고 배를 타고 떠날 것을 허락하니 왜군들은 여러 번 감사하면서 2대의 배에 나누어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왜군들이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가려는 즈음에 원균은 공격을 지시하였다. 고성현령 조응도가 가장 먼저 적선을 공격하니 왜군 20여명이 조응도의 배로 올라와 백병전을 벌이었다. 그 결과 조응도와 수군들이 부상당하였는데 이들은 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배에 구제되기도 하였다. 물로 뛰어든 조응도는 안골포 만호의 배가 건졌으나 잠시 뒤에 죽었다.

이윽고 왜군들은 고성현령의 배를 타고서 달아났다. 그 때 조선 함선이 포위하여 포를 쏘아대고, 적선에 불을 지르니 왜적들이 모두 배에서 뛰어내렸고 18명이 죽었다.

이 전투는 참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전투였지만 전공을 보고 받은 선조는 매우 흡족해 하였다. 선조는 원균이 임명을 받자마자 이순신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싸운 것을 칭찬하면서 원균과 그 부하들을 포상하도록 전교를 내린다.

그런데 이 전투는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전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밥을 짓고 있었는데, 원균이 일부러 술을 먹여 상대를 방심시키고는 뒤에서 공격하는 비겁한 수를 쓴 것이다. 또한 고성현령이 탄 판옥선이 탈취당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여수 충민사 사당에 있는 이순신과 안홍국 영정



게다가 일본 측은 이 전투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였다. 희생당한 왜군들은 조선과 우호관계에 있는 고니시의 부하들이었고, 이들은 사전에 양해를 받고 거제도로 나무를 베러갔다는 것이다. 고니시는 동원 가능한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였다.

더구나 일본의 항의 내용은 조선 수군이 거두었다는 전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수군은 적선 3척을 포획했다고 했지만 일본은 1척이라고 했으며, 조선 수군은 왜군이 80명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32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이 주장한 피해 규모는 조선에 보낸 공식항의였기에 일본이 자신들의 피해를 축소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결국 원균은 승전하였다고는 하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왜군의 격렬한 항의도 있었던 만큼 포상 논의도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한편 3월29일에 수군통제사 원균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한다. 그는 육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공격한 뒤에 수군이 부산을 공격하겠다고 보고한다.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 두 곳의 적을 친다면 수군 섬멸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 등지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저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나라 군병은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빼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만 명은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때는 육전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조정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선조실록 1597년 4월 19일)

원균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과는 너무나 다르다. 출전에 신중한 이순신을 비난하면서 적극적인 해상작전을 펼치겠다고 호언장담한 원균 아니었던가?

원균의 장계를 받은 비변사는 황당해 한다. 먼저 30만 명의 정병을 4∼5월내에 소집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임을 지적한다. 전쟁 조짐이 농후해진 6월15일에 병조가 명나라 장수에게 보고한 조선의 병력을 보면 육군이 12,600명이었고 수군은 5천명이었다. 전라병사를 한 원균이 이러한 군 병력을 모를 리 없을 것인데 한 달 만에 30만 명 동원 운운 하였으니 너무나 터무니없다. 다음으로 안골포는 포구이어서 육군이 진격할 수 있겠지만, 가덕도는 섬이라 수군이 아니고서는 전투를 할 수가 없는데 가덕도 점령도 육군보고 하라 하였으니 이 또한 무책임 한 것이다.

비변사는 이 문제는 도체찰사와 도원수가 처리할 일이지 조정에서 통제할 수 없다고 선조에게 보고한다. 선조는 전교하기를, “나의 뜻은 안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시험하여 보라고 하유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였다. 선조도 원균의 장계가 현실성이 전혀 없는 무모한 일임을 알았다. 어떻게 30만 명의 군사를 한 두 달 만에 모을 수 있단 말인가?

비변사의 지시를 받은 도원수 권율은 안골포와 가적도의 적세가 약한 것은 원균이 말 한 바와 같지만,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하면서 수륙병진 전략에 반대하였다. 여기에서 권율과 원균간의 견해 차이를 엿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무렵 왜군의 동향은 어떠했을까. 도요토미는 조선에 왜군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4월30일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덕도에 주둔하였고, 와카사카 야스히로, 카토 요시야키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5월에는 도도 다카도라가 조선으로 들어왔고 5월22일에는 전 군대가 오사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다시 간첩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6월설, 7월설 등 정보를 무수히 흘렸다. 이에 김응서는 일본이 대 병력을 출동시켜 전라도를 유린할 계책이 있음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왜적의 타겟은 호남이었다.

도요토미가 보낸 문서를 보면 5월 5일에 출발하여 4개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했는데 행장은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기 위하여 선봉으로 정해졌고 청정은 두 번째 부대로 안골포·가덕도의 왜병을 이끌고 차례로 진격하기로 했으며, 행장은 의령과 진주의 길을 거치기로 하였고 청정은 경주와 대구의 길을 거쳐 이들 부대가 모두 호남으로 집결하여 전라도 지방을 모두 짓밟고 난 다음 다시 화평을 요구하기로 했다 한다.

새로 파견되는 군사 15만 명이 6월 초순에 나오면 진격할 것인데, 선봉부대는 6월1일에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장수들의 의견은 병기와 장비가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갑자기 출발할 수 없다 하여 7월 보름으로 결정했다. (선조실록 1597년 5월18일)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