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고봉, 퇴계의 성학십도 완성을 돕다

김세곤 2012. 3. 20. 14:35

2. 고봉, 퇴계의 성학십도 완성을 돕다.

 

퇴계와 고봉의 성리학 공부 수준을 살펴보자. 퇴계는 당시에 자타가 인정하는 성리학의 대가였다. 그는 1556년에 <주자서 절요>를 편찬하고, 1558년에 <주자서절요서>를 지었고 당시에 유행한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고쳐 쓸 정도였다.

 

고봉도 100권에 달하는 주자대전을 읽고 1557년에 주자대전의 핵심을 정리한 <주자문록>을 발간하였으니 고봉 또한 젊지만 상당한 경지에 이른 성리학자였다.

퇴계와 고봉의 13년간의 편지를 읽어 보면 퇴계는 고봉을 그의 학문을 전수하는 제자로서가 아니라 정통 주자학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반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런 증거의 하나가 퇴계가 156812월에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진달하면서 고봉에게 검토하여 달라고 한 점이다.

 

성학십도의 원래 명칭은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로 보통성학십도로 부른다. 이는 퇴계가 선조로 하여금 성왕 聖王이 되어 선정을 베풀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올린 것이며 유학사상을 체계화한 결정판이다.

 

성학십도는 서론의 내용이 담긴 진 성학 십도차 進聖學十圖箚에서 시작하여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되어 있다. 10개 조목은 첫째 태극도(太極圖), 둘째 <서명도(西銘圖), 셋째 <소학도(小學圖), 넷째 대학도(大學圖), 다섯째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여섯째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일곱째 인설도(仁說圖), 여덟째 심학도(心學圖), 아홉째 경재잠도(敬齋箴圖), 열째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다.

 

퇴계는 <성학십도>를 만들면서 고봉에게 잘못된 곳을 지적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직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당부까지 한다. 이에 고봉은 성학십도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퇴계에게 의견을 보낸다.

그런데 퇴계는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린 후에도 안동에서 수정 작업을 계속한다. 이 수정작업을 하면서 퇴계와 고봉 사이에 수차례 의견이 오고 간다.

 

1569년 윤627일 이황이 보낸 편지를 한번 읽어 보자

 

송구스럽게도 성학십도(聖學十圖)의 판각(板刻)을 이미 마쳤다 들었습니다. 만약 인쇄하여 반포하라는 명령이 계시면 혹시 관례에 따라 임금께 올리는지요? 만약 그대가 승정원에 있는 날에 이 성학십도를 올리게 되거든 추가로 고친 것 가운데 자잘하고 긴요하지 않은 곳은 번거롭게 아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심성정도(心性情圖)의 중도(中圖)와 하도(下圖)처럼 고친 곳 같은 부류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진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바라건대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에 대하여 고봉은 1569.7.21.자로 퇴계에게 답장을 보낸다.

성학십도의 판각(板刻)이 거의 끝났으므로 오래지 않아 인쇄하여 임금께 올린다고 합니다. 도형의 모양이 비록 크고 글자가 작지 않은 듯하지만, 두고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다만 보는 사람들이 평소에 이런 문자를 본 적이 없으므로 얼핏 보고는 많이 놀라니, 곁에 두고 보면서 의미를 터득하는 도움이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얼마 전 경연 자리에서 전교하기를 후일 불러서 성학십도를 강의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셨으나, 그 뒤에 경연관(經筵官)고친 데가 있어 아직 다 판각을 하지 못하였다고 핑계 대면서 후일을 기다리소서하였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성학십도>의 전체적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임금 앞에서 강의하기를 매우 꺼리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고봉의 편지를 받고 퇴계는 다시 15699월 그믐에 고봉에게 편지를 보낸다.

 

성학십도에 관해서 주신 편지의 여러 말씀을 보고는 지극하신 뜻에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도형이 비록 크지만 두고 살피는데 크게 불편함 없다고 하신 편지의 말씀이 진실로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끝내 그 폭이 너무 넓어서 책상에 놓거나 서가(書架)에 꽂는 데에는 이따금 불편함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도형의 크기를 약간 줄이고 글자를 더 빽빽이 써 넣어 3, 4행이 차지한 너비를 줄이면 알맞을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인쇄하여 임금께 올렸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한편 15701117일 퇴계의 마지막 편지에도 성학십도중 제6도인 심통성정도 心統性情圖를 고치는 문제에 대하여 퇴계가 고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고봉이 김이정을 통하여 그림 위치에 문제를 제기하였기에 퇴계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심통성정도>를 고치는 일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신 데 대해서는, 지난번에 김이정이 그대의 글을 적어 보내준 덕분에 이미 짤막한 논변을 지었습니다. 미리 한 장 베껴서 김이정에게 부쳤는데, 중간에서 유실(遺失)되지는 않을 것이니 오래지 않아 그대에게 전해 질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미 거기에서 갖추어 말했으니 지금 다시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대저 예(), () 두 자의 위치가 온당하지 않아 고치고자 한 것뿐입니다. 만약 이 두 자를 온당하게 자리매길 수만 있다면 옛도형을 그대로 두는 것이 제가 정말 원하는 바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치열하게 학문에 정진하면서 완벽한 이론을 완성하려 하는 퇴계. 정말 귀감이 되는 대 유학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