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1)

김세곤 2012. 3. 14. 15:25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13년간의 편지

 

 

 

퇴계와 고봉, 13년간 편지를 주고받다.

 

오남재에서 낙암으로 가는 길을 걸으면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만남에 대하여 생각한다.

 

퇴계와 고봉은 155810월에 처음 만난 이후 퇴계가 1570128일 퇴계가 별세할 때까지

 

13년간 백 여 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 유학사에서 가장 큰 논쟁인

 

사단칠정논변 편지도 들어 있다.

 

고봉 기대승은 1558(명종13) 10월 서울 서소문에 있는 이황의 집에서 퇴계를 처음 만난다. 그 때 고봉의 나이는 32세이었고 퇴계는 고봉보다 26세 많은 58세 이었다. 그 당시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학교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벼슬 없는 백면

 

서생이었다.

 

13년간의 편지소통은 퇴계가 먼저 시작한다. 퇴계는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낸다.

명언 明彦에게 절하고 답함. 기 선달奇先達

 

 

 

병든 몸이 문 밖을 나가지 못했는데 어제 찾아 주어 만나고 싶어 하던 소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몹시 고맙기도 하고 매우 부끄럽기도 하여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일 남행 南行은 결정하셨습니까? 겨울철에 먼 길을 떠나는 데는 몸조심이 상책입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대업大業을 궁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

 

 

155915일에 퇴계는 고봉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퇴계는 고봉을 만난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사단칠정에 대한 논란이 분분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퇴계는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에 고심을 하고 스스로 수정을 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사단칠정론에 관한 부분을 읽어 보자

 

 

퇴계가 고봉에게 준 글, 절략(節略)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설 四端七情說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에도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마는, 그대의 논박을 듣고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단 四端이 발 하는 것은 순리 純理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 하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은 겸기 兼氣이기 때문에 선이 있다.”라고 고쳤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1559814일에 고봉은 퇴계에게 사단칠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은 156611월까지 8여 년 간에 치열하면서도 심오한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15701117일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소통은 마무리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퇴계 이황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진 3 : 퇴계 이황 초상화 (천원 화폐)

 

 

퇴계 이황 (李滉 1501~1570). 우리는 일상에서 그를 자주 본다. 그는 천원 권 지폐를 통하여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조선의 유학자이다. 천원 권 지폐 앞면을 살펴보자. 오른쪽에 퇴계 이황[1501-1570]’ 이라고 적힌 작은 글씨와 함께 그의 초상화가 있고 왼쪽에는 위에 매화나무가 아래에 명륜당이 그려져 있다. 화폐의 뒷면에는 산수화와 도산서당으로 추측되는 집이 그려져 있고 집안에는 선비 한사람이 있다. 천 원 권 지폐에는 명륜당, 매화. 도학자. 도산서당, 산수화 이런 것이 어우러져 퇴계의 브랜드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먼저 이긍익의 <연려실 기술>에서 퇴계의 약력을 알아보자.

 

이황 李滉은 자는 경호 景浩이며, 호는 퇴계 退溪, 본관은 진보眞寶로서 온계溫溪 의 아우이다. 신유년(1501)에 나서 중종 무자년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 文純이다. 경오년(1570)에 죽으니 나이 70세였다. 선조 묘정 廟庭에 배향되고 문묘文廟에 종향 從享되었다.

 

매우 간략한 설명이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퇴계라는 호와 인간 퇴계의 모습이다.

 

먼저 퇴계라는 호의 내역을 살펴보자. 이황은 1545년 을사사화 후 병약 病弱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1546)가 되던 해 낙동강 상류 토계 兎溪 또는 土溪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동쪽 바위 위에 양진암 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이때 실개천 토계의 토 자를 퇴 退 자로 고치고, 자신의 호를 삼았다.

 

 

퇴계라는 호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그가 지은 오언절구 한시이다.

 

몸이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편안한데

학문은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이 시냇가 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니

흐르는 물 굽어보며 나날이 반성하네.

 

 

身退安愚分 신퇴안우분

學退憂暮境 학퇴우모경

溪上始定居 계상시정거

臨流日有省 임류일유성

 

안동시 도산면의 퇴계 종택 앞에는 이 시가 적힌 비가 있다.

 

사진 : 퇴계 종택 앞에 있는 퇴계 시

 

 

이 시를 읽으면서 은퇴와 출세 그리고 학문 공부에 대하여 생각하여 본다. 고금을 막론하고 출세하고 싶고, 이름을 남기고 싶으며, 잘 먹고 잘 살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만 그런 욕망은 화무십일홍이다. 진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은 정진하고 의연하며, 추하게 살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한 가지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퇴계의 삶에 대하여 알아보자. 퇴계는 150111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퇴계 태실은 원래 퇴계의 조부가 살 던 곳인데 지금은 진성이씨 온혜 종택이 되었다.

 

퇴계의 부친은 진사 이식이고 모친은 춘천 박씨이다. 퇴계는 8남매(71)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의성김씨와 결혼하여 31녀를 두었다.(그 중 1남은 일찍 죽었다). 부친은 첫 부인이 별세하자 다시 춘천박씨와 재혼하여 4형제를 두었다. 이 중 막내아들이 바로 이황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찬성공 이식은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병을 얻어 별세한다. 그때 부친의 나이 마흔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박씨는 32세였는데 전실 소생과 자기가 낳은 자녀 7남매를 혼자서 키워야 했다.

 

퇴계의 어머니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 갔고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을 공부시키었다. 어머니 박씨는 흔히 세상에서는 과부 자식들은 배우지 못할 것이라고 욕들을 하는데 너희들이 남보다 백 배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어찌 이 허물을 벗을 수가 있겠느냐며 행실을 바르게 할 것을 경계하였다. 그만큼 퇴계는 어머니로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퇴계는 12세에 작은 아버지 이우 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도연명 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도연명을 흠모하였다 한다.

 

19세에 이황은 성리학에 상당히 심취하였나 보다. 그가 지은 심사

心事 시를 읽어보자.

 

유독 초당의 만 권 책을 사랑하여 獨愛林廬萬卷書

 

한결같은 심사로 지내온 지 십여 년 一般心事十年餘

 

근래에는 근원의 시초를 깨달은 듯 邇來似與源頭會

 

내 마음 전체를 태허(太虛)로 여기네. 都把吾心看太虛

 

 

이황은 20세에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로부터 병이 많은 사

 

람이 되었다 한다.

 

 

퇴계는 가정적으로 불운하였다. 두 부인과 사별하였고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다. 그는 21세에

 

부인 허씨에게 장가들어서 23세에 아들 준이 출생하였고 27세에 둘째 아들 채가 출생하였

 

으나 첫 부인 허씨가 산후통으로 죽었다. 30세에 이황은 다시 권질의 딸 권씨에게 장가를 간

 

. 권씨 부인은 정신 질환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권질은 권전의 형이었는데 권전

 

은 기묘사류 己卯士類로서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어 죄를 입고 죽었다. 권질도 연좌되어 사화

를 당한다.

 

그런데 둘째 부인도 퇴계의 나이 46세에 죽고, 둘째 아들 채도 혼인을 앞두고 1548년에 죽는 불행을 겪는다.

 

 

퇴계는 그의 나이 34세 되던 해인 1534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는 43세까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중앙정계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154310, 43세의 이황은 종3품인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순탄하게 벼슬을 하던 퇴계가 낙향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미 어지러워진 조정의 분란 때문으로 보인다. 이 당시 세자 인종의 외척과 명종의 친어머니 문정왕후 외척 간에 갈등이 표면화하려는 조짐이 있었고, 성균관 친구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의 낙향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1545년 을사사화 후에 이황은 윤원형의 오른 팔인 권신 이기 李芑에 의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었다. 이후 그는 병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면서 외척 윤원형이 득세하였고, 봉은사 주지 보우가 병조판서로 등용되는 등 불교가 대접받고 유학이 괄시를 받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의와 지치의 세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황이 46세가 되던 1546, 이황은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 兎溪의 동암 東巖에 양진암 養眞庵을 얽어서 독서에 전념한다. 이때 토계를 퇴계 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불행하게도 이 해에 둘째 부인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단양군수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둘째 아들 채 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혼하여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퇴계는 둘째 아들과 정혼한 며느리를 다른 곳으로 시집가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단양에서의 근무는 9개월로 끝났다. 일설에는 이 시기 퇴계는 관기 두향과 애틋한 로맨스를 나누었다 한다. 도학자 퇴계와 기생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3>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다시 풍기군수로 근무한다. 154912월에 그는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賜額書院인 소수서원 紹修書院을 마련하였다. 전임군수 주세붕은 송나라의 주자가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때 유학자 안향이 공부하던 곳에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런데 퇴계는 이 서원에 편액 扁額·서적 書籍·학전 學田을 하사하여 줄 것을 경상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경상 감사가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이라 하고, 대제학 신광한을 시켜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고,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사진 :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이 일이 있은 후 이황은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관직에서 해임해 주기를 청하고, 회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50세가 되던 새해에 경상감사는 퇴계가 함부로 임지를 버리고 갔다 하여 두 계급 강등처분을 내렸다.

 

 

고향에 돌아온 퇴계는 퇴계 서쪽에 한서암 寒栖菴을 지었다. 그런데 퇴계는 큰 슬픔을 맞는다. 형 이해 李瀣가 귀양 가는 도중에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는다.

 

이해(李瀣 : 14961550)는 작은아버지 우 에게 이황과 같이 글을 배웠다. 그는 1525년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33년에 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좌승지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그는 대사헌· 대사간 · 예조참판을 지내고, 이 해에 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李瀣는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권신 이기 李芑가 우의정에 발탁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기 李芑는 그를 원망하였는데 이 일이 나중에 화근이 된다.

 

1545(명종 즉위)에 이해 李瀣는 강원도관찰사,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의 최측근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루된다. 그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화를 모면할 수 있다고 그에게 권하였으나 그는 거절한다. 다행히도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곤장을 맞고 귀양 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별세하였다.

 

 

이때부터 이황은 은퇴를 더욱 결심한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그냥 가만두지 않았다. 52세 때 그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다.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된 것이다. 3년간을 대사성으로 근무한 퇴계는 55세 되던 해에 병으로 세 번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그는 다시 58세인 15587월에 명종의 부름에 별 수 없이 서울로 가서 성균관 대사성과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때 퇴계와 고봉은 서울 서소문의 저택에서 처음 만나고 사단칠정논변의 시작과 함께 13년간의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