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 박광전

죽천 박광전 기행 23회, 보성군청 홈페이지, 김세곤 글

김세곤 2012. 2. 7. 00:18

제23회 죽천 박광전, 1566년 겨울에 퇴계 이황을 만나다. (2)
작 성 자 김세곤 등록일 2012/02/06 조 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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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죽천 박광전, 1566년 겨울에 퇴계 이황을 만나다. (2)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난 1545년은 격동의 시기였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일파는 몰락하고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였다. 20살의 죽천은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과거 길에 올랐다. 그는 임백영 任百英과 함께 과거 가는 길에 올랐는데 임백영은 죽천과 친한 친구로서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사람이다.

두 사람은 길가에서 쉬다가 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 (1496-1568)을 만난다. 임억령은 이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죽천의 타고난 기품과 자질이 남다른 것을 사랑하였다. 석천은 박광전에게 “군자는 마땅히 자기 몸을 단속하고 자신을 규제하여 (檢身律己) 중후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죽천은 그 말을 듣고 곧 감복하여 항상 잊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몸가짐의 신조로 삼았다.

그러면 여기에서 석천 임억령에 알아보자. 석천 임억령은 1545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당시 이조판서였던 동생 임백령 林百齡의 권유를 뿌리친 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전라도로 낙향한 선비이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好在漢江水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安流莫起波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한 직후, 수렴청정을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친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당을 모두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 윤원형 일파의 오른팔인 임백령은 형 임억령에게 이 모의를 알리고 함께 일하기를 권유한다.


임억령은 아우인 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 나온 동생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준다. 괜스레 외척들이 붕당이나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죽천이 석천을 만난 것은 석천이 전라도로 낙향하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1545년 11월 7일의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산군수 임억령이 신병으로 사직원을 내니 윤허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 실록에 사관은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쾌히 멀리 떠나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니 그의 동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한편 전라도로 낙향한 임억령은 해남, 창평, 강진에 별장을 두고 자연 강산을 즐기며 산수 유람을 한다.


임억령은 시문에 뛰어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30살이 된 1525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1544년에는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 5월에 임억령은 동생 백령의 추천에 의해 원종(原從) 공신의 녹권(錄卷)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산골 외진 곳에 가서 제문을 짓고 녹권을 불사르며 시를 읊었다.


대나무가 늙었으니 베어 쓰이는 것 피하였고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


누가 송죽과 같이 지조를 같이 할꼬


깊은 골짜기에 머리 흰 늙은이로다


竹老元逃削 松高不受封


何人與同調 窮谷白頭翁


이 시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지조를 위해 형제간의 우애도 끊고자 하는 석천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1554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1557년에 담양부사로 부임한다. 1560년에 그는 담양부사 직을 사직하고 담양 성산 아래 식영정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 이 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송순,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다. 특히 석천과 하서, 고봉과 송천을 성산 사선(四仙)이라 하였고,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식영정 사선이라 하였다.

한편 담양 식영정(그림자도 쉬고 있는 정자) 마루에는 식영정기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도 석천이 지었는데 그의 그림자 쫓기 글은 장자의 기품이 가득하다.


석천은 3,000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문의 종주였다. 시 솜씨는 이백을 닮았고 만년에는 두보의 시법을 터득하였으며 문장은 장자의 남화경을 근본으로 하였다. 그는 세속에 얽매임이 없는 도인이었다.


눈은 도를 사색하느라 감았고


머리는 세속을 싫어해 숙였도다.


스스로 장주(莊周)의 학문을 체득하니


영광과 괴로움이 하나로 여겨지네.


석천 임억령의 시는 담양의 식영정 이외에도 면앙정, 소쇄원, 장성 관수정, 광주 풍영정등 광주, 담양, 장성 지역 여러 곳에 걸려있다.


그의 신위는 해남 해촌서원과 화순 도원서원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