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 박광전

박광전 인물 기행 21회 , 정유재란 의병장 , 김세곤 글 보성군청 연재

김세곤 2012. 1. 24. 17:47

제21회 박광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 (6)
작 성 자 김세곤
일 자 2012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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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수령들이 먼저 피신하다.

각 고을의 수령들은 고을을 지키려 하지 않고 그들이 먼저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공직기강이 엉망이었다. 국난을 수습하여야 할 공무원들이 먼저 도망치다니, 참 한심하다.


1597년 10월13일의 선조실록에는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전라도 수령들에 대한 보고가 실려 있다.


선조 93권, 1597년 10월 13일(경오) 7번째 기사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들에 관해 보고하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장계하기를,

“도내에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들이 많지만 선후와 원근의 차등이 없지는 않습니다. 길이 막혀 소식이 불통하므로 근처에 있는 각 고을만 우선 소문에 의해 기록해서 아뢰고, 나머지 각 고을 수령들은 뒤에 듣고 보는 대로 아뢸까 생각합니다. 바닷가의 각 관아는 육로(陸路)와 같지 않아서 창고의 곡식을 미리 조치해 산실되지 않게 할 수가 있는데, 대개 다 헛되이 버려서 난민들이 차지하게 하거나 기회를 틈타 도적질을 해서 피란하는 자산을 삼기도 하니, 극히 분통합니다. 우선 더 조사하여 아뢸까 생각합니다. (중략)”


관아를 버리고 도망한 수령에 대하여 황신이 아뢴 것은 다음과 같다.

“여산 군수 이o은 관아를 버리고 피신했다가 이제야 관아로 돌아왔고, 전주 부윤은 성을 버리고 피신하였다가 왜적이 경내에 이르자 타도로 피난 갔으며, 전주 판관은 성을 버리고 피신하여 간 곳을 알 수 없고, 익산 군수는 관아를 버리고 순찰사의 진중으로 갔다가 함께 금산으로 가는 도중 왜적을 만나 타도로 달아났었는데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습니다. 김제군수는 적을 만나 피신하였다가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고, 만경 현령은 가장 먼저 관아를 버리고 경내에 피신했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으며, 임피현령은 가장 먼저 관아를 버리고 경내에 피신했다가 조방장의 진중으로 갔었는데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습니다. 용안 현감은 경내에 피신했는데 적이 경내를 침범한 뒤에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함열 현감은 전주가 함락되자 경내에 피신했다가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으며, 옥구 현감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조방장의 진중으로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습니다. 부안 현감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지금은 돌아왔고, 무장 현감은 경내에 피신했다가 적이 고을에 들어온 후에는 섬 속으로 피난했으며, 영광군수는 경내에 피했다가 왜적이 경내에 침범한 후에는 섬 속으로 피란했고, 고창현감은 왜적이 본도에 침범하자 남원이 함락되기 전에 관아를 버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읍현감은 관아를 버리고 순찰사의 진아래에 와 있다가 이미 관아로 돌아갔고, 고부군수는 경내에 피신했다가 적세가 핍근해 오자 섬 속으로 피란했으며, 금구현감은 타도로 피란했다가 이제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태인 현감은 타도로 피란하였는데 지금도 있는 곳을 알 수 없습니다. 고산 현감은 경내에 피란했다가 지금은 관아로 돌아왔고, 금산 군수는 왜적이 경내에 들어오자 타도로 피란했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에 돌아왔으며, 무주 현감은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진안 현감은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으며, 장수 현감 강복성은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관아로 돌아왔고, 옥과 현감은 타도에 가서 피란하다가 지금 비로소 내려왔으며, 진원현감은 벼슬을 버리고 순찰사 진하에 있는데 왜적이 고을에 가득하여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평창현령은 왜적이 경내에 들어올 때 최후에 피신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었는데 가까스로 도망해서 지금은 도내에 있습니다.”


이 보고에 대하여 비변사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 1597년 10월13일자 선조실록을 계속 읽어 보자


선조 93권, 1597년 10월 13일(경오) 8번째 기사

관아를 버리고 도피한 수령들을 등급을 달리하여 처벌하기로 하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관아를 버리고 도피한 수령에 대해, 대의(大義)로 말한다면 봉강(封疆)을 맡은 신하는 봉강에서 죽어야 하니 적병이 접근해 오더라도 죽음으로써 관아를 지키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직분인데 근자에는 남보다 뒤질세라 도망하였으니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중에도 경중의 차이가 없지 않으니, 왜적이 접경에 이르지 않았는데 먼저 도피하여 멀리 타도로 가서 관곡(官穀)을 산실하고 군민(軍民)을 흩어지게 한 자는 그 죄가 가장 중하고, 성지(城池)가 지킬 만한 데도 지키지 못한 자는 그 죄가 또한 중하며, 적병이 경내에 들어와 방어할 수 없어서 잠깐 도망했다가 적이 물러가자 바로 돌아온 자는 그 죄가 조금 경하니 모두 일률적으로 논단할 수는 없습니다.


관아를 버린 수령 중에 박oo와 박oo은 이미 잡아다가 추국하였고, 전주 판관과 용안 현감은 타도로 피난하여 간 곳을 알지 못하니 우선 잡아다가 추국하고 교대할 사람을 차출해야 하며, 나머지 수령들도 다시 조사하여 경중을 분별하여 계문한 뒤에 처치하겠습니다. 그 중에 고창 현감은 왜적이 본도에 침범하여 남원이 함락되기도 전에 관아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지금은 종적을 모른다 하니 그 죄가 여러 수령 중에서도 가장 중하여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선전관을 보내서 찾아서 잡아다가 법으로 다스려 여러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일깨워야 합니다. 진산 군수는 문음(門蔭)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관아에 남아 있었으니 이도 귀한 일인데 분발해 왜적을 치다가 살해당하였고 처자도 사로잡혔으니, 더욱 측은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포상해서 권징(勸懲)하는 법을 보여줘야 하니, 이러한 사연으로 하서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박광전, 의병장으로 나서 동복전투에서 이기다.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이나 지역을 위수하여야 할 관리들이 나라와 지역을 버리고 도망 갈 생각을 하고, 왜군에게 달라붙은 백성들도 생기는 판에 박광전은 그러하지 않았다. 박광전은 그를 따르는 제자와 양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다시 박광전 연보(1597년)를 읽어 보자.


그때 생원 박사길이 숲속에서 나와 말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의병을 일으켜서 국가의 일에 죽는 것이 옳소이다.”하였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선생은 어른으로 다른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지 오래입니다. 원컨대 선생께서 의병장이 되어 대중들의 마음에 호응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죽천 선생은 이렇게 답하였다. “난리는 날로 급박해지고 나의 병세도 날로 위중하니 나는 곧 죽을 것이요. 그러나 한 줄기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맹세코 이 왜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는 없소.” 하였다. 마침내 함께 결속을 다진 뒤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


바야흐로 의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박광전은 전 판관 송홍렬을 의병 부장으로 삼고, 둘째 아들 박근제를 종사관으로, 박사길, 박훈등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런데 10월에 부인 문씨가 모후산에서 세상을 떴다. 화순에 있는 모후산은 바로 천봉산 근처에 있다. 죽천은 부인 문씨가 별세하자 비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충의로운 분노가 맹렬하게 격동하여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박광전은 박사길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동복(지금의 화순군 동복면)으로 들어갔다.

다시 <죽천집>의 박광전 연보를 읽어 보자


10월에 숙부인 문씨가 모후산에서 세상을 떴다. (중략) 선생은 비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병세가 날로 깊어 갔으나, 충의로운 분노가 맹렬하게 격동하여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박사길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동복으로 들어갔다.

부장인 전 판관 송홍렬을 시켜 용감한 병사를 이끌고 곧장 왜적의 소굴로 쳐들어가게 하여 적을 놀라게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의병의 기세가 점차 진동하니 산과 바다로 도망가 숨었던 수령들은 그가 세운 공을 시기하여 마침내 막고 나섰다.

11월18일에 별세하시었다. 이 무렵 감사 황신이 수령들의 무소 誣訴를 듣고 선생을 불러 힐문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진원에 들렸다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떴다.




10월에 박광전이 이끄는 의병은 동복에서 왜적을 물리친다. 보기 드문 승리였다. 값진 승리였다. 그 당시에는 의병으로 나선 이도 거의 없었지만 설령 나섰어도 패전하여 순절한 의병들이 많았다. 의병으로 나서 순절한 장성의 윤진과 변윤중이 그랬고, 구례 석주관 전투에서 순절한 칠의사가 그러했다. 그런데 박광전이 이끄는 의병은 동복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이는 송홍렬이다. 그는 고흥 사람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중에 평해군수를 제수 받았다. 보성사람 박훈도 동복전투에서 왜적 10여명을 참수하는 등 공로를 세웠다. 박사길 또한 공을 세웠다. 그는 능주 사람으로 158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이 되어 임계영과 함께 남원으로 진군하였고, 금산 무주에서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와 함께 왜적을 참살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박사길은 박광전의 의병에 합류하여 송홍렬, 박훈과 더불어 화순동복 적벽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다. 애석하게도 그는 순천에서 대거 침입해온 적을 막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렇듯 박광전 휘하 의병들의 사기는 높았으며 왜적들은 일시 순천 쪽으로 물러났다. 따라서 화순, 보성 일대의 백성들은 왜군들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록들은 <호남절의록>에 나온다. <호남절의록>에는 박광전 사실 事實과 박광전과 함께 창의한 제공의 사실이 실려 있다.


그런데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를 이탈한 죄도 매우큰 데 마치 철면피처럼, 박광전의 공을 시기하여 전라감사 황신에게 모함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1562년∼1617년)은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 병조좌랑이 되고, 다음해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宋經略)을 모시면서 외교관으로서 일하였다. 그는 1596년 8월에는 통신사 명나라의 사신 양방형 · 심유경을 따라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그 후에 전라감사가 되었다.

황신은 박광전을 전주감영으로 불러 조사를 하였다. 박광전은 참담하였다. 의로운 일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관청에서 자신을 피의자 신분으로 죄인 취급을 하다니. 전주의 전라감영에서 조사를 받은 박광전은 화순으로 내려오는 길에 조상의 묘소가 있는 진원(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에 들렀다. 비참한 심정을 조상님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마지막 길을 예감하여서였을 까. 얼마 후에 박광전은 세상을 떴다. 이 날이 1597년 11월18일이었다. 선생의 나이 72세이었다.

임진왜란 7년간의 박광전의 일생은 그야말로 질곡의 역사이었다.
1592년 7월에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이 깊어서 참전을 하지 못하다가, 1593년 말에는 민생이 안타까워서 동궁이고 제자인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건의한다. 그리고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장이 되어 백성들을 보호하다가 한 많은 세상과 이별한 것이다.


박광전의 제자 우산 안방준은 박광전 행장에서 그를 호남 오현 五賢 중 한 사람으로 칭송한다. 이를 읽어 보자

아! 우리 호남은 본래 문헌의 고장으로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자는 오직 김하서 (김인후) 기고봉 (기대승) 이일재 (이항) 유미암 (유희춘) 그리고 우리 선생 (죽천 박광전) 뿐이다.

하서의 학문과 조행, 절의와 문장은 높아서 따를 수 없고, 고봉의 명쾌한 의논이나, 일재의 강하고 굳세어 굽히지 않음이나. 미암의 넓은 지식과 많은 문견도 또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나, 실천의 독실함을 논하자면 저 세분 현인이 우리 선생과 더불어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다만 이름과 지위가 미치지 못하여 세상에 아는 자 없으니 어찌 개탄하지 않으랴?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 말 할 수 있는 것이지 속인들과 더불어 말하기는 어렵다.


우산 안방준은 죽천 박광전이 실천의 독실함에 있어서는 다른 네 사람보다 훨씬 돋보인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 실천의 독실함은 바로 죽천이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에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의병활동이었다. .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나선 72세 고령의 박광전. 그는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민생을 걱정한 유학자였다 진정으로 절의 節義를 실천하고 체화시킨 실천사상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