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 박광전

죽천 박광전 기행 20회, 정유재란 의병장, 김세곤 글

김세곤 2012. 1. 23. 22:54

제20회 박광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 (5)
작 성 자 김세곤
일 자 2012년 0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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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전라도 침략 - 남원성 전투


이순신이 보성 열선루에서 추석을 지낸 8월15일 다음날인 8월16일에 남원성이 왜군에 의해 무너진다. 그리고 군관민 1만 여명이 살육 당한다.


7월16일 칠천량 전투로 조선수군을 완전히 몰살시키고 남해안을 장악한 왜군은, 울산 죽도성에서 회의를 열고 육군은 호남, 호서 지방을 완전히 점령하고 수군은 전라도 해안을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

왜적은 군대를 2개 부대로 나누어 우키타 · 고니시 등이 이끄는 5만6천명의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에 도착하도록 하고, 모리수원과 가토가 이끄는 6만 명의 우군은 거창, 안의, 진안을 거쳐 전주로 향하도록 하였다.


8월7일에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구례를 점령하였다. 석주관을 지키고 있던 구례 현감 이원춘은 적의 기세에 눌려 8월6일에 남원으로 퇴각한다.


8월12일에 고니시는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남원성에는 명군 부총병 양원과 조선의 접반사 정기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몰려오자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전라병사 이복남과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은 군사 1천명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으나, 진우충은 끝내 외면하였다.


명군 3천명과 조선군 1천명 도합 4천명의 조명연합군은 5만 명이 넘는 왜군과 사력을 다 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8월16일에 남원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 접반사 정기원,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이 모두 전사하였고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50여명을 데리고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왜군은 남원 사람들을 모두 죽이었다. 군인들은 물론이고 양민들도 모조리 죽였다. 이 때 죽은 자가 2,000명의 군인과 1만여 명의 주민들이다. 남원성 전투를 수행했던 일본 승려 쿄넨의 8월16일 일기에는 “성안 사람 남녀를 남김없이 죽이고, 생포한 자는 없었다. 비참하구나.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남녀노소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 구나”라고 적혀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에 위치하고 있는 만인의총은 남원성 싸움에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이다.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적이 있다.
그리고 근처에 남원성이 일부 복원되어 남아 있다.

한편 2천여 명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은 남원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8월18일에 전주에 입성한다. 남원 함락 후 이틀 뒤였다. 가토가 이끄는 왜군도 25일에 전주로 들어온다,


8월29일에 왜군 11만 명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9월3일에 공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진군하였다.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진군하면서 마을 마다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 코를 베어갔다. 코는 전리품의 상징이었다. 이는 도요토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군 한명에게 조선인 코 3개씩이 할당되었고 왜군은 코들을 항아리에 담고 소금에 절여서 도요토미에게 보내었다. 도요토미는 코 항아리 접수 증명서도 발행하였고, 지금도 일본 교토에는 코 무덤이 남아 있다.

서울은 또 한 번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선조는 황해도 해주로 도망 갈 계획을 세우면서 연거푸 사신을 보내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주에서 합류한 왜군 가운데 모리와 가토의 부대는 전주, 공주를 거쳐서 전의, 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흑전장정의 부대는 직산에 이르렀다. 이 때 명나라 경리 양호는 부총병 해생 解生으로 하여금 남하하여 진격하도록 명한다. 9월7일 동틀 무렵에 직산 稷山 소사 벌판, 금오평 金烏坪에서 명나라의 해생과 왜군의 흑전장정은 일대 격전을 벌인다. 그들은 여섯 번 싸웠는데 왜군이 대패하고 만다. 그리고 왜군은 도망쳐 경상도와 전라도 일부 해안으로 후퇴하여 관련 지역을 유린한다. 양민을 살상하고 가옥과 건물들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박광전,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


여기에서 이 당시 박광전의 행보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서, <죽천집>의 박광전 연보(1597년)를 읽어보자.


왜적이 또 다시 본도를 침범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남원이 이미 함락되어 길이 막혀 통하지 않으니, 우산 안방준과 더불어 천봉산 天鳳山으로 들어갔다.

혹자가 말하기를 “적이 이미 서울에 침입하여 대가 大駕의 소재를 알 수 없으니 인심이 흉흉합니다. 왜적을 맞아 들여 부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적을 끌어 들여 도륙하는 사람도 있어 사람의 생사가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하였다.



전쟁은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게 만든다. 왜적이 이미 서울에 침입하여 임금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런 유언비어가 난무한 것은 선조가 1597년 8월12일 비망기를 통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후궁과 왕자들을 황해도 해주로 피난 갈 계획을 세운 것”이 원인이었다. 선조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왜군이 북상을 하자 후궁과 어린 왕자들을 피신시키도록 비망기로 승정원에 지시한 것이다.


선조 91권, 1597년 8월 12일(경오) 2번째 기사

나인과 어린 왕자들을 해주로 피신시키도록 지시하다

비망기로 정원에 전교하였다.
“나인과 어린 왕자들을 우선 해주로 피신시키되 인마(人馬)는 사복시 차지내관(司僕寺次知內官)으로 하여금 조치하게 하고 선전관·금군·포수 약간을 선발하여 호송하도록 하라.”


이 소식을 듣고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이 연달아 연일 피신 중지를 상소한다. 마침내 8월15일에 선조는 후궁들의 피신을 중지시킨다. 선조는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치어 항복한 것이다.


선조 91권, 1597 정유년 8월 15일 (계유) 3번째 기사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왕자와 후궁의 피난을 중지시킬 것을 간하다

양사가 합계하여 다시 아뢰기를,

“후궁을 먼저 내보내는 일은 민심이 이탈하느냐 단합되느냐 하는 중요한 계기로서 천명(天命)의 거취(去取)와 종묘사직의 존망과 국가의 승패에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진정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성상의 밝으신 지혜로 이를 판단하지 못하실 리가 없는데 기필코 후궁을 먼저 피난시키려고 하는 것은 국사가 이미 기울어져서 어쩔 수 없는 처지라고 여기시어 그러시는 것입니까. 지금 적의 기세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아직은 깊이 들어오지 않았으니, 중국 장수와 협력하여 서울을 사수하면서 뒤에 나올 중국의 대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동요하여 인심을 거듭 잃는 일을 하십니까. 인심을 한번 잃으면 다시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생각으로는 ‘내가 서울을 고수하는데 왕자와 나인을 잠시 피난시키는 것이 왜 안 되는가.’ 하실 지도 모르나 이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임금의 거조를 모든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백만 인심의 거취는 오로지 임금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한번 후궁을 피난시키면 서울에 아직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과 먼 곳에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온 백성들까지 흙더미 무너지듯 와해될 것이니, 근본을 굳게 지키려 한들 또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예로부터 발란반정(撥亂反正)한 군주는 대부분 몸소 험난한 곤경을 겪은 뒤에야 안정을 찾게 되었지, 한편으로 방어하고 한편으로는 피난하면서 어려운 사태를 헤쳐 나갔다는 일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가 아침에 후궁을 내보내시면 저녁에는 도성이 텅 비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생각을 못하시는 것입니까.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후궁과 왕자를 먼저 피난시키라는 명을 속히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중지하라 하였으니, 뒤에 다시 생각하여 조처하겠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참, 한심하다. 민심 수습은 안 하고 피난 갈 생각만 하는 군주. 국난에 처한 군주에게 국난을 극복할 리더십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백성들도 매국하다.


조선 임금도 피난부터 먼저 생각하는 판에 백성에게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이율배반인가. 백성들 중에도 왜적에게 부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적을 끌어 들여 백성을 도륙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적에게 부역을 하고 왜적 앞잡이가 되는 사례는 조경남이 지은 <난중 잡록>에도 나온다. 1597년 9월15일 기록을 읽어 보자

9월15일 (전략) 이어서 전라우도로 내려가면서 모두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 의홍 등의 적은 순창ㆍ담양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ㆍ광주ㆍ옥과ㆍ동복(同福)ㆍ능주(綾州)ㆍ화순(和順)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키니, 달려가 붙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저자를 열어 교역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연도(沿道) 각읍의 왜적도 모두 이같이 하였다.

동복(同福)의 생원(生員) 김우추가 본현의 왜장에게 편지를 올려 이르기를,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한 호(戶)로 편입되어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끝에다 서를 지어 붙이기를

칼을 짚고 동해를 건너오니 / 杖劍渡東海
장군은 왕의 보필감이요 / 將軍王佐才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다면 / 殺人如不嗜
천하가 모두 돌아올 것이요 / 四海盡歸來 하였다.

그 뒤 난리가 평정되자 사람들이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으로 죄주었다.
이때에, “창전(昌全)ㆍ옥삼(玉三)ㆍ동이(同二)ㆍ곡일(谷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全)이란 것은 창평 한 고을 사람이 전부 들어갔다는 것을 말함이고, 3ㆍ2ㆍ1이라 함은 그 괴수가 옥과에는 셋, 동복에는 둘, 곡성에는 하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