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 박광전
죽천 박광전 기행 17회, 보성군청, 김세곤 글
김세곤
2012. 1. 21. 04:49
제17회 박광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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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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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 2012년 01월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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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산앙정_천봉산.jpg [1552]Kbyte / 다운로드[4]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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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침략 계획 일본은 조선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 임진왜란 4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왜군 수군을 이긴 것과,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마련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도요토미는 재침략 작전 지시를 세밀하게 내린다. 여기에는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를 공격하고 군인과 양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요토미는 일사분란하게 재침략 작전을 진행하였다. 군대를 1번 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2만1천명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부산일대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도 합류시키었다. 1597년 1월15일 왜군 선봉이 조선에 들어왔다. 가토, 고니시 등을 장수로 한 1만4천5백 명이 상륙하였다. 가토는 고니시보다 먼저 출전의 공을 세우기 위하여 1월14일 제1진으로 전선 130척을 끌고 다대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부장 미노베가 거느린 군사는 부산을 침략하고 이어서 양산을 점령하였고 주력군은 서생포에서 진지를 구축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선전관을 경기, 충청 양도에 보낸 다음 왜적과 대항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동시에 방어사 고언백을 경상도에 급히 부임토록 하였다. 이런 다음 예조정랑 정염을 사신으로 명나라 경략 형개에게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알리었다. 왜군은 먼저 동래, 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 김해, 진주, 사천, 곤양 방면을 왕래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도 조선의 급보를 받고 곧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 양호를 경리조선군무, 총병관 마귀를 제독으로 삼고 군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조정도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 휘하에 이덕형, 김수 등으로 흥복군을 창설케 하고, 8도에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또 작전 계획에 따라 장수를 파견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 방어사 권응수 등이 경주에 주둔하여 새재 길을 막고, 우병사 김응서로 하여금 의령에 주둔하면서 부산의 북쪽 길을 막고, 그 밖에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남원부사 임현 등은 모두 명나라 장수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토록 하였다. 왜군, 먼저 이순신 제거 계획을 세우다. 일본은 먼저 이순신을 제거 계획을 세운다. 왜군은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좋지 않고 선조가 이순신을 신임하지 않고 있으며, 조선 조정은 전쟁 중에도 동서 당쟁을 계속되고 있는 점 등을 간파하고 이순신을 죽일 반간계를 쓴다. 왜장 고니시는 일본 통역관이며 이중간첩 행세를 하고 있는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보내어 밀서를 전달한다. 이번 화의의 결렬은 가토의 탓이므로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가토는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상륙할 것이니 조선에서는 수군통제사로 하여금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면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 이 밀서는 고니시 등이 꾸민 간계임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응서는 중요한 첩보로 생각하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한다. 권율은 또 다시 이를 검토도 안하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요시라의 밀서를 그대로 믿고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린다. 권율은 1597년 1월21일 한산도에 가서 이순신에게 즉시 출정 하도록 명령한다. 조정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출전하더라도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스스로 가덕도 근처까지 수색을 하고 대규모 출전은 하지 않았다. 1차 간계에 실패한 일본 측은 다시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가 이미 거제도에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이순신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으니 원망스럽다는 말을 전한다. 제2차 이순신 제거 작전이었다. 조정에서는 가토가 조선에 상륙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순신에 대한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그리고 선조는 격분한다.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아 가토를 놓쳤다고 생각한 선조는 2월 6일에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2월26일에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하고 후임에 원균을 임명한다. 서울에 도착한 이순신은 3월4일에 옥에 갇힌다. 그리고 문초를 당한다. 죄목은 1)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긴 죄 2)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3) 남의 공로를 빼앗은 방자한 죄이었다. 이런 죄명으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심지어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원로대신인 판중추부사 정탁둥이 나서서 이순신을 살려야 한다고 탄원한다. 신구차 伸救箚로 알려진 정탁의 상소문에는 “지금은 인재가 필요한 때입니다. 어떻게 하든 이순신의 생명만은 건져야 하니 제발 더 이상 고문만은 말아 주십시오.”라고 선조의 비위를 달래가며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이원익도 함께 상소를 하였다. 이러한 여러 대신들의 상소를 읽은 선조 임금은 일본의 재침략을 앞두고 이순신을 죽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였는지 4월1일에 이순신을 석방한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도록 한다. 이순신으로서는 쓰라린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참, 통탄할 일이다. 도요토미는 거짓 강화협상을 하여 죽을죄를 진 고니시를 정유재란 시 왜군 선봉장으로 다시 기용하였는데 선조는 죄도 없는 이순신을 고문하고 백의종군시켰다. 참으로 한심한 조선의 임금이다. 백의종군의 길 1597년 4월1일, 옥에 갇힌 지 28일 만에 풀려난 53세의 이순신은 서울에서 권율이 도원수부가 있는 경상도 초계까지 백의종군 길을 걷는다. 슬프게도 그는 4월13일에 아산 근처에서 어머님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정식으로 상례도 치르지 못한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 길을 걸어 6월4일에 경상도 합천의 초계에 위치한 도원수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7월17일까지 머무른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 이순신 장군이 서울로 압송되는 시기에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조선 수군의 선제적 부산 공격 계획을 세웠다. 막강한 조선 수군이 부산을 공격함으로서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작전할 것을 명령한다. 4월에 조선수군은 조선 연해로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중도에서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수군의 부산상륙을 허용한다. 이어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6월18일 대소 군선 10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항하여 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서 안골포와 가덕 등지를 수색하고 해전을 벌여 적선을 나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 수군도 19일 보성군수 안홍국이 전사하고, 평산포 만호 김축이 눈 밑에 탄환이 박히는 등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안홍국(安弘國 : 1555∼1597)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왕명을 받들어 각 진(鎭)을 다니며 왕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 해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 등으로 전공을 세웠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함선 30여 척을 이끌고 안골포(安骨浦)·가덕도(加德島)의 적주둔지를 공격하다가 안골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그는 여수의 충민사(忠愍祠), 보성의 정충사(旌忠祠)에 제향되었다. 원균은 일단 한산도 통제영으로 귀환하였다. 7월초에 새로 건조한 일본전선 60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이 전선가운데 일부가 웅천으로 들어가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왜군 수군을 물리치도록 지시한다. 원균은 자신은 본영에 머무르면서 경상우도, 전라우도, 충청도의 세 수사로 하여금 웅천, 안골, 가덕 등지에서 출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세 수사는 7월4일 다시 출정하여 7월7일 밤을 이용하여 다대포에 진을 치고 8일에는 적선 10여척을 부수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수군이 계속하여 절영도를 향하여 항해하는 중에 왜군 수 백 척이 대마도로부터 밀려 왔으며, 원균은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격하라고 하였으나 배설은 전투를 벌여 군량미 200여석과 전선 수십 척을 잃은 채 물러난다. 이후 원균은 한산도 운주당에서 머문 채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곤양의 도원수 진영으로 부른다. 그리고 원균이 7월4일에 직접 출정하지 않은 것을 엄하게 꾸짖고 직접 전투에 임하라고 하면서 곤장을 친다. 한 나라의 해군 총사령관이 볼기를 까고 곤장을 맞은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권율의 엄명에 따라 원균은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출정을 한다. 원균은 볼기를 맞은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왜군을 선제공격한다. 원균은 7.12 새벽에 출발하여 칠천량을 거쳐 하룻밤을 보낸다. 13일 옥포에 도착하여 14일 새벽에 옥포를 출발하여 부산에 이른다. 그런데 왜군은 연안에서 조선 수군의 행로를 속속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왜적은 아예 싸울 생각은 안하고 조선 수군의 힘을 빼는 작전으로 일관하면서 가끔 기습공격을 전개한다. 원균은 부산 앞바다로 바로 진격하여 부산 - 대마도 간의 길목을 차단하려다가 별 소득도 없이 7월14일에 퇴진하였다. 이 때 일본 수군은 가덕도와 영등포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부산에 이미 정박하고 있던 500척으로 서서히 조선 수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원균은 가덕도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했으나 일본 수군은 이미 조선수군의 행동상황을 파악하고 계속 추적하였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 거제 영등포로 물러났다. 14일 밤새도록 후퇴하여 15일에 영등포에 이른 원균은 또 다시 복병을 만나 포구에 상륙하였던 장졸 400여명을 그대로 두고 칠천도로 퇴진 하였다. 칠천도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경이었다. 원균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은 후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날이 밝은 대로 수군과의 결전을 결정한다. 그날 밤은 보름이었지만 비가 크게 내렸다. 원균은 전선 4척으로 경계를 하도록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 경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을 기습공격을 한다. 조선 배 1대에 일본 배 5-6대씩 에워싸고 조선 수군의 배에 불을 지른다.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몰살하였다. 배도 모두 불탔다. 원균도 죽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도 전사하였다. 조선 수군의 배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가면서 가지고 간 12척 뿐이었다. 이 날이 7월16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