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 박광전
죽천 박광전 기행 13, 보성군청 홈페이지, 김세곤 글
김세곤
2011. 12. 28. 08:14
제13회 전라좌의병장 임계영, 전공을 세운 의병들을 상 주도록 하는 상소를 올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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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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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 2011년 12월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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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에 온 전라좌의병은 정말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자기 고향도 아닌 경상도에서 식량도 모자라는 어려움도 감수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그런데 정작 조정에서는 이런 호남의병들의 공로에 대한 포상이 거의 없었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은 휘하의 의병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에 부장 장윤과 의병들의 공로를 포상하여줄 것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여러 차례 올린다. 이 상소는 1593년 5월 24일 자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이를 읽어보자. 5월 24일. 전라 좌의병장이 상고(相考)할 일로 보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군인을 영솔하고 지휘하여 승전한 것은 실로 그때에 군사를 영솔한 장수의 공입니다. 부장(副將) 전 만호 장윤(張潤)은 무주ㆍ금산의 적의 세력이 바야흐로 치성하고 관군과 의병이 여러 번 연달아 패하고 여러 번 무너져서 인심이 겁내고 두려워서 감히 가벼이 범하지 못할 때에 몸소 앞장을 서서 적진에 드나들기를 제 집에 발을 들여 놓듯이 하여, 소굴을 점거한 왜적이 마침내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 장차 경성으로 달려가려 할 즈음에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공조 정랑 박성을 보내어 말하기를, “진주가 지금 장차 함락을 당하게 되었고 단성ㆍ삼가ㆍ산음ㆍ함양ㆍ안음ㆍ거창ㆍ합천등 여러 고을이 또한 위태함이 조석지간에 박두하였다.”하여, 구원을 청함이 매우 급하였습니다. 저 역시 몇 고을은 호남에 가까운 곳이니 적이 마구 몰아서 짓밟으면 화가 장차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므로 부득이하여 군사를 정돈하여 함양에 도달하니, 진주는 비록 함락을 면하였으나 개령의 적이 한창 치성하여 의병장 김면이 힘이 지탱하지 못하여 급히 글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와 더불어 합세하여 함께 나아가서 10월 20일에 부장 장윤으로 하여금 선봉이 되어 습격하게 하여 왜적의 머리 2개를 베었습니다. 11월 3일에 또 싸워서 쏘아 죽이고 머리 8개를 베었으며, 성주의 왜적이 또 치성하여 형세가 장차 덤벼들 지경이고, 이웃 고을의 의병장 정인홍이 여러 번 싸워서 불리하여 위급함을 알리는 사자(使者)가 하루 동안에 3번이나 왔습니다. 최경회의 군사는 그대로 개령을 지키고 우리 군사는 곧 성주로 향하여 같은 달 18일에 부장 장윤으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제, 길에서 적을 만나 접전하여 쏘아 죽이고 머리 2개를 베었습니다. 22일에 또 싸우고 12월 2일에 또 싸웠으며, 7일에 유인하여 싸울 때에 꾀를 써서 성 밑에 육박하니 말탄 왜놈 10여 명이 먼저 나오고 걷는 놈이 뒤따랐는데, 앞장선 왜놈 2명을 쏘아 거꾸러뜨리니 말탄 남은 놈이 놀라서 달아나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추격하여 쏘아서 또 4명의 왜놈을 맞혔습니다. 이튿날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내통하는 관인(官人) 황언이 정인홍에게 알리기를, “화살에 맞은 왜놈이 여섯인데, 즉사한 자가 5명이다. 그날 왜장이 서문으로 나오다가 말과 함께 참호 속에 떨어져서 오른팔이 뼈가 부러져서 거의 죽게 되매 적군들이 바야흐로 겁내어 소동한다.” 하므로, 왜군들의 사기가 꺾인 기회를 타서 성주를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같은 달 10일에 의병장 정인홍 및 관군의 여러 장수와 더불어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뒤 4일 만에 우리 군사가 약속과 같이하여 종일토록 죽도록 싸워서 모두 핏빛이 되었으며 성 밑에 쌓인 송장이 언덕과 같았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왜적의 머리를 탐내어 앞다투어 성 밑으로 달려갔더니, 궁한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칼날을 돌려 우리 용사 10여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장 장윤 또한 말이 피곤하여 달리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용맹을 떨쳐 돌입하여 한 화살에 한 놈씩 죽인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자, 적이 그제야 물러나 달아났습니다. 흉한 놈들 중에 죽은 자가 3분의 2는 되었는데 한창 싸울 때에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인 것은 낱낱이 들 수도 없으니, 성주의 수복이 눈앞에 있었는데, 경상도의 모든 장수들이 약속을 어기고 지원하지 않았으니 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 2월 2일에 왜적이 몰래 도망한 것을 정탐하여 알고 추격하여 부상현(扶桑峴)에서 만나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인 것이 4백여 명이며, 같은 달 11일에 장윤으로 하여금 군사를 옮겨 개령의 적을 쳐서 2백여 명을 쏘아 죽이고 우리나라 남녀 4백여 명을 구출하였습니다. 같은 달 15일에 또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였더니, 같은 달 16일에 적이 이내 도망하여 가므로 장윤으로 하여금 추격하여 왜적을 죽였습니다. 3월 26일에 또 선산의 적과 싸워서 죽이고, 4월 5일에 또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이며, 15일에 또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였습니다. 1592년 10월 사이에 개령에서 세운 전공(戰功)은 체찰사와 전라ㆍ경상 순찰사에게 보고하였고, 11월ㆍ12월 사이에 성주에서 세운 전공은 체찰사와 경상 우순찰사에게 보고하였으며, 지금 계사년(1593년) 2개월간의 군공(軍功)은 체찰사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의병 전공의 장계는 도사(都事)의 체찰사가 오로지 맡았다 하는데, 두 도의 순찰사는 혹은 장계하기도 하고 혹은 장계하지 않기도 하여 공을 세운 장사(將士)들이 아직까지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부장 장윤은 비록 무인이나 이 말을 듣고 기색을 보매, 다만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털 만큼도 공을 바라는 태도가 없으니 은전을 입지 못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군졸들의 경우는 낯 설은 경상도에 들어와서 해를 넘기고 고생하면서 생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왜군을 쏘아 죽인 공이 많이 있으니, 그들이 각자 세운 전공이 누락됨이 있다면 각기 원통해 하고 답답해 할 것입니다. 임진년(1592년) 11월 3일 이전의 전공은 은전이 이미 왔으나, 그 뒤 각일(各日)의 군공은 상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 체찰사와 구 체찰사가 교체될 때에 혹 유실된 폐단이 있었는지 염려되므로 부득이하여 각일의 군공을 다시 문서를 만들어 보고하니, 증거로 삼으시어 그 공에 대한 상을 내려서 군사들로 하여금 격려되도록 하여 주소서. 봉사(奉事) 최억남은 날래고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니라 분발하고 격동되어 장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니, 각별히 상을 내려 몸소 군사들에게 앞장선 공을 표창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상을 체찰사에게 아뢰나이다. ○ 전라좌의병장 신 臣 임계영은 진실로 황공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백번 절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올리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왜적을 방어하는 방책이 3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군량이요 둘째는 기계요 셋째는 전사(戰士)입니다. 군량이 준비되지 못하면 무엇으로 군사들을 먹이겠으며, 기계가 갖추어지지 못하면 무엇으로 적을 방어하겠으며, 군사가 날래고 용맹스럽지 못하면 무엇으로 승전하겠습니까. 이 3가지는 군사를 쓰는 데 크게 요긴한 것입니다. 3가지를 완전히 구비한 것에 힘입어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이긴 것은 아마도 창의(倡義)한 이들이 군사를 모집하고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 군량과 기계를 보급한 공이 아니겠습니까. 각 사람의 공이 이렇게 많음으로 전란이 평정되면 신이 대궐 뜰에 가 뵙고 그들의 공을 기록하여 관직으로 상을 주게 하려고 계획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들이 가득하고 군사들이 해체될 기약이 없으니, 신은 죽은 뒤에야 아뢰겠나이다. 그런데 군사를 먹일 양식과 전쟁에 쓸 기계가 거의 다되어 전투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진실로 통분할 따름입니다. 어리석은 신 臣의 계책으로는 의병을 일으킨 뒤에 군량을 지원하고 기계를 마련하며 전공이 있는 자에게 급히 상을 내려, 사람마다 이를 본받아 곡식을 헌납한다면 곡식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군사가 후퇴하지 않고 힘껏 싸워서 왜적에게 죽기를 달게 여기면 어찌 이기는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전라좌의병의 부장 전 만호 장윤과 우부장 훈련봉사 최억남은 몸소 군사들에게 앞장서서 죽음으로써 돌격하여 베고 죽인 것이 많으니 성주ㆍ개령이 수개월 동안에 수복된 데는 그들의 공이 큽니다. 그러나 이들은 강개히 분발하여 조금도 공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마는, 무지한 군졸들은 전라도에서 경상도에 깊이 들어와서 일 년이 넘도록 서리와 눈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웠는데도 아직까지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두 번째 싸움에 임할 때에는 불평하는 태도가 역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동안 세운 전공을 일일이 기록하여 책을 만들어 비변사에 올려 보내었습니다. 혹시 맡은 관원이 군무가 바쁘다 하여 아뢰지 못할까 염려되니, 지금 기록하여 보낸 책대로 일일이 전공을 논하여 그 공에 대하여 상주고 그 마음을 위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곡식을 헌납하여 군량을 보조한 자는 성명과 석수(石數)를 또한 뒤에 기록하였으니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합당하게 상을 내려주시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여 권면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사세가 급박하여 감히 아뢰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굽어 살피소서. 신은 지극한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이런 임계영의 상소에 대하여 비변사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신들이 임계영의 상소를 보니, 군량을 지원하고 기계를 갖추며 군공이 있는 사람에게 급히 상을 주어 사람마다 이것을 본받게 하여야 할 것인데도 아직 은전을 입지 못하여 마음에 불평한 생각을 품었으므로, 전공을 책으로 만들어 올려 보내며 군량과 군기를 헌납한 사람 역시 뒤에 기록하여 바치니 차례로 상을 주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것을 솟구치어 권면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습니다. 임계영은 의병을 많이 모아 영남에 깊이 들어가서 이미 성주ㆍ개령 두 고을을 수복한 공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 사람에게 아직 상을 내리지 않았음은 과연 잘못되었습니다. 군량과 기계를 갖추어 납입한 자도 아울러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후의 장계와 끝에 기록한 대로 예(例)에 의하여 상을 내려 장려하고 권면하는 뜻을 보여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비변사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 그는 정말 전라좌의병을 이끌 의병장답다. 전공을 세운 부하들이 나라로부터 포상이 없다면 더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 까. 아무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싸운다 하지만 공을 세우면 보상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어찌 막으랴. 유효기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