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박광전 기행 12회, 보성군청 홈페이지, 김세곤 글

김세곤 2011. 12. 22. 06:25

제12회 전라좌의병,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4)
작 성 자 김세곤
일 자 2011년 12월 14일
제12회 전라좌의병,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4)


1592년 12월 25일. 드디어 이여송이 이끄는 5만명의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마치 1950년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듯이. 명군 5만명은 당시에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보다 3배나 많았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곧장 평양성을 공격했다. 마침내 1593년 1월8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되찾았다. 왜장 고니시는 ‘퇴각하는 길을 막지는 말아 달라’고 애걸하면서 평양성을 빠져 나갔다.

의기양양한 명나라는 내친김에 서울도 되찾겠다고 조선의 모든 군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그 불똥은 전라도 의병들에게도 떨어졌다. 체찰사 정철은 임계영, 최경회 전라 좌·우의병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경상도에서 왜군과 싸우고 있던 두 의병장들은 서울로 올라 갈 준비를 했다. 이런 상황이 생기자 호남과 영남은 일시에 뒤숭숭한 분위기가 됐다. 언제 다시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영남 몇 고을 백성은 두 장수가 간다는 말을 듣고 집을 헐어 가지고 바위 구멍에 들어가 숨는 자가 잇따랐고 늙은이와 어린이를 붙들고 사방으로 가는 자가 여럿이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호남·영남의 선비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했고, 체찰사 정철에게도 호소했다. 먼저 임금에게 상소한 글을 읽어 보자.


'무릇 일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기회가 있는 것이니, 비록 일의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나 사람이 실로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장차 올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이미 이뤄진 세력을 헐어버리면 다만 일에만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화가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각 고을이 함께 무너졌는데 전라도 한 도만이 홀로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전라 좌우 의병이 있어 막아 준 까닭입니다.

의병이 일어난 처음에 금산·무주의 적을 쫓아서 침입하지 못하게 했고, 또 서로 약속해 서울로 함께 달려가려 할 즈음에 영남에 주둔한 적이 바야흐로 치성했습니다.

의병장 정인홍·김면의 군사가 감히 홀로 감당하지 못해 슬피 호소하며 전라 좌·우 의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므로, 임계영·최경회 두 의병장이 군사를 이끌고 거창·합천 등지로 달려가서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에 혹은 산성에 둔쳐서 진주의 적을 쫓는 데 협력했고, 혹은 요로를 지키면서 성주·개령을 나눠 공격해 날마다 싸우지 않은 적이 없고, 달마다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영남 6∼7고을이 온전히 살게 됐으니 이 두 장수의 공이 이것으로 봐도 큰 것입니다.

두 장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왜적을 맞아 싸웠고, 그 공이 아니었더라면 영남의 6∼7 고을은 이미 조선 땅이 아니었을 것이며, 6∼7고을이 버티지 못하고 왜적에게 들어갔다면 그 화가 또 호남까지 미쳤을 것이니, 호남이 없어지면 국가는 어디를 근거로 해 회복할 터전을 마련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호남이 마침 풍년을 맞아 창고가 가득 찼으니 이것은 하늘이 국가 회복의 근본을 도와준 것입니다. 북으로 짐바리를 운송해 길에 연달았고 동으로 양식을 운반해 끊이지 않게 대어주니, 왜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한 것도 이런 연유입니다. (중략)

이제 이뤄진 세력을 뭉쳐서 더욱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면 왜적이 감히 6·7고을에 충돌하지 못해 호남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이요, 호남이 온전하면 경상도의 왜적도 절로 물러갈 것이요, 경상도의 적이 스스로 물러나면 서울의 적이라고 어찌 홀로 보존하겠습니까.

이런즉 경상도 6∼7고을을 굳게 지켜서 적으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몰아가지 못하도록 함이 이것이 진실로 서울을 수복할 큰 기회입니다.

일의 성패가 여기에 있으며 왜적이 가고 머무는 것이 여기에 관계되니 임계영·최경회 두 장수의 거취가 어찌 중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적을 방비하는 계책이 호남·영남에서 조금 해이해져 들어올 틈만 있다면 적이 창고의 재물을 그대로 먹고, 무뢰배를 몰아서 군사를 삼을 것이니 그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비변사에서 두 장수가 쓸 만하다 해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오게 한다니 이는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의병이 한 걸음 물러나면 왜적이 한 걸음 나아올 것이요, 의병이 오늘 떠나면 왜적이 내일 올 것이니 6∼7고을이 아침에 도륙을 당하면 전라도가 저녁에 그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오늘날 위태로운 형세를 본다면 호남의 재력이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 수가 있고, 왜적의 진퇴가 역시 두 울타리의 견고함과 견고하지 못한 데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한갓 서울의 적을 급히 공격하는 것만을 충성이라 하고 울타리를 굳게 지킴이 곧 서울을 수복할 근본이 되는 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울타리를 뜯어 도적에게 아첨하는 실수에 가깝지 않겠습니까.(중략)

바야흐로 왜적의 형세를 막는 것을 진실로 늦출 수가 없는데, 감히 두 장수의 군사를 이동시켜 호남·영남이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헐어서 왜놈이 충돌할 기운을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리되면 회복의 터전이 다시는 여지가 없으니 가만히 생각하매 살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장차 닥쳐올 사세를 살펴 울타리의 군사를 철수시키지 않으시고 이미 이뤄진 형세로 인해 더욱 보존하고 지킬 계책을 굳게 해 주신다면 어찌 다만 두 도의 백성이 도륙을 면할 수 있을 뿐이겠습니까. 장차 국가가 회복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들은즉 명군이 경계에 들어오자 추한 종자들이 스스로 도망해 서울의 적이 모두 영남으로 모인다 하니, 마땅히 군사를 엄하게 배치해 굳게 지켜 합세해 적을 맞아 쳐서 그 기회를 잃지 않을 뿐입니다.

신들이 진실로 임금의 명령에 순종함이 순(純)이 되고 뜻을 거슬림이 역(逆)이 되는 줄을 알고 있으나, 삼가 오늘의 사세를 보건대 자못 평상시와 다르므로 감히 지엽을 가지고 근본을 보호하는 방책을 들어 전하에게 우러러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굽어 살피소서. 신들은 지극히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난중잡록, 1593년 1월.


그리고 체찰사 정철에게도 상소문과 비슷한 내용의 글을 올리어 전라 좌·우 의병이 그대로 경상도에 머무르도록 호소했다. 영·호남 선비들의 호소를 들은 체찰사 정철은 이런 사정을 상세히 적어 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또한 경상도 우순찰사 김성일도 장계를 올려 임계영·최경회 두 장수가 경상도에 머무를 것을 호소한다.

'지난해(1592년) 10월에 진주가 장차 함락되려 할 때에 신이 장악원 첨정 조종도와 공조정랑 박성을 보내어 호남 좌·우 의병에게 구원을 청했더니, 임계영·최경회 두 장수가 호남과 영남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는데 존망과 성패가 급하다 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서로 잇따라 응원했습니다.

전 주부 민여운이 또한 태인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 미처 참가하지 못했으나, 성주·지례의 경계에 주둔해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정인홍 등과 더불어 협력해 적을 쳐서 누차 접전해 적을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적이 자못 기운이 꺾여 숨고 나오지 못하므로 한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뢰해 거의 의각(猗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남 사람이 행재소에서 돌아와서 전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임·최 두 의병장을 불러 근왕하려 한다 하매, 두 장수가 기별을 듣고 바쁘게 곧 올라가려 합니다. 본도가 함몰된 나머지에 겨우 보존된 것이 5∼6곳의 피폐한 고을이니, 흉악한 적이 사면에 가득하여 반드시 집어 삼키고야 말려 합니다.

이때를 당해 호남의 군사가 비록 여기에 머물러 서로 응원해도 역시 염려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군사를 걷어 물러간다면 왜적이 응원이 없는 것을 알고 마구 덤빌 것이니, 이 도가 함몰되면 호남이 차례로 침범을 당할 것이요, 호남이 지탱하지 못하면 국가가 회복할 여지가 없어질 것입니다.

생각함이 이에 미치니, 마음이 찢어지려 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조정에서 십분 참작해 두 장수를 본도에 머물기를 허락해 보장(保障)을 견고하게 하도록 헤아려주소서.'

마침내 조정에서는 전라 좌·우 의병이 서울로 올라오게 하는 것을 중지했다. 이리해 전라 좌·우 의병과 경상의병 그리고 경상 관군은 경상도에 잔류하고 있는 왜군을 무찌른다.

드디어 1593년 1월 15일에 성주의 적이 철수했다. 2월 16일에는 개령의 왜적이 철병했고 호남·영남의 군사들은 여세를 몰아 선산의 적을 공격했다. 이즈음에 경상우병사 김면이 졸(卒)했다.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후임 경상우병사로 임명했다. 4월에는 선산의 적도 퇴각해 호남·영남의 의병과 군사들은 의령에 나아가 진을 쳤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전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