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죽천 박광전 기행 10, 보성군청 홈페이지, 김세곤 연재 글

김세곤 2011. 12. 19. 07:08

제10회 전라좌의병,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2)
작 성 자 김세곤
일 자 2011년 12월 02일
제10회 전라좌의병,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2)


전라도와 경상도 연합의병은 1592년 10월 중순 이후 경상우도에 남아 있는 왜적을 토벌한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 1528-1597)은 거창에 주둔하면서 전라우의병 최경회 군사와 함께 경상 의병장 김면과 협력해 개령의 적을 무찌른다. 그런데 성주에서 적과 싸우던 경상의병장 정인홍의 부대에서 임계영에게 지원요청이 왔다. 정인홍은 하루에 세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어 위급함을 전했다.
11월에 들어서 임계영은 거창으로부터 합천 해인사로 진을 옮긴다. 그리고 정인홍과 협조해 성주의 적을 친다. 가야산 해인사는 성주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다. 한편 최경회 부대는 거창에 그대로 머물러서 김면과 개령의 적을 공격했다.
전라좌의병 임계영 부대의 활약은 대단했다. 광해군의 사부 박광전의 큰 아들 박근효와 둘째 아들 박근제, 그리고 문위세, 장윤, 정사제, 소상진, 남응길 등 1천여명의 보성·장흥·순천 의병들은 11월18일 성주로 가는 길에 왜적을 만나 접전했다.
이 전투에서 부장 장윤이 왜적의 머리 2개를 베었다. 12월 7일에는 성 밑에서 적을 유인하여 성 밖으로 나온 왜적 10명 중 6명을 죽였다. 그리고 12월14일에는 하루 종일 싸워서 적의 시체가 성 밑의 언덕처럼 쌓였다. 우리 군사도 10여명이 피해를 입었고 적을 쫓던 소상진, 남응길등이 총탄에 맞아 죽었다. 보성출신 소상진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근왕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그는 삼례역에 이르러 김성일을 만나 영남으로 내려가 전라좌의병 임계영 막하에 들어갔다. 소상진은 ‘적을 보고 물러나면 어찌 의병이라 할 수 있으랴’ 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고 왜적을 닥치는 대로 참살하다가 갑자기 탄환에 맞아 죽었다. 남응길은 장흥 사람으로서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상중(喪中)이었다. 그런데 그는 임금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자 전라좌의병에 합류해 소상진과 함께 좌·우익을 이뤄 적을 쫓다가 적의 탄환에 죽었다. (소상진과 남응길에 관한 행적은 모두 ‘호남절의록’에 나온다)
이런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의 경상도에서의 종횡무진은 임계영을 경상의병장으로 잘못 표기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나게 했다. 학자들에게 꽤나 알려진 임진왜란 책 '재조번방지 권2'에는 임계영이 경상의병장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개령과 성주 모두 왜적의 저항이 너무나 거셌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의병만으로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이기기 어려웠다. 더구나 개령에 주둔한 왜장 우시안예(羽柴安藝)와 모리휘원은 개령 백성에게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령하기까지 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개령 백성에게 고하노니, 개령 백성들은 왜 돌아오지 아니하는가. 돌아와서 각기 그 생업에 안정해 농부는 제 농사를 지어 혹은 물을 대고 풀을 매며, 장사꾼은 장사하여 혹은 그 재물을 교통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옳다. 비록 깊은 산골에 있어 종적을 숨기고 1백 년을 지낸들 또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

그래서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과 정인홍등 경상의병장들은 체찰사 정철에게 경상우도의 왜적을 무찌를 군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정인홍 등이 호남 의병을 요청하는 호소문도 그 일환이다.'슬프도다. 바다 도적이 세력을 믿고 침범하매 경계에서 막아낼 사람이 없어 조선팔도 중에 일곱 도의 강산이 적의 손에 모두 함몰됐는데, 오직 전라도만이 잠식됨을 면했다. 이런 호남의 강토가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호남의 의병장들이 충의를 분발하고 격려해 의병을 모아 합한 힘이 아니었던가. 용성·금산 두어 성이 이미 왜적의 소굴이 됐다가 곧 섬멸되고 완산이 거의 먹힐 뻔하였는데 겨우 보존됐다. (중략) 정인홍 등은 각 고을이 붕괴된 나머지 분기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간신히 불러 모아 겨우 한 읍을 얻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 여름부터 겨울까지 지냈으니, 군사는 피곤하고 양식은 부족한데 여러 성을 점령한 왜적은 좌우에 벌여 있고 왕래하는 왜놈은 먼 데나 가까운 데에 가득하다. 부상당하고 굶주린 군사를 거느리고 한창 날뛰는 왜적과 대항하자니 이 또한 어렵도다. 근래에는 왜적의 세력이 더욱 거세서 이웃 고을에 개미처럼 모였던 놈이나, 상도(上道)에서 후퇴한 놈들이 모두 성주로 모여서 실로 수효가 많으니, 마구 침입할 조짐이 아침 아니면 곧 저녁에 닥칠 것이다. 행여 오늘 방어에 실패하면 겨우 남은 여덟·아홉 고을도 차례로 지키지 못할 것이니, 왜적들이 강토를 짓밟을 걱정은 역시 호남 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양(下陽)이 한번 함락되매 우(虞)와 괵(虢)이 따라서 망하고, 한단(邯鄲)이 굳게 지켜지니 조(趙)와 위(魏)가 함께 온전했다. 영남과 호남은 곧 우·괵의 하양이요 조·위의 한단이니, 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을 것인데, 막부에서 어찌 영남의 존망을 멀거니 쳐다보고 염려를 하지 않는가. 오직 생각건대 막부에서 평원군(平原君)의 사자[使]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강황(江黃)의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저 무용스런 군사들이 와서 경상도 한곳에 주둔한다면, 이것이 실로 입과 입술(脣齒)의 형세로서 남의 곤란함을 급히 살피는 의리라 할 것이다. (중략)하물며 지금 임계영·최경회 두 장수가 멀리 이웃 도의 위급함을 구원해 새로 칼날이 한창 날래고 피곤한 군사도 용기를 솟구치니 크게 승리할 기약은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원컨대 막부에서는 웅장한 계책을 쾌히 결단해 '시경' '무의편'을 읊고 와서 두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맞추고 힘을 한 가지로 하면, 본도의 사기(士氣)가 믿는 바가 있어 스스로 배가 될 것이며 충청도의 군사도 또한 서로 의지하여 떨칠 것이다. (중략)경계는 비록 호남·영남으로 갈렸으나 형세는 보거(輔車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처럼 뗄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이르는 말)처럼 서로 의지했으니 때를 놓치면 배꼽을 물어뜯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이는 깊은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니, 선비들은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 이런 경상우도의 요청에 따라 체찰사 정철은 운봉 현감 남간과 구례 현감 이원춘 등을 대장으로 삼아서 전라도 관군 5천여 명을 지원했다. 그들은 호남과 경상의병들과 함께 개령·성주의 왜적과 전투를 했다. 그러나 전라도 관군은 워낙 왜적의 저항이 크므로 성주성을 치다가 크게 패해 다시 전라도로 돌아왔다.
영남 의병장 정인홍 등이 호남 의병장 최경회 등과 약속하고 개령·성주에 주둔한 적을 공격할 것을 의논했다. 그래서 체부(體府)에 구원병을 요청하니 정철이 전라좌도의 운봉 등의 관병을 파견해 돕게 했는데, 도합 5천여명이었다. 그러나 성주 등지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해 돌아왔다.- <선조 수정실록> 26권, 1592년 10월 1일

영남과 호남의병 및 관군들이 경상우도의 개령과 성주의 왜적을 무찌르지 못한 것은 조선 군사들 간의 긴밀한 협조 체제가 이뤄지지 못한 탓도 있다. 1593년 5월 24일의 '난중잡록'에 기록된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의 보고서에는 1592년 12월 중순에 임계영 의병이 성주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경상의병과의 연합작전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12월 10일에 의병장 정인홍 및 관군의 여러 장수와 더불어 약속했는데, 4일 후인 12월 14일에 우리 군사가 종일토록 죽도록 싸워서 전쟁터는 모두 핏빛이 됐으며 성 밑에 쌓인 송장이 언덕과 같았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왜적의 머리를 탐내 앞다퉈 성 밑으로 달려갔더니, 궁지에 몰린 왜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칼날을 돌려 우리 용사 10여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장 또한 말이 피곤해 달리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용맹을 떨쳐 한 화살에 한 놈씩 죽인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자, 적이 그제야 물러났습니다. 흉한 놈들 중에 죽은 자가 3분의 2는 돼 한창 싸울 때에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인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성주의 수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 도의 모든 장수들이 약속을 배반하고 응원하지 않았으니 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전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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