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전라좌의병,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1)
1592년 10월10일, 김시민이 이끈 조선군과 곽재우· 임계영 · 최경회 등의 경상 · 전라 의병은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왜군은 창원, 김해 쪽으로 후퇴하면서 크게 움츠러들었다. 반면에 기세가 오른 영남 지역의 관군과 의병들은 이번 기회에 왜군에 점령당한 지역을 되찾기 위해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당시의 경상도 상황을 살펴보자. 왜적이 경상도에서 점거한 지역은 경상좌도에는 부산·동래·경주·밀양·청도·대구·영천·영산·창녕·현풍 등 열 고을이요, 경상우도에는 웅천·김해·창원·진해·고성·성주·개령·선산·금산·상주·함창·문경 등 열두 고을이었다.
전라우도관찰사 김성일과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 김면 등은 전라도 의병장 임계영과 최경회에게 경상도에 계속 남아 왜적을 같이 물리치자고 말한다. 지금은 전라도가 무사하니 경상도의 왜적을 쳐서 전라도를 더욱 온전하게 하자고 설득한다.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거의했고, 김면은 조식과 이황의 문하에서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의병장 임계영와 최경회는 이들의 간곡한 부탁에 경상도에 계속 머무르기로 한다. 이후 두 의병장은 장윤 · 고득뢰 등과 함께 경상 의병장 정인홍, 김면과 더불어 거창을 본거지로 해 개령과 성주의 왜적을 친다.
그런데 당장에 2천 여 명의 전라도 의병들이 먹을 식량이 문제였다. 이에 정인홍등 경상도 의병장들은 경상우도 선비들에게 양곡 지원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낸다.
'슬프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폐허가 된 지가 몇 달이며, 우리 임금께서 평안도로 파천하신 지가 지금 몇 달인고. (중략)
정인홍 등은 어리석은 생각에 격동돼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창의해 군사를 모아 회복을 도모했으나 군사를 거느린 지 반 년에 근근이 한 구역만을 지키고, 아직도 경상도에 주둔한 적을 섬멸하지 못하니 슬프고 분하도다.
그런데 지금 임계영· 최경회 두 의병장이, “적을 토벌하는 데는 처음부터 피차의 구별이 없다”하고, 정예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가까운 땅에 와서 주둔하면서 정인홍 등과 더불어 성주 · 개령의 적을 치고자 했다. 그들의 열렬한 의기가 보고 듣는 이를 감동시키니 실로 하늘이 국가를 도와 강토가 회복될 조짐이로다.
다만 군량이 부족한데 조달할 계책이 없으니, 저 수천의 군사를 무엇으로 먹일꼬. (중략) 우리 군사만 먹여도 오히려 넉넉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하물며 호남의 군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수 있으리오. 옛글에 이르기를, “양식이 부족하면 굳게 지킬 땅이 없다.”했으니, 양식과 물자가 계속 공급되지 못하면 비록 호남의 의병이라도 붕괴돼 흩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회복을 하고자 하는 호남의병에게 어찌 군량 지원을 생각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선비들은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재주가 부족하니, 전쟁터에 달려가서 왜놈 하나라도 쏘아서 적개의 충성을 바치려 한다면 그만이지마는 만분의 일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군량을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엎드려 원하노니, 여러 선비들이 동지들에게 두루 타일러서 성의를 다해 조금씩 곡식을 낸다면 호남 군사의 수개월 양식을 공급해 그들로 하여금 회복할 계책을 성취시키게 하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들은즉 호남의 의사들은 의주의 행재소에 경비가 부족할 것을 생각해 서로 권면해 쌀 수만 석을 모아서 의곡(義穀)이라 이름 해 배에 싣고 수레로 운반해 평안도로 보내 바치었다 하니 정말로 그 충성이 지극하다.
돌아보건대, 경상도의 많은 선비들은 그 재력이 진실로 호남의 전성(全盛)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의곡을 보내는 장한 일은 본받지 못하지만, 감히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힘이 미치는 데로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을 보태고 태산에 한 티끌을 보태기를 하지 않겠는가. (중략) 의리를 아는 제군은 힘쓸지어다.' - 조경남의 <난중잡록> 1592년 10월 18일 일기에서
한편 전라좌의병장 임계영도 전라도 여러 지역 선비들에게 함께 전투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격문을 보낸다.
의거로 군사를 일으킴은 오로지 국가를 위해 적을 토벌함이다. (중략) 조선 7도가 이미 어육이 됐고 다만 호남만이 겨우 보전함을 얻었으니, 지금이라도 만약 기회를 잃으면 어찌 남아 있는 백성을 구하랴. 이때가 바로 의기 분발한 선비가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우리들은 용성으로부터 거창에 와 주둔해 바야흐로 영남의 여러 어진 분들과 협력해 개령·성주 등지의 적을 치려한다. 그러나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와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해 바로 흉한 칼날을 치기가 어려워서 백가지로 생각해도 상책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사(公私)가 모두 군색해 앉아서 응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려도 아직까지 먼저 소리치는 장수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비록 까닭이야 있겠지마는 왜 그리 더딘지 부끄러울 뿐이다.
경상도 개령의 험한 데가 지켜지지 못하면 전라도 운봉을 지키기 어렵고 운봉을 한번 잃으면 다시는 군사를 쓸 땅이 없을 것이니, 만일 흉한 오랑캐가 마구 몰아친다면 그 뒤에는 여러분이 죽을 힘을 다해 왜적을 막으려 한들 피곤한 군사를 거느리고서 굳센 왜적에게 항거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엎드려 원하노니, 여러분들은 각기 정예한 군사를 통솔하고 시기에 맞춰 와 응원해 좌우의 어금니처럼 서로 의뢰하고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나온다면, 위엄이 미치는 곳에 왜적은 반드시 간담이 꺾어질 것이니 합세해 일제히 치면 어떤 견고한 적인들 꺾지 못하리오.
비린내와 누린내를 소탕하고 씻어서 멀리 개령의 지경까지 막으면, 호남은 절로 완전해져서 국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기미가 이와 같은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
다시 원하노니, 제군은 좋은 계책을 힘써 생각해 후회하지 말지어다. 임기응변은 병가(兵家)에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급한 데로 달려가 형세를 타는 것은 지사(志士)가 숭상하는 바이다. 만약 머뭇거리고 핑계하다가 늦어서 기회에 미치지 못하면 모든 벗의 꾸짖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조정의 질책도 있을 것이니 두렵지 아니한가.'
- 조경남의 <난중잡록> 1592년 10월 18일 일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