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49회, 권율 행주대첩, 김세곤 글
김세곤
2011. 11. 23. 07:4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49. 권율,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3) |
입력시간 : 2011. 11.21.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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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군·승려·부녀자 등 혼연일체돼 전투
명나라·조선군의 후방 병력 지원도 '한 몫'
선조, 승전소식에 상·벼슬 내려 사기 앙양
전라순찰사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 승리는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특히 조선을 얕잡아 보던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 군대를 달리 보기 시작했고 권율 장군을 극구 칭찬했다.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는 임진강 일대를 순시 중에 행주 승첩의 기별을 들었다. 며칠 후에 그는 권율진영을 방문했다. 사대수는 권율 휘하 군사의 호령이 엄명하고 대오가 일사분란하며 병기가 예리함을 보고 자기 부장들에게 감탄해 말하기를 “권장군의 진은 다른 군대들과는 유별나게 다르다. 참으로 조선에 이런 장수가 있었구나” 했다.
행주대첩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3월에 명나라 총 사령관인 경략 송응창이 명나라 조정에 행주대첩을 보고했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고립된 성을 굳게 지켜 수배나 되는 왜군과 대항했습니다. 요사이는 다시 부대자루에 모래를 넣어 군량을 가장해 왜놈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해 놓고는 습격해 죽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야 알아볼 수 있는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붉은 비단 네 필과 백은(白銀) 50냥을 포상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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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병부상서 석성이 명나라 신종황제의 성지를 받아왔다. 이 칙서에는 “조선국은 본래부터 강한 나라로 알려져 왔는데, 전라도 관찰사가 많은 왜적의 목을 베고 사로잡았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임을 알겠노라. 이는 조선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니 관원을 보내 선유하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이후로 명나라 관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 마다 이렇게 말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
“이 분이 바로 지난 날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 분이 아닌가?”
한편 백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한양 진격 요청을 묵살한 채로 함경도에 있는 가토오가 평양을 치려한다는 풍문을 내세워 다시 평양으로 퇴각했다. 이여송이 평산 보산역에 이르렀을 때에 행주대첩의 보고를 받고는 크게 후회했다. 이에 그의 동생이고 선봉장인 이여백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명나라 대장군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모두 너 때문이다” 했다. 이는 이여백이 한양 진격을 크게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도 행주대첩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됐다. 승첩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선조임금은 권율에게 자헌대부, 조경에게 가선대부, 의승 처영에게는 절충장군의 벼슬을 내리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줬다. 선조임금은 권율을 칭찬하기를 “경이 아니었으면 어찌 국가가 온전할 수 있었으리요” 했다.
6월에 권율은 도원수가 된다. 선조가 그를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그러면 권율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요인은 무엇일까.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입구의 ‘안내말씀’에는 행주산성 전투 승리의 4대요인이 적혀 있다.
그것은 첫째, 권율장군과 휘하 장수의 완벽한 전략과 전술 둘째,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식 무기 사용, 셋째, 강,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적, 지리적 조건 넷째, 민, 관, 군, 승려, 부녀자등이 혼연일체가 된 목숨을 건 전투이다.
한편 권율장군은 아래와 같이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행주의 싸움은 내가 이치에서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력과 지위가 벌써 무거웠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들이 이미 내게 돌아온 터이다. 호남의 정예롭고 용맹한 장졸들이 다 수하에 예속됐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효도 수천 명을 넘었다. 지리도 또한 험해 적병의 수가 비록 여러 배 됐지만 그 기세가 이미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공을 세우기 쉬었다. 바로 명군이 위압해 있고 각도의 근왕하는 군사들이 경기도 내에 바둑돌처럼 깔렸으나, 나의 행주 싸움의 성공이 때 마침 모든 군진 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공이 드러나기가 쉬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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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종합하여 보면 행주전투의 승리요인은 (1) 권율 장군의 탁월한 통솔력과 군관민승의 일치단결 (2) 지형적 유리함 (3) 최신식 무기 사용 (4) 조명 연합군의 후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권율의 지도력과 휘하 군사들의 용맹함, 그리고 군관민승의 일치단결은 이미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나머지 승리요인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행주전투를 승리로 이끈 큰 요인 중 하나는 지형적 유리함이다. 행주산성은 강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오로지 한 길 밖에 없었다. 따라서 왜군이 한 군데에서만 공격을 해야 하니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또한 조방장 조경이 임시로 만든 2개의 성책이 유효성 있는 적군 사살 및 방어에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그렇지만 행주전투는 하루에 끝나서 다행이지 왜군이 다음 날 또 다시 공격했다면 군사와 무기가 부족한 조선군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권율도 이런 점을 간파하고 행주전투가 끝난 후 곧바로 파주로 진지를 옮겼다.
둘째는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식 무기 사용이다. 행주산성에서 사용된 화약병기로는 진천뢰, 지신포, 화차, 대소 승자총통, 지자총통, 수차석포 등이었다. 진천뢰는 시한폭탄이고, 지신포는 수류탄으로서 전투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권율 자신이 만들었다는 수차석포는 기계가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면서 그 회전의 탄력을 이용해 돌을 연달아 날랐다.
이런 무기 중에서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 병기는 화차와 승자총통이다. 화차는 장성출신 망암 변이중(1546-1611)이 문종시절에 만든 화차를 개량한 일종의 기관포 달린 장갑차다. 승자총통은 휴대용 총으로 다른 총통에 비해 총열이 길어서 명중률이 높았다. 변이중은 큰 수레 안에 총구 40개를 내고 그 안에 승자총통을 장치해 밖으로 향해 쏘는 화차를 만들었다. 이 화차는 연발로도 발사가 가능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조준하여 살상력을 높이고자 철판으로 주변을 덮었다. 변이중은 화차를 300대 만들었는데 이중에 40대를 권율에게 보냈다. 화차 40대는 모두 1천600정의 승자총통이 장착됐다. 따라서 화차는 왜적을 무찌르는데 결정적 무기였다.
행주산성 대첩기념관에는 변이중 문집과 문종 때 만든 모형 화차가 전시돼 있다. 변이중 문집에는 총통화전도설과 화차도설이 수록돼 있어, 우리나라 국방 과학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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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명나라와 조선군의 후방 지원이다. 군사수로 보면 조선군은 2천300명이고 왜군은 3만명으로 왜군이 10배 이상 많았지만, 조선군은 양천과 금주산에 이어 통진 및 강화도에 주둔한 병력과 연결돼 있었고, 명나라 군대와 더 후방에 있는 조선군도 언제든지 달려 올 수 있었다. 따라서 후방 지원 병력을 합하면 조선군이 1만 명 정도 됐다. 이런 후방병력은 왜군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 김세곤 (역사인물 기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