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죽천 박광전 연재 4, 보성군청 홈페이지, 김세곤 글
김세곤
2011. 11. 14. 08:17
제4회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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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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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 2011년 11월 0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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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 죽천 박광전,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올리다. (4) 죽천 박광전이 세자 광해군에게 올린 편지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깊다. 첫째는 민생이 안정되어야 전쟁을 이길 수 있음을 임금에게 진언한 점이고 둘째는 당시의 백성들의 생활상을 리얼하게 알 수 있는 좋은 사료인 점이다. 죽천 박광전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민생안정이 우선임을 강조한다. 민심을 수습하여 국력을 모으는 일은 어쩌면 눈앞의 왜적을 무찌르는 것과 동떨어진 생각처럼 보일 수 있으나 군·관·민이 모두 일치 단결하여야 국난을 극복할 수 있음은 여러 전쟁의 역사가 공통적으로 말하여주는 교훈이다. 박광전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전쟁도 이길 수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농사를 장려하여 먹을 것을 만들어주고, 권농사를 임명하며, 세금 감면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단속하여야 한다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건의를 하고 있다. 백성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 압권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는 공자(孔子)와 자공(子貢)이 서로 대화하는 글이 나온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었다.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정치란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비를 넉넉하게 하는 것 그리고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足食, 足兵, 民信之矣” 자공(子貢)이 다시 물었다. “부득이하게 세가지중에서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군사를 버려야 한다. 去兵” 자공(子貢)이 또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둘 중에서 한 가지를 더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식량을 버려야 한다. 사람은 예로부터 누구나 한번은 죽지만, 백성이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존립하지 못하느니라. 民無信不立” 그런데 백성으로부터 믿음을 얻으려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애민정신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지단야”란 말은 바로 애민정신의 발로이다. 박광전도 그랬다. 그는 1584년 전라도 함열현감 시절에 시민여상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고 편안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그를 부모처럼 친근히 사랑하였다. 박광전의 문집인 <죽천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민여상 ! 視民如傷 이 말은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가엾게 여긴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원래 춘추좌전(春秋左傳) 애공(哀公) 편에 있다. 나라의 흥성은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이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고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국지흥야 시민여상 시기복야), 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나 하찮은 먼지 따위로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재앙이 된다.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기망야 이민위토개 시기화야 ) 한편 죽천은 민심수습을 하기 위한 최선책으로서 농사짓는 일을 강조한다. 권농사를 임명하자는 구체적 제안도 한다. 즉 공자가 언급한 식량을 풍족하게 하여야 한다는 즉 족식(足食)을 주장한 것이다. 먹을 것이 넉넉하여야 백성이 평안하다는 박광전의 주장은 맹자의 말에도 나온다.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 항상적인 소득이 없으면 항상적인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배가 불러야만 다른 일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배가 고픈데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절대 아니다. 평상시에도 생업을 보장하여 주어야 백성들이 잘 살고 나라가 평안하다. 실업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으면 나라는 불안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국난 중에는 더욱 그러리라. 박광전은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가비상 사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먹을 식량 마련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에 백성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죽기 일보(一步)직전이었다. 그런 실상이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다. 먼저 1593년 2월 상황을 읽어보자. 2월. 각 도의 인민이 유리(流離)하고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서로 잇달았고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ㆍ느릅나무의 껍질ㆍ뿌리ㆍ줄기도 모두 다 없어졌다. 박광전이 세자 광해군에게 편지를 올리기 바로 직전인 1593년 12월 25일의 일기도 살펴보자. ○ 전란이 난 지 2년에 군사와 백성이 생업을 잃고, 적의 분탕질이 극히 심하여 저축되었던 물자가 잿더미가 되니 국가의 경비를 조달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모속사(募粟使)ㆍ조도사(調度使) 등을 각 도에 보내어 온갖 방법으로 곡식을 모집하는데, 공명첩(空名帖)을 많이 만들어 유사(有司)에게 나누어 주며 그것을 살 사람을 모집하였다. 한편 박광전이 건의문을 올린 4개월 후인 1594년 4월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민간에서 곤궁하여 큰 소 값이 쌀 3두(斗)에 불과하고 세목(細木)값이 수승(數升)에 차지 않고, 의복과 기물은 팔리지도 않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여자와 고아는 출입을 못하고,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그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의 뼈를 발라서 즙을 내어 삼켰는데 사람의 고기를 먹은 자는 발길을 돌리기 전에 모두 죽었다. 슬프도다! 처음에는 왜적의 분탕질을 당하고 나중에는 탐관오리가 긁어 먹고 겸하여 흉년이 들고 부역은 중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