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죽천 박광전 기행 1, 김세곤, 보성군청에 연재

김세곤 2011. 10. 25. 06:27

제1회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 죽천 박광전,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올리다. (1)

죽천 박광전 기행을 시작하면서

보성의 역사인물 기행을 떠난다. 가장 먼저 만나는 인물은 죽천 박광전(1526-1597)이다. 보성에는 박광전 이외에 임계영, 안방준 선거이, 서재필 등 역사인물들이 많다. 그럼에도 박광전 기행을 가장 먼저 하는 이유는 그는 보성 역사 인물 중에 가장 선배 격이고 그의 학문과 삶이 오늘 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순조 임금 시절(1835년) 이조판서 김기은이 대하여 임금에게 올린 회계문(回啓文)이 가장 적절하고 포괄적이다. “박광전은 연원(淵源)이 적정(的正)하고 학문이 순독(純篤)하며 절의가 병렬(炳烈)합니다.”

다시 말하면 (1)학문의 연원이 올바르고, (2)학문이 순수하고 철저하며, (3)절의가 찬란하게 빛났다는 것이다. 그는 퇴계 이황(1501-1570)의 문인으로서 주자의 학문을 일생동안 따랐으니 연원이 올바르고, 우산 안방준( 1573-1654)이 지은 죽천의 행장에서 나오듯이 죽천 박광전은 하서 김인후(1510-1560), 고봉 기대승(1527-1572), 미암 유희춘(1513-1577), 일재 이항(1501-1570)과 함께 호남 오현 중 한 사람으로서 위기지학(인격완성을 목표로 하는 공부)을 독실하게 실천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맞이하여서는 칠순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섰으니 절의가 빛난 인물이다.

특히 국난 극복의 절의 부분에 있어서는 죽천이 가장 돋보인다. 먼저 숙종 시절 용산서원에 편액을 내렸을 때의 사제문(賜祭文) 글에서 죽천 박광전의 임진왜란 중 활약에 대한 글을 읽어보자.

임진 · 계사년에 이르러
섬 오랑캐가 침략함에
여러 고을들이 궤멸되니
누가 그 기세를 막겠는가.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끓는 피로 맹세하고
적의 급소를 눌러서
조용히 막아냈도다.
크나큰 공을 알리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뜨니
유림들이 몹시 경악하고
열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네.

201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 즉 7주갑(육십갑자가 7번 돌아오는 해)이 되는 해이다. 전라좌의병의 본거지는 전남 보성이다. 1592년 7월 보성 관아에서 박광전 · 임계영 · 문위세 등은 전라좌의병을 일으켰다. 따라서 죽천 박광전을 중심으로 전라좌의병의 의병활동을 재조명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박광전, 국난 중에도 민생을 걱정하다.

1592년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총체적인 국난이었다. 200년간의 태평성대를 누린 조선은 일시에 무너졌고 조선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그나마 희망은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도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특히 호남의병은 김천일 · 고경명(1532-1592)이 먼저 일어나고.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죽자 전라좌의병과 전라우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전라좌의병의 중심에는 박광전, 임계영이 있었다. 죽천 박광전(1526-1597)은 1592년 7월에 보성에서 거의하였으나 몸이 아파서 후방에 남아 있었고 대신 두 아들 근효와 근제가 의병으로 나섰다.

1593년 11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광해군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 여기에는 삼도체찰사 윤두수가 수행하였다. 광해군은 12월2일에 남원에 머물고, 12월25일에는 전주에 도착하여 다음날 알성(謁聖 임금이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것)하고, 27일에 과거를 보여 문신(文臣) 11인과 무신(武臣) 1천 6백 인을 뽑았다.

한 때 광해군의 사부였던 68세의 박광전은 병든 몸으로 전주로 달려갔다. 세자 광해군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자리에서 박광전은 광해군에게 시무책 10조문을 올린다. 이 시무책의 핵심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우선에 민생이 안정되어야 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무책을 읽어 보자. 이 글은 조경남의 <난중잡록> 1594년 1월2일자 일기에 나온다. 조경남은 남원출신 의병장으로서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일을 일기로 자세히 남긴 사람이다.


박광전이 왕세자 광해군에게 올린 편지
(상 왕세자 무군시 서 上 王世子 撫軍時 書)


1593년 12월의 모일에 전 회덕 현감(懷德縣監) 박광전(朴光前)은 몸을 깨끗이 하고 백번 절하면서 왕세자 저하에게 말씀을 올립니다.


국운이 중도에 불행하여 흉한 왜적들이 함부로 날뛰어 삼경(三京)이 함몰되고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천고에 없던 변란입니다. 다행히 하늘과 같은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입어 신의 위엄으로 왜적을 막아 추악한 전쟁은 잠시 그치고 왜적이 한 모퉁이로 물러갔으니, 이 또한 천고에 다시없던 경사입니다.

지금엔 선조임금께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왕세자의 행차가 남쪽으로 내려오시어 우리 군사의 위풍을 드높이고 우리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켜 살아남은 백성들이 한양 관원의 위엄있는 거동을 다시 보게 되니,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우리 임금의 아들답다.라고 칭송하며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분기(奮起)할 것을 생각하고 장수와 군사들은 기운이 솟아, 뒤엎어진 형세가 이미 반전되어 회복될 터전이 장차 이루어졌으니, 모든 사람의 기쁨과 경사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일찍이 시독관(侍讀官 : 왕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관직)이 되어 특별히 자애로운 은총을 입었으니 비록 말직에 있었으나 정(情)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당초에 변란이 일어날 때에는 길이 막혔고, 흉악한 왜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는 질병에 시달리느라, 미처 남궁(南宮)에서 땔나무로 불을 지피는 소원[抱薪之願]을 이루지 못하고, 속절없이 두릉(杜陵)처럼 시절을 슬퍼하는 비감한 눈물만 흘리다가, 마침 오늘에서야 비로소 찾아와 아뢰니, 뒤늦게 찾아온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서 ‘남궁에서 땔나무로 불을 지피는 소원’이란 표현은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임금이 되기 전에 왕랑(王郞)에게 패하여 도망하다가 중도에 비를 만나 남궁현(南宮縣)에서 길 옆 빈 집에 들어갔는데 풍이(馮異)가 섶[薪]을 안고 와서 등우(鄧禹)가 불을 피웠다는 일화에서 나오는 글이다. 박광전은 임금을 위하여 풍이나 등우처럼 충성을 하지 못하였음을 토로하고 있다. 한편 두릉(杜陵)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를 말한다. 두릉은 두보가 살던 곳이다. ‘시절을 슬퍼하는 비감한 눈물을 흘리다’는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두보가 세상살이를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는 시를 지은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 현종 때인 755년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들을 데리고 산시성[陝西省] 바이수이 현[白水縣]· 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 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두고, 자신은 닝샤성[寧夏省] 링우[靈武]에서 즉위한 숙종(肅宗)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도로 끌려갔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한 동안 옥에 갇혀 있기도 한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나날을 보내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이 무렵 쓴 시가 바로 유명한 춘망(春望)이다. 춘망은 피폐된 장안성을 바라보며 나라와 가족걱정을 하면서 쓴 비애(悲哀) 시이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변치 않았는데
장안에도 봄이 와서 초목이 무성하네.
시절이 비감하여 꽃을 보아도 눈물 흘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