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직업 훈련 그리고 취업

국제 기능 올림픽 3연패, 한국의 쾌거.

김세곤 2011. 10. 11. 02:14

[만물상] 기능올림픽

입력 : 2011.10.10 22:32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 스페인의 청년연맹(OJE) 사무총장 호세 올라소는 국가가 부흥하려면 무엇보다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몇몇 직업훈련소 소장들과 상의한 끝에 채택된 아이디어가 기능 겨루기 대회였다. 1947년 직업훈련생 4000여명이 참가해 12개 부문에서 펼친 첫 전국기능대회는 큰 성공이었다. 한껏 고무된 이들은 언어·문화가 비슷한 남미 국가들을 끌어들여 국제대회로 만들려 했으나 반응이 시큰둥했다.

▶1950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철저한 무관심 속에 치러졌다. 포르투갈·스페인 선수 12명이 전부였다. 국제대회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 대회'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그러나 옵서버로 왔던 나라들이 기술인력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53년부터 영·불·독 유럽 3강(强)과 스위스·모로코가 합세하자 국제대회의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1977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은 제23회 기능올림픽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고 돌아온 어린 선수들에게 일일이 훈장을 달아주며 어깨를 다독였다. "여러분 나이에 여유 있는 집 자녀들이 대학에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집이 가난해서 대학에 못 갔다'고 원망할지도 모르나 인생은 반드시 대학을 나와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진공업국가의 꿈을 키우던 한국은 그해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국제기능올림픽 9연패의 시동을 걸었다. 독일은 첫 대회를 유치한 1961년 무렵, 그리고 일본은 3연패를 달성한 70년대 초가 전성기였다.

▶한국이 엊그제 제41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17번째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2년마다 열리는 기능올림픽은 17~22세 젊은 기능인들의 잔치다. 이번 런던 대회에는 50개국 949명이 출전했고, 한국은 39개 직종에 43명의 선수가 기량을 뽐냈다. 입상자는 수천만 원의 상금과 훈장을 받고 국가자격시험이나 군 복무에서 혜택을 누린다.

▶1967년 대회에 처음 출전했을 때 한국은 양복과 제화(製靴)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초로(初老)의 두 금메달리스트는 아직도 옷과 구두를 짓고 있지만, 양복·제화·목형 같은 종목은 이제 없어졌다. 대신 폴리 메카닉스·모바일 로보틱스 같은 분야가 새로 생겼다. 기능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계속 같은 직종에서 일할 경우 연 289만~1200만원의 장려금을 주고 있다. 그래도 선수협회 회원 685명 중 20%는 연락두절이라고 한다. 누군가 그들의 겨드랑이에 격려의 손을 넣어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