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흔적 답사
이순신, 약무호남 시무국가 - 여수 진도 해남 완도 그리고 고흥,,,
김세곤
2010. 8. 4. 04:22
[남도의 재발견] 약무호남 시무국가
2010년 03월 26일(금) 00:00
퀴즈를 하나 내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란 말이 있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습니다.’ 란 이 말은 누가 한 말일까. 답은 구국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 한 말이다. 1593년 7월 16일 이순신은 친구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말을 언급한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때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이다. 이순신은 8월 중순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전쟁터가 된 조선은 초토화되었다.
그러면 이순신은 어떤 의미로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말을 썼을까. 그것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그나마 조선이 이 정도라도 지탱할 수 있던 것은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사실 호남이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생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뿐만 아니라 김성일, 유성룡도 같은 생각이었다. 1592년 6월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는 “호남은 지금 근왕(勤王)으로 인하여 도내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1593년 12월 유성룡도 선조 임금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린다. “전라도를 보전하지 못하면 나라가 능히 지탱될 수 있겠습니까. 그 지경에 이르면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명나라 군대가 있다 해도 명군이 어찌 우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1593년 7월까지의 임진왜란 상황을 호남과 관련하여 살펴보자.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쳐들어간다.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고 2개월 만에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점령한다. 이런 국난을 극복하게 한 것은 이순신 휘하의 전라도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이순신은 5.8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후 7·8에 한산도 해전, 8·29 부산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한편, 육지에서도 의병들의 활약으로 호남은 무사히 지켜진다. 웅치·이치 전투, 고경명과 조헌의 금산 전투 등으로 왜군은 조선 의병의 강력한 저항을 받는다.
왜군은 진주에서 전라도로 오는 길목도 차단당한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서 1593년 6월에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전라도를 침략하지 못한다. 2차 진주성 싸움은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이끄는 3천 5백 명 호남 의병이 8만 명의 왜군에 대항하여 10일 동안이나 진주성을 사수한 전투였다. 조선군이 비록 패하기는 하였지만 왜군 또한 상당한 병력 손실과 피로가 겹쳐 전라도 침략을 포기한다.
당초 일본은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 조달기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획은 무산된다. 반면에 온전하게 된 호남은 양곡 생산지·병참기지, 군 병력 송출 기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필자는 요즘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틈틈이 주말에 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호남 수군의 흔적은 여수와 진도가 대표적이다. 여수에는 진남관, 충민사, 선소, 이충무공 대첩비와 타루비 등이 있다. 진도에는 울돌목, 벽파진이 볼거리이다.
호남 의병의 흔적은 김천일과 고경명, 최경회, 김덕령의 자취에서 찾을 수 있다. 나주 정렬사를 가면 김천일을 만난다. 거기에는 김천일과 양산숙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담양 추성관과 광주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흔적이 있다. 담양 추성관은 담양 동초등학교 자리이며 광주 포충사에는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유팽로, 안영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화순 포충사에는 최경회의 신위가 있다. 최경회는 의기 논개의 지아비이기도 하다. 김덕령의 흔적은 무등산 자락 충장사에 있다.
이러한 역사현장을 다니면서 남도가 충의의 고장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남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솟아난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때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이다. 이순신은 8월 중순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전쟁터가 된 조선은 초토화되었다.
그러면 이순신은 어떤 의미로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말을 썼을까. 그것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그나마 조선이 이 정도라도 지탱할 수 있던 것은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사실 호남이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생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뿐만 아니라 김성일, 유성룡도 같은 생각이었다. 1592년 6월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는 “호남은 지금 근왕(勤王)으로 인하여 도내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1593년 12월 유성룡도 선조 임금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린다. “전라도를 보전하지 못하면 나라가 능히 지탱될 수 있겠습니까. 그 지경에 이르면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명나라 군대가 있다 해도 명군이 어찌 우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1593년 7월까지의 임진왜란 상황을 호남과 관련하여 살펴보자.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쳐들어간다.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고 2개월 만에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점령한다. 이런 국난을 극복하게 한 것은 이순신 휘하의 전라도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이순신은 5.8 옥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후 7·8에 한산도 해전, 8·29 부산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한편, 육지에서도 의병들의 활약으로 호남은 무사히 지켜진다. 웅치·이치 전투, 고경명과 조헌의 금산 전투 등으로 왜군은 조선 의병의 강력한 저항을 받는다.
왜군은 진주에서 전라도로 오는 길목도 차단당한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서 1593년 6월에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켰지만 전라도를 침략하지 못한다. 2차 진주성 싸움은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이끄는 3천 5백 명 호남 의병이 8만 명의 왜군에 대항하여 10일 동안이나 진주성을 사수한 전투였다. 조선군이 비록 패하기는 하였지만 왜군 또한 상당한 병력 손실과 피로가 겹쳐 전라도 침략을 포기한다.
당초 일본은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 조달기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획은 무산된다. 반면에 온전하게 된 호남은 양곡 생산지·병참기지, 군 병력 송출 기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필자는 요즘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틈틈이 주말에 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호남 수군의 흔적은 여수와 진도가 대표적이다. 여수에는 진남관, 충민사, 선소, 이충무공 대첩비와 타루비 등이 있다. 진도에는 울돌목, 벽파진이 볼거리이다.
호남 의병의 흔적은 김천일과 고경명, 최경회, 김덕령의 자취에서 찾을 수 있다. 나주 정렬사를 가면 김천일을 만난다. 거기에는 김천일과 양산숙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담양 추성관과 광주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흔적이 있다. 담양 추성관은 담양 동초등학교 자리이며 광주 포충사에는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유팽로, 안영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화순 포충사에는 최경회의 신위가 있다. 최경회는 의기 논개의 지아비이기도 하다. 김덕령의 흔적은 무등산 자락 충장사에 있다.
이러한 역사현장을 다니면서 남도가 충의의 고장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남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솟아난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