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와 상생의 노사

다큐멘터리 90분 -월간노동법률 2010년 7월호 , 김세곤 글

김세곤 2010. 7. 18. 17:31

                        

 다큐멘터리 90분 



                       김세곤 (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1. 다큐멘터리 90분 


  다큐멘터리 90분. 제목이 마치 TV의 다큐멘터리 방송 프로그램 같다. 실은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의 별칭이다.  저희 노동위원회는 심문회의를 일주일에 3-4일 개최한다. 회의는 보통 하루에 2건이고 1건의 회의시간이 90분이다. 90분 회의는  리얼 스토리를 생중계하는 다큐멘터리 방송 같다. 


   심문회의는 이렇게 진행된다. 먼저 참석자를 확인하고 심문위원을 소개한 다음, 회의 시 유의사항 낭독, 조사관의 사건개요 설명이 있은 후에 심판위원장인 필자가 심문회의 시 부탁사항을 말한다. 즉 “지명을 받으신 당사자는 위원들의 심문에 대하여 간단 ․ 명료하게 답변해주시고, 상대방은 심문 도중에 중간에 끼어들어서 임의로 발언하는 없도록 하여 달라.”는 멘트이다.


   이어서 심문이 시작된다. 공익위원과 근로자 위원, 사용자 위원이 차례로 심문을 한다. 끝으로 신청인 측과 피신청인 측이 최종진술을 하고 심문이 마무리 된다.


   지난 2년여 동안에 필자가 처리한 사건은 전체 사건의 80% 이상이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심판사건을 다루면서 생긴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2. 사람 읽기 - 인간적으로 해결하기 

 


   심판사건에 있어서 핵심은  징계사유와 징계절차가 정당한지, 징계는 적정한지이다. 이런 법률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필자의 가장 큰 관심은 노사 간  화해 가능성 여부이다. 회의를 진행하면서 노사의 마음을 읽고 사건이 화해로 마무리 될 수 있는 지를 궁리한다.



   물론 심문회의에서 화해가 성립된 경우는 전체 사건의 10%도 안 되고, 실제로 화해를 권유한 사건 중 20-30% 정도만이 화해가 성립된다. 그럼에도 단 한 건이라도 원만하게 화해를 시키는 것이 심판위원장을 하는 보람이다. 물론 화해가 안 될 때는 씁쓸하지만.



  최근에 처리한 사건 하나도 마음이 아프다. 한 근로자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였다.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아 사무실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으나 병명을 알 수 없었다. 병가도 낼 수도 없고 근무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2개월 정도 결근을 하였다. 이것이 무단결근이 된 것이다. 물론 회사도 근로자에 대하여 상당히 배려를 하였으나 무단결근이 잦아지자 별 수 없이 그 근로자를 해고 하였다. 


  심문회의가 있던 날, 신청인의 부인과 3-4살 난 아이도 참석하였다.

그들을 보니 안타까웠다. 심문을 모두 마치고  최후 진술만 남았을 때 나는 신청인에게 질문하였다. 복직을 포기하는 대신 보상금을 받을 생각이 있는 지를. 신청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20분 정도 정회를 하였다. 속개하여 신청인은 보상금을 받겠다고 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회사 측에 ‘인간적으로’ 해결을 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내가  '인간적으로'란 말을 한 것은 며칠 전에 본 TV 개그콘서트 프로 '남성인권보장위원회'에서 개그맨이 한 말, ‘우리 인간적으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2주일 후에 다시 심문회의가 열렸다. 아쉽게도 화해는 성립이 안 되었다. 근로자가 다시 복직을 원한 것이다. 2차 심문회의는 간단하게 끝났다. 그리고 판정을 하였다. 이 사건을 인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여 잠시 허탈하였다. 




3.  심판위원장의 역할 


  심문회의에서 나의 역할은 진행자 · 조정자이다. 위원들이 사실관계와 쟁점 파악에 충실하도록 유도하고,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며, 회의가 균형있고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심문위원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하여야 한다. 특히 공익위원들은 심문을 할 때 편향된 발언은 금물이다. 비판이나 설교는 독이 된다.


 

   그런데 때때로 심문위원들이 오버하는 경우가 있다. 한번은 어느 심문위원이 회사 측에 사실관계 파악을 하였다. 회사 대표가 조금 횡설수설하게 답변을 하였는데 그 위원이 사장에게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회사 대표가 “이런 회의는 안 하겠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회의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를 포함하여 다른 위원들이 사장을 간신히 설득하여 회의는 다시 진행되었지만 상당히 당황스런 순간이었다.

   

   또 한 번은 어느 위원이 심문을 하면서 어느 한편에게만 일방적으로 질문을 하였다. 사건의 결론을 미리 내 놓고 30분 이상을  몰아 부치었다. 분위기가 썰렁하게 되었다. 내가 나섰다. 다시 심문기회를 줄 것이니 다른 위원이 심문할 수 있도록 마무리를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다행이도 그 위원이 심문을 빨리 종결하여 회의가 다시 정상화 되었다.  



4. 가장 긴 최후의 진술

 


    금년 초에 관내의 한 업체에 근무하던 근로자 40명이 집단으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집단민원이어서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회의에서 당사자가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화해하도록 유도하였다. 첫 회의가 끝난 후에 양당사자는 사용자 위원과 근로자 위원이 참여한 가운데 대화를 하였으나 타협이 잘 안 이루어 졌다.


   다시 두 번째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번에는 심판위원회가 직접 나서서 화해를 주선하였다. 무려 7시간 이상 걸쳐서 양 당사자를 개별 접촉하고, 조정회의를 하는 등 다각적으로 화해를 유도하였다. 그 결과 2일후에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틀 후에 다시 세 번째 심문회의가 개최되었다. 오후 4시부터 시작한 회의에서 40여 분간에 걸쳐 화해여부를 확인하였으나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판정을 위한 본격적인 심문회의는 오후 4시 40분부터 시작되었다. 3시간에 걸친 당사자 심문과  증인 심문이 이루어졌다. 이제 최후 진술만 남았다. 나는 지금 시간이 밤 8시가 다 되니 가급적 최후 진술을 간단하게 하여 줄 것을 부탁 하였다. 


   먼저 신청인의 최후 진술이 시작되었다. 신청인들은 한 사람 한사람씩 최후 진술을 하였다. 신청인 1, 2, 3, 그리고 10, 이어서 11, 12, 13, 신청인 14가 진술을 마치었다. 이때 까지 걸린 시간이 32분. 한 사람당 평균 2분 30초 정도 한 것이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심문위원들도 지친 모습이다. 옆에 앉은 위원 한 분이 자꾸 시계를 보고 있다. 드디어 내가 나섰다.


 “지금까지 14명이 최후 진술을 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32분 걸렸습니다. 아직도 26명이 더 남았는데 지금 대로 진행하면 1시간 이상 걸릴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짧게 최후 진술을 하여 주십시오. 저의 인내심에 한계를 느낍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해고자중 한 사람이 큰 소리를 쳤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최후 진술은 신청인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그냥 놔둘 것을. 조금 더 참을 걸. 차라리 뜨거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모양새가 더 좋았는데.


    이후 신청인의 진술은 10여분 더 계속되었다. 해고자 두 명이 더 진술을 하고 최종적으로 신청인의 대리인이 이야기하였다. 이어서 회사 측에서 사장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심문회의가 끝난 시간은 오후 8시 50분. 장장 4시간 50분에 걸친 회의였다.  3번의 심문회의를 모두 합치면 무려 12시간 이었다.  


  

5. 신청인들의 최후 진술 유형

 


   부당해고 사건 특히 징계해고에 있어서 신청인들의 최후 진술은 다양하다. 필자가  그 진술을 관찰한 결과 징계에 대한 인정여부를 한 축으로 , 회사에 대한 비난 정도를 또 한축으로 하여 네 가지 유형의 매트릭스를 만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유형은 선처형, 비난형, 조리 調理형, 담담형이다. 선처형은 징계 사유는 인정하되 양정이 너무 과하니 선처를 바란다는 유형이다. 비난형은 자기는 잘못이 전혀 없고 모두 회사의 잘못이라고 회사를 비난하는 유형이다. 조리형은 회사를 비난하지 않지만 부당해고임을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유형이고, 담담형은 별로 이야기도 안하고 심문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하여 달라는 형이다.


   최근에 다룬 선처형 사건은 정말 안타깝다.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차량추돌 사고를 냈다. 차량 3대가 파손되고 사람이 3명 다치었다. 피해 금액은 1천50만원. 10년 정도 근무한 기사인데 나이도 55세 정도 되었다. 이 근로자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사고를 내어 징계 받은 경력도 있어 징계해고 되었다. 해고된 신청인은 최후진술에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선처를 호소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른 처벌은 달게 받겠으니 해고만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난감하다. 징계 양정을 낮추어야 하는지 하는 고민이 많이 생긴다. 이런 사건은 판정시에도 신중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마음도 별로 안 좋고. 어느 해고자의 주장이 생각난다. ‘해고는 살인입니다. 살인만은 막아주세요.’


  한편 비난형 최후 진술에는 분노가 포도처럼 솟아 있다. 신청인은 막말을 하면서 회사를 비난한다. 부당해고에 대한 진술 수준을 넘어 회사에 대한 강한 성토이다. 막 한풀이를 한다.  


 

6. 마치면서


  필자가 심문회의 할 때 명심하는 세 가지 사항이 있다. 평상심 가지기, 제대로 경청하기, 균형감 유지하기이다. 평상심 갖기는 마음 상태를 차분하게 하는 것이다. 항심 恒心 즉 언제나 늘 그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경청은 겸허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양 당사자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균형감 유지하기는 공정성과 중립성을 견지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 원칙 준수는 마치 구도자 求道者의 길과 같다. 항상 도를 닦아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