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문화의 재 발견

남도의 재발견 - 이순신을 찾아 떠나다 , 김세곤 칼럼 , 광주일보

김세곤 2010. 5. 28. 02:19
[남도의 재발견] 이순신을 찾아 떠나다

2010년 05월 28일(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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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집안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충신이 생각난다”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는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지 20일도 못되어 선조 임금은 서울을 떠났다. 전투 한 번도 안 하고. 그런 임금을 보면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처럼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조선을 구한 이는 이순신이다. 우리는 그를 성웅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이라고 부른다.

5월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선다. 먼저, 가는 곳이 여수이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한 이순신은 전란을 미리 예견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거제도 앞바다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가진다. 이어서 이순신은 거북선을 앞세운 당포해전, 학익진을 펼친 한산대첩, 왜군수군의 본영을 불사르는 부산해전에서 연달아 이긴다. 이런 승전의 출발지가 여수이다. 승전군은 바로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의 전라좌수군이고.

우선 해군사령부인 진남관을 들러 본다. 그리고 이충무공의 신위를 모신 최초의 사액사당 충민사를 찾았다. 충민사 유물관 입구에서 군관민승이 함께 있는 부조를 보았다. 온 국민이 모두 힘을 합친 국난극복의 상징이다.

이어서 고소동에 있는 이충무공 대첩비와 타루비를 찾았다. 타루비는 노량해전에서 순절한 이순신을 애도하며 전라도 수군들과 백성들이 흘린 눈물을 기억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비를 보니 나도 숙연하여 진다.

며칠 후에 완도 고금도를 간다. 고금도는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이 다시 수군을 보강한 곳이다. 사실 이순신이 위기의 리더로 평가받은 해전은 명량해전이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전투. 이 해전에 앞서서 이순신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가 선조 임금에게 올린 장계를 읽어 보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오히려 이길 수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물살이 엄청 빠르고 물길이 협소한 울돌목은 그야말로 해전에 있어서 전함의 절대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곳을 전쟁터로 선택한다. 해전에 앞서 그는 극도로 공포심에 질린 수군들에게 명연설을 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려고 전투를 회피하면 죽을 것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수군 8000명, 판옥선 40척, 군량미 1만석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왜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노량으로 출전한다. 애석하게도 그는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그의 시신은 다시 고금도로 돌아온다. 83일이나 이곳에 모시어져 있다가 장지인 충남 아산으로 간다. 묘량도 충무사와 월송대를 들렀다. 이곳에서 이순신과 남도의 인연을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서울 광화문이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등에 업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충무공 이야기’를 관람하였다.

휴일이라 그런지 부모님 손을 잡고 구경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많다. 이들은 거북선을 조립하고 노를 젓는 체험을 하며 마냥 좋아한다. 전시실은 볼거리가 굉장히 많다. 이순신의 생애와 리더십, 조선의 함선, 7년간의 해전사, 난중일기를 통해본 인간 이순신 등등.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간 곳은 이순신에 대한 세계 해군 역사가와 제독들의 평가이다. 특히 1904년 노일전쟁 때 천하무적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찌른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평가가 가장 눈에 띈다.

“나는 이순신 제독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 관한 한 신(神)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그분은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일본과 싸워 매번 승리하였다.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유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이다.”

요즘 천안함 사건으로 나라가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이순신 장군이 더욱 생각난다. 이순신이 너무 그립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