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위원회 업무

경청, 신뢰 그리고 유연성 -김세곤 , 노사조정의 기초

김세곤 2010. 4. 30. 17:27

경청, 신뢰 그리고 유연성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1. 조정의 달인으로부터 강의를 듣다.



  4월에 저희 노동위원회는 조정담당 공익위원 워크숍에 강사 한 분을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는  oo지방노동위원회 상임위원으로  3년간 평균 조정 성립율 83%를 기록한 조정의 달인이다.


  강의는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업무 매뉴얼에 나와 있는 조정자에게 필요한 능력과 태도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미국연방알선조정청(FMCS)에서 만든 것으로서, “신뢰를 얻을 것, 중립을 지킬 것, 당사자의 말을 잘 들을 것, 이해력과 분석력을 가지고 있을 것, 비판이나 설교를 하지 말 것, 강한 인내심을 가질 것, 냉정할 것, 창조적이고 유연할 것, 체념하지 말 것” 등이다. 그는 이 항목을 책 읽듯이 읽어 내려가면서 경청, 신뢰 그리고 유연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였다. 나는  경청, 신뢰, 유연성의 의미를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면서 그의 강의를 재미있게 들었다.



2, 경청


  경청 敬聽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청 聽이란 한자를 해부하여 보면 귀 이 耳+ 임금 왕 王 + 열 십 十 + 눈 목 目+ 하나 일 一 + 마음 심 心을 합한 글자이다. 귀를 임금처럼 생각하고 열개의 눈으로 하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달리 해석하면 ‘말하는 사람을 임금님처럼 생각하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듣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청이야말로 사건처리에 있어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일처리는 우선에 당사자의 말을 잘 듣는데서 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경청의 반대는 무시 無視이다. 무시는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야기 하는데 얼굴을 보지도 않고 딴 짓을 하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자기 존재를 인정 못 받으니 정말 속이 뒤집히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 사건을 처리해 보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경우, 당사자가 쟁점에 벗어나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경우 조정이나 심판위원들이 인내를 가지고 당사자의 말을 듣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 조정이나 심판위원들은 중간에서 말을 끊는다.  ‘요점만 말하세요.’ ‘그만하세요.’ ‘다 알고 있어요.’ ‘결론만 말하세요.’ 이럴 때 당사자는 위축되기도 하고 심지어 말문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당사자가  상처 받을 수도 있다. 조정의 달인은 강조한다. “중간에 말을 끊는 경우에도 조금 호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사자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여야지, 지나치게 당당하거나 고압적으로 말하여서는 안 됩니다.” 


   

3. 신뢰


    이어서 조정의 달인은 조정 성립율을 높이려면  무엇보다도  노동위원회 조정위원이 노동조합과 사용자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 信이란 한자는 사람 인 人과 말씀 언 言을 합한 것인데, 사람 말을 믿는 것이 신이다.  신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신뢰는 영어로  trust인데 이 단어는 신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그러면 노동위원회를 믿는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공정성과 전문성 그리고 평판에서 나온다. 노사 중에 어느 한 쪽이 편파적인 조정을 한다고 생각하면 조정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조정위원이 노동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륜 그리고 회사의 특수한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노사가 생각하면 조정은 어렵다. 조정성립율이 70%인 사람은 30%인 사람 보다 노사에게 더 믿음을 준다.


   특히 조정성립율을 높이는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공익위원이다. 공익위원은 조정회의를 주재하는 자이고 노사를 잘 리드하는 위치에 있는 자이다. 만약 공익위원이 사용자 편향이면 노조가 불신을 할 것이고, 노조 편을 들면 사용자가 반발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익위원은 공정성, 중립성,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공익위원의 길은 구도자 求道者의 길이다. 아무리 공정하게, 법과 양심에 의하여 일을 처리하였다고 하더라도 노사 중에  어느 일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공익위원은 불신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익위원은 항상 자신을 경계하고 처신을 잘 하며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신독 愼獨의 길을 걸어야 한다.




4. 유연성 - 조정은 심판처럼,  심판은 조정처럼



    조정의 달인이 강의 중에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한 부분은 유연성이었다. 즉 “조정은 심판처럼, 심판은 조정처럼 하라.”는 조언이었다. 조정 사건을 처리하다보면 그 기저에 심판 사건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심판 사건부터 해결하여야 노사분쟁이 풀린다는 것이다.


   심판 사건 처리도 마찬가지이다. 판정을 하느니 화해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특히 어떤 심판 사건은 당사자가 판정에 불복하여  중앙노동위원회,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이는 데, 이 경우는 노사가 모두 지치고 비용도 엄청나게 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노동위원회가 사건을 화해시켜 초기에 분쟁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강사는 유연성을 가지고 사건을 처리한 경험을 설명하였다. 노동위원회 상임위원은 벌처럼 나비처럼 조정과 심판 사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하니 그것이 보람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의 사건 처리 경험이 생각났다. 내가 조정을 심판처럼 처리한 사건은 신설 노동조합의 조정 사건이다. 단체협약 결렬 관련 조정신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회사는 신생 노조 설립을 극히 불신하여 노조 위원장 등 조합간부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상태이었다. 1차 조정회의에서 근로자위원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잠시 정회를 하고 회사 측을 설득하였다. 노조 설립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며 노사가 대화를 하려면 노조간부에 대한 징계문제부터 풀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설득이 잘 되었는지 회사 측은 징계를 유보하였고 노사 간에 다시 교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조는 노사가 자율 해결하겠다고  조정 사건을 취하하였다. 


   또 다른 조정 사건 하나는 노동조합이 회사를 고발한 경우이다. 노조가  회사 측이 임금인상 요구안을 안 들어 주자 노동법 위반으로 고발한 것이다. 이후 회사는 검찰, 노동청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고 노사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이 문제도 임금협상이 문제가 아니라 기저에 깔린 앙금부터 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사를 설득하였다. 근로자 위원은 노조를 설득하고 사용자 위원은 회사를 설득하여 서로의 양보를 받아냈다. 노조는 고발을 취하하고, 회사는 임금 교섭에 성의를 가지고 임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다행히도 노사 양측에서 노사위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시 성실교섭을 할 수 있었다. 



   심판을 조정처럼 처리한 사건도 생각이 났다. 저희 노동위원회 근로자 위원 한 분이 부당결근처리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냈다. 그는 2009년 10월 말 경 노동위원회 조정사건에 근로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 그의 근무시간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이었다. 근로자위원은 회사 측에 조정사건 참석을 이유로 공가 처리를 요구하였으나  회사는 조정사건 처리 시간이 근무시간이 아니니 공가처리는 할 수 없다고 근로자에게 통보하였다. 이 문제가 명쾌하게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근로자는 조정 사건을 처리한 날 야간 근무를 나가지 않았고 회사는 근로자를 결근 처리 한 것이다. 2일간의 결근 처리로 임금 손실을 입은 근로자는 노동청에 고소를 하고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였다.


   이 사건을 심문하면서 나는 내심 곤혹스러웠다. 다른 사건도 아니고 노동위원회 업무로 인하여 발생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심문이 진행되면서 밝혀 진 것은 근로자가 회사를 노동청에 고소한 사건이 검찰에서 무혐의로 내사 종결된 사실이다. 이는 근로자에게 상당히 불리한 것이었다.


   심문회의를 모두 마칠 무렵 나는 양 당사자에게 화해를 제안 하였다. 노사의 자존심과 회사의 원칙 고수를 누그러뜨리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잠시 정회를 하고 양 당사자를 개별적으로 만났다. 회사 측에 “근무시간 중에는 공가 처리하고, 근무시간이 아니면 공가 처리는 안  하여주는 공가 처리의 원칙은 준수하되 근로자가 이번에 입은 임금 손실은 보전해 줄 것”을 제안 하였고, 근로자에게는 임금 손실분은 보전 받고 회사 측의 공가처리 원칙에 동의하도록 하는 제안을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체면을 보아서 그랬는지, 노사가 서로 이익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랬는지 화해가 이루어졌다. 화해가 성립되자 내 마음도 홀가분하여 졌다.




5. 마치면서



   원래 50분하기로 한 강의시간이 20분이나 초과되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나는 강사에게 이제 마무리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는 조선 시대 명재상 황희 정승 이야기를 하고 강의를 마쳤다. 황희 정승의 일화를 되새겨 보자. 두 사람이 다툼이 있어 관아에 왔는데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말이 일리가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말 또한 이치에 맞았다. 그래서 황희는 두 사람 말이 모두 맞노라고 대답하였다. 곁에 있던 아전이 의아하여 황희 정승에게  ‘두 사람 말이 모두 다 맞다고 하니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것인가요.’하고 물었다. 황희는 ‘자네 말도 맞네.’라고 답변하였다.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노동분쟁은 노사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노조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사용자는 IMF 시절보다도 사업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노사의 말 모두 일리가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판정할 것은 아니다.


   노동위원회 조정회의는 조정위원들의 신뢰와 권위로 노사에게 타협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그 임무이다. 특히 공익담당  조정위원은 공정, 중립성을 지키고 균형감각을 잘 견지하여야 한다. 공익위원인 내가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 



        ( 월간 노동법률 2010년 5월호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