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을 찾아서

면앙정에서 6

김세곤 2007. 9. 19. 01:41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6)

 

  이제 나는 면앙정 현판 오른편 마루로 자리를 옮긴다. 이 마루 위에는 송순과 소세양의 시가 적힌 현판, 소쇄처사 양산보의 시가 적힌 현판, 정조임금의 어제(御題)가 판각되어 있는 <하여면앙정 荷與俛仰亭> 편액등이 있다.


  먼저 송순과 소세양의 시가 같이 걸려 있는 현판을 본다. 이 현판에 써진 소세양이라는 이름에 눈이 번쩍 뜨인다.

 

  소세양(1486-1562)이라 하면 송도의 명기 황진이와 진한 사랑을 한 사람 아닌가. 그는 어떤 여인과도 같이 지내는데 30일간을 넘기지 않았는데 황진이 하고는 이 기약을 훨씬 넘겨 사랑에 푹 빠졌다 한다. 작년 12월 말에 종영된 KBS 2 TV 인기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예조판서 김정한은 바로 소세양을 모델로 한 것이다. 황진이 역을 한 하지원은 이 드라마에서 김정한과 이별하는 날 그와 헤어지기 싫어서 이런 시를 읊는다.


그리움만 남아

                                       

달빛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가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누렇게 피어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취한 임은 무한정 술만 마시네.


흐르는 물소리  차가운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고

매화 향기는 피리 소리에 스며드네.

내일 아침 우리 이별한 뒤에는

푸른 물결처럼 그리움이 길이 남겠지


 

奉別蘇判書世讓        봉별소판서세양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流水和冷琴            류수화랭금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이어서 황진이는 한양 간 임이 너무나 그리워서 꿈길에서라도 같이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음 시 한 수도 읊는다.


꿈에서 만나요

 

보고 싶고 그리워도 만날 길은 꿈속밖에 없으니

제가 반가이 임을 찾을 때,  임도 저를 반가이 찾으소서.

바라옵건대,  멀고 먼 꿈길을 서로 달리 오가지만

일시에 꿈꾸어 같은 꿈길에서 서로 만나사이다.


  夢


  想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似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이 한시를 읽으면 명기(名技) 황진이의 시 작법이 가히 명작이다. 농방환시환방농(儂訪歡時歡訪儂). 첫 글자가 농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글자가 농으로 끝나는 글 솜씨, 시제(詩題)가 몽(夢)이요. 1,3구의 운 또한 몽(夢)인 시 작법. 정말 걸작이다.  


  한편 황진이는 한양으로 간 소세양에게 다음 시조를 보냈는데 이 시조가 당시에 장안의 화제 거리였다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가실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밤길 예놋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세양은 명종 시절에 우찬성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말년을 익산에서 살았다 한다. 그는 이곳 송순이 있는 면앙정에도 몇 번 들렀나 보다. 또한 그는 송강의 스승인 김윤제와도 친분이 있었다. 김윤제는 부안군수로 있을 적에 소세양에게 새우젓과 생선을 보내준 적이 있었는데, 소세양은 김윤제에게 고맙다고 사례하는 시를 쓴다.

 

가을비가 열흘 넘겨 땅에 꽃들 썩어가니

반찬 올린 오이 가지 오래도록 물렸는데

대소쿠리 성한 생선 멀리서 보내주니

처자식을 바라보며 내 홀로 자랑하오.


秋雨經旬土蝕花      盤饌久厭飣瓜茄.

筠籠遠惠莘莘尾      却對妻孥獨自誇.

 

소세양, 陽谷集 권4, 「謝扶安守金允悌 惠蝦醢及魚」


  이제 나는 이 현판에 있는 송순과 소세양의 시를 감상한다. 먼저 송순의 시부터 음미한다.

 

지팡이 짚고 솔 그늘 사이를 한가로이 거니는 데

언덕은 시내 머리에 의지하였네.

처마머리에 물러난 해는 하늘까지 가기가 멀고

자리에서 보이는 산은 들을 둘러싸고 있네.

바람은 연기를 몰아 나무사이로 지내고,

구름은 비를 내리며 가을을 재촉하네.

오르락 내리락 내 홀로 흥이 나다가

이 세상에 이런 저런 수심도 있네.


黎杖松陰步步幽   岸中從倚玉溪頭

巡簷白日行天遠   對揚靑山護野圍

風引店烟遙度樹   雲將浦雨細隨秋

登臨自取武邊與   肯着人間段段愁


이 시에 차운하여 소세양은 아래와 같이 시를 쓴다.

 


 

차운


대나무와 수풀이 깊은 곳에 정자가 깊숙하니

백 척이나 끊어진 언덕 머리에 서 있네.

고인물이 가득할 땐 들까지 합해지고

뜬 구름이 걷히면 산봉우리가 둘렀네.

금성산은 비를 몰아 사방으로 보내고

무등산은 가을을 한 조각씩 나누어 놓았네.

꿈에 놀라 깨어보니 가슴이 텅 비었는데

봉래산에 원숭이와 학은 무슨 수심이 있으리오.


  한편 어제(御製) 옆에는 소쇄원 주인장인 소쇄처사 양산보가 쓴 시가 걸려 있다. 양산보와 송순은 이종 사촌간이니 소쇄처사의 시가 이곳에 한 편쯤은 걸려 있음 직 하다. 


차면앙정운


뭇 산은 연이었고 시냇물은 꼴꼴 흐르는데

한가로이 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을 바라 보았네

들밭은 널찍한데 정자난간은 가파르고

오솔은 굽틀 굽틀 뜰방은 연이었네

큰 들에 펼친 등불은 모두가 나의 달빛이요

긴 하늘에 일어난 구름은 모두 인가에 연기로세

청평의 좋은 경치 구경할만해

푸른들 동쪽 산 오래도록 전하리라.


여기까지 읽어내려 가다가 그 뒤에 나오는 면앙정 시 구절은 눈에 익다.


단구를 찾기 어렵다고 무엇이 아쉬워

참으로 좋은 경치 이곳이 분명하다

널찍한 건곤은 너그러이 포용하고

바라보니 산수는 질펀하기만 해

풍상이 몇 해든가 솔과 대 늙었고

시주 즐긴 당년엔 벼루물도 말랐으리

난간에 기대어 눈동자를  돌려보니

세상과 인연하는 소식이 끊겠구나.


  그리고 보니 후반부 구절은 내가 소쇄원 제월당에서 본 소쇄처사의 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