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 동북공정

고구려 역사기행 2 -오녀산성

김세곤 2007. 6. 16. 19:02

 

 고려성 이라는 간판이 눈에 뜨인다. 5세기 이후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하였다 한다. 

 

환인 시내를 흐르는 혼강



환인 시내를 지나면서 고려성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 하나를 보았다.

이곳이 바로 옛 고구려 땅임을 상징하는 간판이다.


조금 가니 강이 하나 나온다. 강폭이 꽤나 넓다. 이 강이 바로 혼강(渾江)이다. 강물이 혼탁하다 하여 붙여진 혼강. 이강은 예전에는 엄리대수(엄체수)라고 하였다 하며 비류수라는 말도 있다.


이 비류수에는  주몽이 강을 건넌 설화가 있다.


주몽이 부여에서 대소 왕자등 일곱 왕자의  감시에서 탈출하여 오리 마리 협부를 데리고  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물은 깊은데 배가 없어 추격하여 오는 부여 군사들에게 잡힐 위기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대문장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주몽은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다시 외쳤어라.

나는 하늘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라

난리를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거늘

슬프다 이 외로운 마음을

하늘과 땅은 저버리려나.


문득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자라 떼 몰려나와 꼬리를 맞물어

어느 덕 훌륭한 다리가 되어

무사히 강물을 건넜도다.


추격하는 군사들이 따라와

멋모르고 다리위에 올라섰으나

다리는 어느 덧 허물어지고

군사들은 강물에 떨어졌다네. “


이 장면을 읽으니 마치 <십계> 영화에서 모세가  홍해를 건넜을 때 바다가 갈라진 장면이 생각난다.



 

 

 

 식당 안에 부조되어 있는 오녀 선녀들.

 

 

  식당에서 바라 본 오녀산성 

 

 

 

 

 

  주몽이  나라를 세웠다는 환인시 오녀산성을 찾다.  오녀산성 가는 길은 험난하다.  예상 시간보다 2시간 늦게 도착하여

 

 산 정상을 못 보고 말았다.  오녀산성을 가까이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다. 

 

 환인시  들어가는 곳에 혼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은 주몽이 동부여 대소왕자에게  �기다가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가 되어

 

 주몽  일행을 건너게 한 비류수이다. 

 

 환인시로  들어가니   5 선녀로 표현되어 있는 오녀 동상이 세워져 있고,  점심 식사한  식당의  입구  부조도  다섯 신녀이다.

 그런데  여행 안내원 이야기는 다섯 여장군 이라는 것이다.  이곳 왕이  남자가 없이 다섯 공주를 낳았는 데  그녀들이 모두 여장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득 <연개소문>  드라마의  여장수 연수정 과 쌍검녀가  생각 난다.

  

오녀산성은  신시와  같다. 가운데가 평평한 것이 신령 스럽다.  그런데 이곳은 산성이어서  인구가 늘어나면 지내기가

조금 불편하였으리라. 그래서 2대 유리왕이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를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



환인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오이마리 협부등과 함께 졸본천(비류수)에 이르러서 비류수가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고 적혀 있고, 중국의  위지에는 “주몽이 홀승골성에 이르러 거기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 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의 홀본 서쪽에 있는 산성 위에 수도를 정하였다”고 적혀 있다.


오녀산은 높이가 해발 820미터로 수직 절벽 위에 평평한 분지이다. (동서 300미터 남북 1000미터 둘레 2440미터). 이곳은 요새로서의 기능은 뛰어나지만 고구려의 위세가 커지자  도읍으로서는 너무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한다. 그래서 유리왕은 40년간의  이곳 생활을 마무리 하고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여행 일정 때문에 오녀산을  산 입구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다.

단동에서 환인 도착이 도로 사정이 나빠서 두 시간 이상 늦어진 바람에  별수 없이 오녀산 산정을 가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멀리 바라본 오녀산은 마치 신선들이 사는 신시 神市 같다.  산 위의 넓은 분지가 마치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