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말의 유럽 ‘민족 대이동’은 남부 시베리아에 살던 훈족이 서진(西進)함에 따라 동유럽에 살던 게르만족이 서유럽으로 연쇄 이동함으로써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약 200년에 걸친 이 민족 대이동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전기가 됐다고 역사책은 설명한다. 이로부터 근 1000년이 흐른 후 근대사의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 15세기 신대륙 발견으로 비롯된 유럽 인종의 남북 아메리카 대륙 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민족 대이동은 지금도 진행중이라고 굳이 말할 수 있다. 아시아 인종의 미주대륙 이주, 아프리카 인종의 유럽대륙 이주 등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은둔의 왕국’이었던 한국 땅도 민족 이주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다.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한국인 유학생이 미국에만 10만명에 이르고 한국으로 공부하러 온 외국인 유학생이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 이웃집 새댁은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귓속말은 이젠 농촌에선 얘기 축에도 못 든다.
현대인의 이주 성향을 주목한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유목민(nomade)’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예언이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첨단 과학·기술사회에서 웬 양치기 부족이 나타나느냐고 어깃장을 놓지 말고 일단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아탈리는 국경을 넘는 빈번한 교류와 대량 이주로 세계화가 촉진되고 있고, 그 상징과 비유로 유목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말은 곧 그의 브랜드로 정착됐다.
그의 예지가 빛나는 2000년 저서 ‘21세기 사전’에서 아탈리는 유목민의 특징을 몇가지 나열하는 가운데 ‘환대’와‘접속’을 언급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환대는 타인에 대한 예의바르고 개방적인 태도, 접속은 유랑하면서도 ‘부족’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통신 수단을 의미한다. 이 설명을 굳이 실생활에 대입해보면 환대는 이민과 여행의 자유에 대한 각국의 관대한 정책, 접속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통신기술의 급격한 발달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유목민론을 더 발전 시킨 두번째 저서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아탈리는 유목민 문화는 항상 정착민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인류사에서 정주성(定住性)은 0.1%에 그치는 시기일 뿐이며 국가는 노마드의 행렬이 잠시 멈추는 오아시스라는 게 그의 이론이다. 그는 모든 문명의 토대는 유목민이 발명·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정착민들이 발명한 것이라고는 고작 국가, 세금, 감옥, 저축, 총, 대포, 화약뿐이라고 비꼰다. 국가와 세금을 낮춰 평가하는 데서 아탈리의 세계화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지난 10일자 문화일보에는 그의 최신 저서 ‘미래의 물결’이 소개됐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은 향후 50년 안에 세계 11대 강국 가운데서도 최선두에 설 것이라고 예언한다. ‘베스트 일레븐’에 든다는 그 예언 자체는 반갑지만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어깨를 무겁게 한다. 우선 북한으로 인한 재앙 시나리오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며, 외부 세계로의 개방, 창조의 자유 보장, 교육과 가족·이민 정책 개혁 등이 그가 제시한 과제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미래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아탈리의 권고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한국 사회가 유연하고 역동적일까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국인들은 지난 4년간의 시대 역주행 정치와 북한 독재체제의 난폭한 도전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 있다.
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른바 ‘민감품목’은 자유교역 대상에서 빼고 관세철폐 일정도 단기간이 아닌 장기 접근 방식을 채택한 낮은 단계의 상품 서비스 교류 약속이다. 그런데도 나라가 망할 듯이 아우성치는 패배의식이 민심의 거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다. 정신은 자유롭게 날고 싶지만 몸은 구습에 매인 것이 오늘 한국인의 삶이다. 앞서 가는 유목민들이 세계라는 대해(大海)에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동안 한국인은 정착민의 우물물만 마시려는지 두고 볼 일이다.
[[김성호 /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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