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에서 4
제4장 대숲 바람 부는 소쇄원에서(4)
한편 그는 스스로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불렀다. 그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을 자작한다. 이 글은 자화상을 그리되 남을 그리는 듯 객관적이며 해학적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
선생은 어느 곳 출신인지 또 그의 성이나 이름도 잘 알 수 없다.
그의 집 곁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어 그렇게 호를 오류(五柳)로 하였다. 선생의 성품은 한적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었으며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했으나 지나치게 따지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즐거워서 끼니도 잊고 탐독하였다.
타고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언제나 마실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이와 같은 처지를 알고 간혹 술자리를 마련 해 놓고 그를 초대하 면 가서는 언제나 다 마셔 버리곤 하였다. 기약은 반드시 취하는데 있었다. 취하고 난 후에는 물러나며, 떠나는데 마음 아쉬워하지 않았다.
사방이 벽만 둘러 있는 작은 집은 쓸쓸하기만 하고 바람도 비도 가리지 못하였다. 짧은 잠방이는 해져 꿰매 입었고, 밥그릇도 물그릇도 자주 비었지만 편안하였다. 항상 문장을 써서 스스로 즐기면서 다소나마 자기의 뜻 을 보였다. 득(得)과 실(失)을 마음에 잊는 그런 자세로 자신의 생애를 마치려했다. 이 얼마나 자연에 묻혀 살려고 하는 마음인가. 스스로를 즐기는 삶이다.
이렇게 도연명은 자연을 즐기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63세로 세상을 뜬 해(427년)에 자기 손으로 썼다는 <자제문(自祭文)>은 너무나 처연하다. 그는 자제문 끝머리에 ‘나는 참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죽은 후의 세상을 어떨는지? 아! 애달프구나! (人生實難 死如之何 嗚呼哀哉)’하였다. 아무리 자연에 귀의하고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그의 삶은 가난, 궁핍 그리고 비참하였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가식(假飾)이 전혀 없다.
나는 이 방에서 도연명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다가 도연명이야 말로 귀거래(歸去來)를 제대로 한 사람임을 느낀다. 그러면서 양산보와 김인후와 정철의 귀거래에 대하여 비교를 하여 본다.
소쇄처사 양산보. 그는 처음부터 출사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래서 귀거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송강 정철. 그는 벼슬을 하다가 네 번의 낙향이 있었다. 이 낙향은 일시적 은퇴이긴 하나 그것은 항상 출사를 위한 휴식이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 라는 도연명식 귀거래는 없다.
하서 김인후. 그는 벼슬을 하다가 그의 나이 36세에 인종이 승하하자 아예 낙향하여 죽을 때 까지 15년간을 줄곧 초야에 묻힌 사람이다. 하서만이 진정으로 귀거래가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와 관련하여 나는 ‘양산보는 숨어사는 사람이요, 정철은 현실을 좇는 사람이며, 김인후는 출처가 분명한 사람이라’는 인물평을 한다.
주돈이의 애련설
한편 소쇄원 주인 양산보는 그의 스승인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북송 초기의 성리학자인 염계 주돈이(1017-1073)를 존경하였다 한다. 그래서 주돈이가 쓴 <통서>와 <애련설> <태극도설>을 항상 글방에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 하고 연꽃처럼 고결한 선비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고 있다.
애련설(愛蓮說)
물과 뭍의 초목과 꽃 가운데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하였으나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한다.
진흙탕에서 나와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 잔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으되 밖은 쭉 곧아,
덩굴지지도 않고 가지도 없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으니,
멀리서 바라봐도 만만하게 다룰 수 없노라.
내 이르노니,
국화는 꽃 가운데 은일자요, (菊花之隱逸者)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자이며, (牧丹之富貴者)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하겠다. (蓮花之君子者!)
아, 국화에 대한 사랑은 도연명 이후로 듣기 어려우니,
나와 더불어 연꽃을 사랑할 사람은 누가 있을까?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많으리라.
고문진보 후집(2003,을유문화사, P 1046)에는 주돈이가 군자의 꽃인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진흙탕에서 나와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는 군자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며, ‘맑은 물 잔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는 안으로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면서 꾸미지 않는 군자의 덕을 말한다. ‘속은 비었으되’는 욕심 없이 맑게 트인 군자의 마음이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며, ‘밖은 쭉 곧아’는 대쪽같이 곧고 바른 군자의 언행을 비유한 것이다. ‘덩굴지지도 않고’는 군자가 사사로운 것을 쫓아다니지 않는 것을 ‘가지도 없으며’는 군자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는 군자의 덕망이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비유하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으니’는 군자가 결백하게 홀로 곧은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멀리서 바라봐도 만만하게 다룰 수 없노라.’는 도덕군자의 위엄에 눌려 사람들이 감히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애련설>에 도연명의 국화 사랑 이야기가 나오니, 도연명의 국화 시 한수가 생각난다.
음주 제5수
사람들 틈에 농막 짓고 살아도
수레나 말 타고 시끄럽게 찾아오는 자 없노라.
어찌 그럴 수 있는 가 묻기도 하지만
마음 두는 것이 원대하니 몸담은 땅도 스스로 의지하게 되노라
동쪽 울타리에 피어난 국화꽃을 딸 새
무심코 저 멀리 남산이 보이노라
가을 산 기운 저녁에 더욱 좋고
날 새들 짝 지어 둥지로 돌아오니
이러한 경지가 바로 참맛이러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구나!
飮酒 第5首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輿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얼마나 담담하게 쓴 시인가. 인간의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일하고자 하는 마음인가.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이란 구절은 정말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욕심이 없고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지면 자연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한문의 견(見)은 의식적으로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보인다는 뜻이다. 남산은 여산이다. 도연명이 사는 구강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이라고 했다. 특히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란 구절은 너무나 유명하여 후대의 글깨나 쓰는 문인들은 누구나 국화시를 쓸 때마다 이 구절을 많이 모방하였다고 한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앞 번의 식영정 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으나, 태극은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며 태극에서 음양과 오행이 나오고 거기에서 다시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무극이 태극이니라.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으니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되고
고요하게 되면 음을 낳으니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중략)
양이 변하고 음이 합쳐져서
수 화 목 금 토를 낳으니
이 다섯 가지 기운이 순조롭게 퍼짐으로서
사철이 운행하게 되는 것이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인 것이니,
태극은 본시 무극이다.
(후략)
한편 나는 도연명을 사모하고 주돈이를 존경한 사람은 양산보 뿐만 아니라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도 그랬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하서전집>에 의하면 하서는 귀거래사를 수 없이 읽었고 <독귀거래사>라는 글도 지었으며, 태극도설에 대하여는 너무 정통하여 정조임금이 그를 ‘해동의 주돈이’ 라고 했을 정도이다. 바로 이 제월당 방에서 김인후와 양산보 두 사람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주돈이의 <애련설>을 읊고 <태극도설>의 오묘한 이치를 논하였으리라.
퇴계 이황도 도연명을 유달리 흠모하였다 한다. 그는 화도집음주(和陶集飮酒) 20수와 화도집이거운(和陶集移居韻) 2수를 지었다. ‘한 잔의 술을 홀로 마시며 한가롭게 도연명의 시를 읊노라. 숲이나 시내사이를 거닐며 후련한 심정으로 즐기노라.’(화도집이거운 제2수). ‘우뚝 솟은 도연명 노인을 한평생 아침저녁으로 친애하네. 넘실대는 큰 물결 속에서도 오직 그대만은 나루터에서 헤매지 않았네.’(화도집 음주 제20수). (사실 당시 조선의 대부분의 선비들은 도연명과 주자 주돈이를 흠모하고 그에 대한 책을 한 두 번씩은 읽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