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을 찾아서

소쇄원 2 -송강문학기행

김세곤 2007. 1. 22. 06:10

 

 

   제4장 대숲 바람 부는 소쇄원에서(2)

 

 하서 김인후(1510-1560).

 그는 소쇄원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선에 그는 양산보와 사돈간이다. 양산보의 둘째 아들 고암 양자징(1523-1594)과 그의 둘째 딸이 혼인을 맺었다. (하서는 사위인 양자징을 예뻐하였고, 고암은 하서 집에서 살면서 하서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사후에도 그와 함께 필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하서는 18세부터 5년간(1528-1533 기간 중)을 고향 장성에서 화순 동복에 유배중인 신재 최산두(1483-1536)를 만나러 갈 때 마다 반드시 이곳 소쇄원을 들렀다 한다. (산두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13년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를 실현하려다 기묘사화(1519년)로 화순군 동복에 유배를 와서 1533년까지 15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광조, 양팽손(梁彭孫), 기준(奇遵)과 더불어 4학사라 불리었다.)


 여기에서 나는 하서 김인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김인후의 졸기(卒記)를 보자.


조선왕조실록 명종 15년 1560년 1월


전 홍문관 교리 김인후(金麟厚)가 졸(卒)하였다. 자(字)는 후지(厚之)요, 자호(自號)를 하서(河西)라고 했으며 담재(湛齋)라고도 했는데 장성(長城) 사람이다.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했다. 5∼6세 때에 문자(文字)를 이해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장성하여서는 시문을 지음에 청화하고 고묘(高妙)하여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그가 뜻을 둔 바는 예의(禮義)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3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직(轉職)되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청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제수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의 국상(國喪)을 만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훼척(毁瘠)하여 을사년 겨울,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가 조정의 전후 제수에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사제에 거처하면서부터는 성현(聖賢)의 학문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조예(造詣)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가례(家禮)》에 유념하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더욱 삼갔으며, 시제(時祭)와 절사(節祀)를 당해서는 비록 앓는 중이라도 반드시 참석했고, 시속의 금기(禁忌)에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文藝)를 뒤에 했으며, 남과 대화를 나눌 때는 자기 의사를 표준으로 삼지 않았으나 한번 스스로 정립(定立)한 것은 매우 확고하여 뽑아낼 수 없었고 탁월해서 따를 수가 없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썼고 필적은 기굴(奇崛)했다. 51세에 졸했다. 《하서집(河西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하서 김인후. 호남 성리학의 선구자인 그는 본관이 울산이고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정월 보름날에 다음 5언4구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 났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밝은 달은 본디 사심이 없도다.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그는 10세 때 전라관찰사로 내려온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송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22살(1531)에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퇴계 이황(1501-1570)과 교류가 두터웠다. 31살인 1540년(중종 35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다음해에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의 영광을 누렸다. 1543년에 홍문관 박사를 거쳐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으며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543년 겨울부터 옥과현감으로 있었는데 그의 나이 36세인 1545년 7월에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대고 옥과현감 자리를 사직하고 귀향하여 평생 초야에 묻히었다.


 그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인 7월 초하루에는 술을 가지  산에 올라가 술 한 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한 잔 마시고 한번 곡하다가 취하면 소리 내어 울었을 정도로 인종을 못 잊어 했다 한다. 하서는 학문과 출처를 모두 갖춘 학자이었고 1,600수에 이르는 시를 썼다. 담양 창평과 관련이 있는 시는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 성(誠)과 경(敬)을 중시하였고 천문, 의학, 율력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집안은 인근 고을에서 배우러온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는 송강 정철도 있었다. 그는 문묘 18현에 배향된 유일한 호남출신이고 그를 모신 서원이 장성 필암서원이다.


 이런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이 어느 정도 완성된 1548년(그의 낙향 후 3년 되는 해)에는 <소쇄원 48영> 시를 지어 소쇄원의 경치를 찬양한다. 이후로도 그는 틈이 날 때는 이곳에서 몇 달씩 머무를 정도로 소쇄원을 좋아하였다 한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중  초정에 대한 시는 제1영으로 지어져 있다. 


제1영 자그마한 정자 난간에 기대어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귀 기울이면 영롱한 물소리 들려라 


  小亭憑欄


 瀟灑園中景   渾成瀟灑亭

 擡眸輪颯爽   側耳廳瓏玲


 한편 송강 정철도 그의 첫 번째 창평 낙향 시절인 1575-1576년 사이에 소쇄원 초정에 관한 시를 쓴다.  


소쇄원 초정에 쓰다.


나 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간 사람 남은 사람  40년 역사.

시냇물 흘러가는 벽오동  아래

찾아온 손님 취하게 술이나 마시세.


 瀟灑園題草亭   


我生之歲立斯亭     人去人存四十齡    

溪水泠泠碧梧下     客來須醉不須醒  


 송강이 태어난 1536년에 초정이 지어졌고, 그 후로 40년이 흘렀다. 정자 밑으로는 시냇물이 흘러가고 벽오동이 심어져 있다. 이 초정에서 주인과 손님은 거나하게 술을 마신다. 송강의 단골 메뉴인 술은 이 시에도 빠지지 않는다.


 이윽고 나는 ‘오곡문’이라고 써진 담장을 지나 ‘소쇄처사양공지려’라고 벽에 써진 글씨를 보면서 제월당에 이른다. 이 두 글씨들은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양산보의 4대손 양진태의 스승인 송시열은 1685년에 양진태의 증조할아버지 고암 양자징을 기리는 ‘고암공행장’을 써서 소쇄원과 맺는데 이런 연유로 소쇄원에 그의 글씨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