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화첩기행 - 김병종 8
쿠바-헤밍웨이 호텔, 헤밍웨이 카페
-
#1 한 줌의 허무, 호텔 암보스 문도스
“아바나에 가거든 꼭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de Ambos Mund os) , 511호에 가 보세요.”
떠나오기 전 LA에 사는 한 지인은 전화기 속에서 그렇게 당부했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쓴 장소이며 그가 쓰던 타이프라이터와 안경 같은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며. 사람들은 너나없이 기념의 장소에 들러 보고 싶어한다.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와 책상 하나, 스탠드 하나, 꽂혀 있는 책 몇 권 따위를 보고 떠날지라도 그렇게 누군가의 흔적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모든 존재는 따뜻하고 생생하게 반짝이다가 언젠가는 고요해지고 희미해져 끝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소멸과 망각에의 두려움은 동상을 만들고 기념관을 세우게 하지만 그 앞에서 우리는 안도하기보다는 앙금처럼 고이는 허무를 대면하게 된다.
호텔 암보스 문도스.
세월의 때 묻은 허름하고 묵직한 모습을 기대하고 달려간 그곳은 자료 사진에서 보았던 그 분위기가 아니다. 번쩍번쩍 광을 내고 새로 페인트칠을 한 건물은 주변의 낡은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미당이 머무르며 시를 썼다는 동백장 여관이 그러했듯이. 호텔 로비는 온통 헤밍웨이 사진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이 미국 작가는 어느새 반미 국가 쿠바의 가장 주요한 관광자원이 되어 있었다.
- ▲카페 플로리디타의 분위기. 음악과 쿠바술 다이키리, 그리고 낭만이 넘친다.
-
헤밍웨이가 머물던 방을 보고 싶다 했더니 종업원은 당분간 공개하지 못한다며, 잠시 들여다보겠다는 부탁도 거절한다. 흡사 움직이는 골동품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 방 앞까지 갔다가 돌아 나올 수밖에.
처음 아바나에 온 헤밍웨이는 이 호텔에 투숙하며 글을 썼다. 그러나 창 밖에서 들려오는 마차소리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견디기 어려워 시 외곽으로 집을 옮기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복도에 서 있으니 음악소리, 떠드는 목소리, 바깥의 소음들이 휴지뭉치처럼 날아다닌다.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겨 대다 지치면 근처의 선술집으로 달려가 그 독한 술 다이키리를 몇 잔 들이켜고는 돌아와 짐승처럼 억억 소리를 내며 찬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타이프라이터 앞에 서서 글을 썼겠지. 돌아서다 말고 뒤돌아보는데 웃통을 벗은 채 글을 쓰고 있던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올 것만 같다.
#2 억센 사내들의 놀이터, 보데기타 델 메디오
몇 걸음 저 앞에 그가 걸어간다고 치자. 호텔을 나온 나는 그의 동선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 이 긴 이름의 카페, 카페라기보다는 선술집은 아바나성당 근처에 있다. 좁고 어두운 뒷골목에 있는 이 장소가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 역시 헤밍웨이의 흔적 때문이다. 아래위층의 벽을 빼곡히 메운 낙서나 서명들이 곧 이 집의 족보이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의 서명도 보인다. ‘나의 두 가지 술, 모히토(mojito)와 다이키리(daiquiri)…’라고 헤밍웨이가 휘갈겨 쓴 글은 액자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 ▲카페 보데기타 델 메디오가 있는 올드 아바나 풍경.
-
가뜩이나 비좁은 실내는 위아래층 할 것 없이 입추의 여지가 없다. 이 거칠고 왁자한 곳엔 특이하게도 여성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거나하게 취한 남성들은 어쩌면 모히토나 다이키리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거침없이 아내를 갈아 치우고 여자를 자신의 삶의 한 작은 부분으로 여겼던 헤밍웨이의 남근주의에 숭배를 바치러 온 헤밍웨이의 교도들처럼 보인다. 이 거칠고 왁자한 분위기야말로 소멸되어 가려 한 그의 마초 이미지에 불을 댕긴 발화점이 아닐까.
#3 카페 플로리디타의 구석에 앉은 헤밍웨이쿠바산 럼에 소다와 얼음과 라임즙 그리고 민트잎을 넣은 칵테일, 모히토. 달콤한 첫맛에 이끌려 마시다 보면 그러나 투명함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던 럼주의 독함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만다. 오래전부터 찾아와 보고 싶었던 곳, 카페 플로리디타(El Floridita)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좁은 골목엔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 ▲아바나에는 여행자들이 헤밍웨이호텔, 헤밍웨이카페라고 부르는 호텔 암보스 문도스와 보데기타 델 메디오, 플로리디타(사진)가 올드 아바나 무기광장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호텔 암보스는 처음 아바나에 온 헤밍웨이가 머무르며 글을 썼던 곳이어서, 그리고 두 카페는 그가 늘 드나들던 곳이어서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
카페 플로리디타는 희미한 가로등이 켜진 그 광장의 모퉁이에 있었다. 간판에다 ‘다이키리의 요람’이라고 별호를 붙여 놓았다. 창 틈으로 흘러나오는 팀발레르와 봉고, 손(son)의 리듬이 화선지에 먹물이 스미듯 어둠과 뒤엉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5인조 밴드가 연주 중인데 밴드 너머로 실물 크기의 헤밍웨이 조각이 앉아 있다. 조각상 옆 구석자리에 앉아 다이키리 한 잔을 주문한다. 혼자 앉아 있던 백인 남자가 내 잔을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다이키리 예찬을 시작한다. 얼음을 갈아 럼주에 붓고 거기에 사탕수수즙을 부어 휘휘 저어 완성되는 다이키리는 폭염 속에서 일하던 쿠바 노동자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었다니 우리로 치면 막걸리와 비슷한 술이라고 할까.
쿵쾅거리는 살사 연주 속에서 사내는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며 내게 건배를 제의한다. 그는 영어로, 나는 한국어로 한마디씩 건배사를 외쳤지만 어차피 두 사람의 언어는 실내의 왁자함 속에 파묻혀 버린다. 이보게 동양친구 언제까지 내 뒤를 밟을 건가. 구석진 저쪽에서 헤밍웨이가 나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는 것만 같다.
창 밖으로 아바나의 검은 밤에 푸름이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