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기행- 김병종 7
입력 : 2006.12.18 00:03 / 수정 : 2006.12.18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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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히마르(Cojimar) 가는 길
자동차는 지금 노인과 바다의 코히마르 마을을 찾아가고 있다. 전신주들이 소실점 안으로 사라진다. 스치는 풍경마다 아쉽게 뒤돌아보게 되는 건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초록 이파리 사이에 점점이 찍힌 붉은 꽃 프람보얌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한다. 혁명, 자유, 비바 쿠바 따위의 슬로건이 적힌 입간판이 빠르게 지나간다. 흔들리는 들꽃 사이에서는 격문마저 낭만적이다.
슬며시 산허리를 돌아선 차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눈앞에 거짓말처럼 바다가 열린다. 액자 속 풍경화 같은 작은 바닷가 마을. 코히마르.
카스트로가 꿈꾼 낙원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펼쳐진 풍경을 보자 문득 이곳이 낙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쓸 때 염두에 두었던 곳이 쿠바였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던가. 경계를 나눌 수 없이 아스라한 하늘빛과 바다색. 그 푸른빛 구도 속에서 생동하는 아이들. 그러나, 가난한 낙원이다. 손대면 그대로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 듯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바닷가에 엎드려 있다. 윗도리를 벗은 소년들이 달려와 차에서 내리는 나를 바라본다. 내게서 이방인의 냄새를 맡았을까, 강아지 한 마리도 서 있다. 소년과 강아지의 눈빛이 꼭 닮아 있다.
마을을 지나 바다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사방이 평화투성이다. 거칠 것 없는 햇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는 물결. 기묘한 치유력이 느껴지는 달콤한 바람. 여행자의 허파를 간질이는 바다 내음…. 영화 ‘노인과 바다’ 속에서 노인 산티아고와 소년 마놀린이 걸어오던 그 해변이다. 영화 속에서 이미 낡아 있던 방파제 끝의 스페인 식 성채는 여전히 세월을 머리에 인 채 서 있고, 산티아고를 닮은 노인들은 집 앞에 낡은 나무의자를 내놓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노인과 바다’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풍경은 정지된 화면처럼 고요하다. 그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헤밍웨이는 이곳에 와 자주 머물렀다 하는데 이 코히마르의 물빛과 불타는 석양이 그를 잡아끌었을 것이다.
-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고기 잡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쿠바에서 물고기를 둘러멘 어촌의 소년은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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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 테라사 풍경
카페 라 테라사. 이처럼 아름다운 바닷가 집을 본 적이 없다. 지는 해에 금빛으로 물든 바닷물이 테라스를 쓰다듬는 이 집은 코히마르의 전경이 가장 잘 펼쳐 보이는 장소이다. 언어란 풍경을 따라잡지 못하는가, 나는 그저, 너무나 아름답다고, 그렇게밖에는 중얼거리지 못한다.
영화를 촬영할 당시 헤밍웨이는 여기서 머무르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한다. 금방이라도 껄껄 웃으며 테라스 저편에서 그가 걸어 나올 듯하다. 벽에는 소설 속 산티아고의 실제 모델이었던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와 헤밍웨이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헤밍웨이는 흡사 부두의 일용노동자나 어부처럼 보인다. 오히려 작가처럼 보이는 건 푸엔테스다. 소설에 보면 매양 텅 빈 배로 돌아올 뿐이지만 바다 색깔을 한 노인의 눈빛만은 늘 불굴의 광휘를 띠고 있었다. 오두막집에서 소년에게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의 얘기를 들려줄 때의 그 형형한 눈빛을 나는 푸엔테스의 사진 속에서 찾아낸다.
이곳에서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게 된다. 목선을 타고 자주 낚시를 나가곤 했다. 어떤 날은 커다란 놈을 잡아 득의양양했을 것이고 어떤 날은 텅 빈 배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두 사람은 별이 성성한 돌아오는 뱃길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둘의 우정은 각별했다. 글자를 읽지 못했던 푸엔테스를 위해 헤밍웨이는 자신의 소설을 큰소리로 읽어주곤 했다고 한다. 국적을 초월하여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헤밍웨이가 쿠바를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푸엔테스는 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슬픔과 회한 속에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힘을 모아 헤밍웨이의 흉상 하나를 세운다. 물가에 세워진 헤밍웨이의 그 흉상은 지금도 그가 떠나간 바다 쪽을 향해 서 있다.
헤밍웨이가 자살한 후에도 사십여 년을 더 산 푸엔테스는 2002년 10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럼주를 사들고 자신을 찾아와 헤밍웨이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그와의 추억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들려주어야만 했던 푸엔테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제는 그 푸엔테스도 떠나가고 없다. 사람은 가고 풍경만이 남아 있다.
- ▲불굴의 투지로 상어떼와 싸우며 거대한 물고기를 낚아 올린 노인에게는 헤밍웨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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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인과 바다, 인생과 바다
무려 84일 동안 고기다운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산티아고는 85일 째 되는 날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거대하고 멋진 청새치를 만난다….
읽지 않아도 구전처럼 전해져 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노인과 바다’는 한 우직한 어부의 일지 같은 소설이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허탈했다. 이것이 전부인가. 이렇게 단순하고 쉬운데 노벨상을 받았단 말인가. …그때 나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너나없이 인생들이 떠있는 곳이 망망대해라는 것을. 그리고 앙상한 뼈만 남을지라도 끝내 삶의 항구로 끌어오고 싶은 ‘바로 그것’에 전부를 걸어야 하는 순간이 인생마다에는 있다는 것을.
‘노인과 바다’의 화면 속을 걸어 나오며, 나는 또 뒤를 돌아보고야 만다. 잔잔한 물결을 스치며 검은 새 한 마리가 비상한다. 검은 쿠바 독수리 아우라디노사다.
우리의 삶이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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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Hemingway, Ernest Miller, 1899~1961)
미국의 소설가. ‘무기여 잘 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노인과 바다’등의 작품이 있다. 문명사회에 대한 비극적 세계관을 군더더기 없는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그려내었다. 20세기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며 퓰리처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반평생을 쿠바에 머물며 정신적 쿠바인으로 살았던 그는 1961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