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병종의 라틴 화첩기행 5
[라틴 화첩기행] “나를 구해줘” 5
이 푸른 집이야말로 그녀 삶의 상징적 기호이다.
마당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둡고 불안한 기운이 뿜어 나온다. 어디서일까. 정원 한구석에는 마야의 신전 같은 피라미드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그녀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멕시코 전통의상 테후아나를 차려 입고 여사제 같은 모습으로 제(祭)를 올리기라도 한 걸까. 어디선가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비어있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의 나무 아래, 계단의 구석, 모퉁이 그늘, 집의 어두운 안쪽마다 어김없이 온몸이 검은 고양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화려한 옷차림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어두운 내면처럼 온통 검은 그것들은 독한 인광을 내뿜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하나, 둘, 셋… 열두 마리나. 내 어깨 뒤 어디쯤에서 프리다가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열두 개의 자아를 가졌답니다.
그래, 오고 말았다. 프리다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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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고통과 절망으로 자기 생의 주제를 삼고 싶어하랴. 프리다 역시 레몬의 물에 발을 담그고 햇빛 쏟아지는 카리브의 물결과 아스텍의 신비로운 풍경을 자신의 캔버스에 초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 사람과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신은 이 병약한 여인을 유독 편애했다. 이래도, 이래도, 하듯 그녀의 영혼과 육체를 죄어왔다.
실내로 들어와 전시된 그녀의 그림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이토록 생생한 고통의 느낌을 전달 받은 적은 없었다. 그림들은 한결같이 서늘하고 위험한 기운과 어떤 강렬한 메시지를 외치고 있다. 그 메시지는 무얼까. 나를 구해줘, 이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줘, 내 몸 안에 박힌 철심을 빼내줘,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불편한 심정으로 그림들을 보고 있는데, 얼굴을 빛내며 그것들을 바라보는 다른 관람객이 있었다. 열네댓 살이나 되었을까. 휠체어를 탄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프리다 전문가이기라도 하듯 그림 하나하나를 조근조근 설명해준다. 소녀는 구원의 빛이라도 발견한 듯 그림들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나는 어린 소녀와 프리다의 그림 사이에 생겨난 자장(磁場) 밖으로 밀려 나온다. 고통은, 다만 그것을 지금 겪고 있는 사람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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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여사제 프리다. 그 프리다에 대해서는 디에고 리베라를 빼고는 한 줄도 나갈 수가 없다. 여학교 시절, 우연히 멕시코 국민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작업 현장을 구경하러 갔던 프리다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사로잡힌 영혼이 되고 만다. 그녀 나이 스물둘에 디에고와 결혼을 한다. 디에고는 스무 살이나 연상인데다 이미 두 번의 결혼경력이 있었고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게다가 셀 수 없이 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던 와중이었다.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한 남자였지만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그녀들 중의 하나였다.
디에고는 당대 최고의 문화권력이었다. 자신의 그림 속에는 즐겨 민중을 그려 넣었지만 실제로는 정치 거물들과 교류를 했고 방탕과 사치가 일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급기야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치명적 불륜을 바라보면서 프리다는 자신의 머리를 싹둑 자른다. 자화상에는 난데없이 수염을 그려 넣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보란 듯이 요란한 연애에 나선다. 상처 받은 자기애가 관능으로 표출되면서 팜므파탈의 면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프리다는 자화상을 그리며 그 이마에 디에고를 새겨 넣는다. 내 생명보다 디에고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과 그를 죽이고 싶다는 말이 동의어라는 것은, 누군가를 자신의 존재보다 더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서로의 가슴에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두 마리 새끼원숭이처럼 그 상처를 핥아주기의 연속이었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배신과 분노와 고통이 일용할 양식이었다.
#4 이토록 사랑하는데도 내 사랑이 부족한가요
오후가 되면서 좁은 전시장 입구엔 어느새 사람들의 줄이 길어졌다. 고통의 여사제의 집을 참배함으로써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행렬일까.
자신의 삶을 토막토막 잘라내어 만들어낸 이 작품들에 대해 죽기 전 그녀는 독백처럼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고 내 끔찍한 삶을 채워줄 다른 것들도 많이 잃었다. 내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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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랑하는데도, 요로나.
내 사랑이 부족한가요?
내 모든 삶을 다 주었건만 무엇을 더 원하나요?
이혼과 재결합을 거듭했던 디에고와 프리다. 뒤늦게야 디에고는 귀환하는 배처럼 프리다의 항구로 돌아온다. 이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서 두 사람은 함께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신다. 그러다가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일어선다. 차갑고 단호하게. 이번엔 리베라 아닌 프리다 쪽이었다. ‘이 마지막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언젠가 남겼던 그 메모처럼 프리다는 고통 없는 먼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