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
늙으면 건강이 최고란 말은 옛말!… 돈이 바꾼 가족관계
《올해는 바다이야기, 부동산 폭등 등 돈과 관련된 사건이 많았다. 사람들은 많고 적음을 떠나 돈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해진다. 사회 안전판이 미흡한 사회에서 돈은 개인의 행, 불행을 좌우하는 조건이기도 하고 부모,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돈이 바꾼 가족과 인간관계의 현 주소를 2차례로 나눠 살펴본다.》
1회 유전무효 무전유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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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며느리 올 때 지갑에 돈이 없으면 빳빳한 종이라도 넣어둬. 그래야 며느리가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지. 너희들도 보석함에 진짜 보석이 없거들랑 돌멩이라도 가득 채워 둬. 묵직하게 뭔가 들어있게 느끼게 말이야."
물론 농담이 섞인 말이지만 효(孝)에도 자본의 논리가 끼어들고 있는 세태를 느끼게 한다. 돈이 있어야 효도도 받는다는 현실이 '효의 실용주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쓴 입맛을 다시게 된다.
'유전유효, 무전무효(有錢有孝 無錢無孝)'는 일부 돈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집안 대소사에는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며느리의 출산을 앞두고 있는 예비 할머니 강모(63·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씨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주변에서 며느리가 아이를 낳은 뒤 출산 장려금을 주었다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어온 터였다. 며느리에게 비록 장려금까지는 주지 못해도 축하금은 주어야할 터인데 돈이 넉넉지 않아 걱정이다.
"젊은 사람들이 애를 하도 안 낳으니까 부모들이 출산 장려금을 준다는 거 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문제가 되니 슬금슬금 눈치가 보이고 얼마를 줘야하나 고민이 되네요."
돈은커녕 '수고했다'는 시어머니의 말 한마디에도 눈물이 핑 돌던 시절을 살았던 강 씨는 "어쩌다 이런 세태가 되었는지 한심하다. 그래도 부모 대접을 받으려면 며느리에게 남들하고 비슷하게는 해야 할 것 아니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강 씨처럼 자식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돈이 최선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기성세대들이 적지 않다.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에 사는 권모(67·여) 씨는 "애들 출가시키고 집을 줄여 이사 갔다가 다시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친구들을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했다"면서 "좁은 집에 살면 자식들이 들러도 불편해하고 손주들도 '할머니네 가난해?'라고 묻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엔 집도 차도 자식들 것보다 커야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면서 "나도 다시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까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정경숙(60·가명·서울 송파구 거여동) 씨는 "늙으면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돈 없고 건강하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몸은 멀쩡해 돌아 다녀야 하는데 돈이 없으면 얼마나 초라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식들도 돈 때문에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건 매한가지다.
주부 박모(38) 씨는 친정에 가면 올케와 함께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신세. 언니 2명이 모두 잘 살아 부모님께 '뻐근한' 선물을 챙겨오면 눈치가 보인다. 박 씨는 "나에게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몸으로라도 때워야겠다는 생각에 팔을 걷어 부치게 된다"며 "자식도 부모한테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한 거 같다"고 말했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모를 만난 자식들은 은근한 기대를 했다가 서운해 하기도 한다. 맞벌이 주부 차모(35·서울 창동) 씨는 "집값도 너무 많이 오르고 애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게 힘들어 미리 유산을 주시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요즘 시부모님들이 너무 약으셔서(?) 찔끔찔끔 도와주시지 큰 돈은 절대 안 주셔서 서운한 때도 있다 "고 고백했다.
시중은행 프라이빗 뱅킹(PB) A 지점장은 "고객 중 재산 상황을 자식이나 아내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고 오로지 PB 에게만 털어놓는 분들이 꽤 있다"며 "요즘엔 세금 때문에 자식에게 증여하는 분들도 많은 데 재산을 자식에게 '안기는' 게 아니라 여유 부동산을 세놓아 월세를 생활비조로 자식에게 줘 자식을 휘어잡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