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미술 기행

라틴 화첩기행

김세곤 2006. 11. 30. 21:50

 

 

 [김병종의 라틴 화첩기행④] 멕시코- 프리다칼로 기념관

지붕도 벽도 창문도 모두 푸른색
그 블루 깊숙이 출렁이는 우울


▲ 주렁주렁 매달린 원색 사탕들을 메고 정체된 자동차 사이를 누비는 멕시코시티 행상소년.
#1 멕시코 풍경화

대지를 하얗게 표백시키는 햇빛,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멕시코 선인장,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인디오여인들의 마야유적지 테오티와칸을 벗어나 차는 뭉게구름처럼 피어 오른 뿌연 매연 속의 멕시코시티로 들어간다. 앞뒤로 꽉꽉 막혀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택시는 둥근 광장 소칼로까지 들어와서는 아예 서버린다. 기사는 플래카드와 확성기 소리로 어지러운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 데모 속을 뚫고 내가 가려는 코요아칸까지 다녀오려면 해가 지고 말 것이란다. 피켓과 현수막을 든 사내들이 도로를 메우며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의 선거가 부정이라고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는 것. 서울과 다른 점이라면 시위대 틈틈이 특이한 모양의 가면과 색색의 알사탕을 파는 거리상인들의 모습이다. 커피나 음료수라면 몰라도 격렬한 구호의 거리에 원색가면과 알사탕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시위 자체를 축제 비슷한 퍼포먼스로 보이게 하였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멀찍이 서있던 그 유명한 마리아치 밴드들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챙 넓은 모자 솜브레로를 쓴 땅딸막한 키의 사내들은 기타와 바이올린을 느슨하게 둘러멘 채 순식간에 둘러싸고 베사메무초 한가락을 뜯는다. 하지만 갈길 바쁜 나그네는 그 음악 일용노동자들의 노랫가락을 뒤로하고 늘어선 택시 쪽을 향해 연신 코요아칸을 외친다.

▲ 코요아칸 프리다 칼로의 기념관. 그녀의 작품이 상설되어 있는 이 푸른 집에서 그녀는 생전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힘들게 바꾸어 탄 택시기사는 엄청난 떠버리 청년. 창문을 열어 쿵작쿵작 라디오의 볼륨에 맞추어 흥얼대는 그는 자동차야 막히건 말건 삶이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태도이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가라고 묻자 엄청난 빠르기로 토해내는 멕시코 말 속에 ‘선샤인’ ‘해피’ ‘카리브’ ‘걸’ 같은 영어단어들이 톡톡 튀어 오른다. 대충 이런 뜻이 아닐까. 태양이 빛나는 카리브가 있고 애인이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 정체는 풀릴 기미가 안 보이고 에어컨 없이 열어놓은 차창 밖으로는 더운 김이 훅훅 끼쳐오는데, 노점상들은 차창으로 연신 색색의 해골가면이나 모형자동차들을 들어 보이며 지나간다. 멕시코의 작열하는 태양 속에는 삶과 죽음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것일까. 해골가면이야말로 유한한 삶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멕시코식 사랑법인가 보다. 입에 넣는 순간 혀와 입술을 물들이고 말 듯한 불량식품 같은 빨주노초 사탕을 들이밀고 권하는 소년에게 사탕 한 봉지를 사고 재빨리 스케치북과 붓펜을 꺼내어 제 모습을 그려 보이자 우와 하며 놀란다.

#2 푸른 집으로 가는 길

마야의 마법에 걸린 것일까. 멕시코시티를 벗어난 차가 코요아칸으로 접어들면서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낯선 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옛 인디오마을이었다는 곳답게 간간이 작은 키에 목이 굵고 다부진 몸매의 사내들과 여인들이 지나간다. 햇빛은 투명한 기름처럼 자글자글 끓어오른다. 크레파스를 함부로 문질러놓은 듯한 색색의 단층집들. 푸른 대문, 분홍지붕, 노란 벽…. 다시 초록 대문, 하늘색 담장, 붉은 지붕. 그 색채의 덩어리들이 말을 걸어오다 못해 무어라 외치며 쫓아온다. 금욕적인 수묵화 동네에서 온 나에게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 원색의 생생한 야만은 속수무책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온갖 색을 종처럼 부리며 살았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그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아니던가. 그들의 영지답게 코요아칸은 색채들로 소란하다. 프리다 칼로의 색은 무엇일까. 나는 바깥을 스치는 색깔들을 하나씩 살핀다. 마침내 맞닥뜨린 푸른 집. 지붕도 푸르고 벽도 푸르다. 문도 푸르고 창도 푸르다. 생의 이면(裏面)이 아무리 잿빛으로 사그라져 내린다 해도 내 인생의 팔레트만은 푸른색으로 채우겠어, 그 집에 한때 살았던 여주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나는 푸른색들의 미세한 차이와 농도를 가늠해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블루, 우리는 막연히 푸른색에서 희망의 기미를 읽어내지만 본디 푸른색 깊숙한 곳에는 우울이 출렁이고 있다. 그렇다면 프리다의 푸른 집은 그녀의 생을 직역한 것이 된다. 이 광기와 몽환의 집은 동시에 우울의 우물인 것이다. 짙은 일자눈썹 아래 쏘는 듯한 눈빛의 프리다 칼로. 사진가였던 독일인 아버지와 인디오여인을 어머니로 둔 그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사람의 이름은 운명을 지배하는 것일까. 그녀의 아버지는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풀네임 중 자기애 강하고 자유분방하며 타고난 유혹자인, 그리고 그 성격 때문에 결국 파괴되고 마는 카르멘이라는 운명의 패를 집어 든다. 그녀의 생은 한사코 프리다라는 이름을 배신한다.

▲ 프리다 칼로의 기념관이 있는 멕시코시티 외곽 코요아칸의 동네인상.
#3 고통의 여사제

고통, 그렇다. 프리다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은 그녀 그림의 화두였고 동력이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그녀는 18세 때 다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다. 타고 가던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면서 밀려들어온 철골이 골반과 자궁을 관통한다. 오래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천장에 거울을 붙여두고 제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통에 찬 자화상시리즈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두 번의 대형 사고를 당했다고 회고한다. 교통사고가 그녀의 일생을 관통한 육체적 고통이었다면 멕시코의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은 그녀를 괴롭힌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었다. 고통의 격렬함으로 따지자면 두 번째가 더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디에고와의 결혼이 여성으로서는 재앙이었지만 예술가로서는 축복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 것일까. 순탄한 결혼이었다면 고통의 여사제로서의 프리다도, 그녀의 그림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맨발을 디밀듯 푸른 대문으로 들어선다.

▲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왼쪽)/코요아칸의 생가 푸른집(오른쪽)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의 화가. 멕시코시티 외곽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불구와 사고,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삶을 살며 자화상 중심의 자전적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벽화작가 디에고 리베라와 별거와 재결합을 반복한 애증의 결혼생활로도 유명하다.

남다른 고통과 질곡을 겪으면서도 혁명의 바람이 거세던 멕시코의 현실 속에서 강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 페미니스트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코요아칸의 생가 푸른 집은 그녀의 기념관이 되어있다.

김병종